<일요특집> 해병대 사태로 본 군 수사의 한계 ②군사경찰의 고백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9.25 12:50:58
  • 호수 14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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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대령에 술 한 잔 사고 싶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박정훈 대령을 만나서 꼭 술 한 잔 사고 싶다.” 전직 군사경찰의 말이다. <일요시사>는 전·현직 군사경찰을 포함한 군 관계자 5명을 만나 최근 발생한 해병대 채수근 상병 순직사건을 비롯한 전반적인 군사경찰 수사에 관해 들어봤다.

군인이 사망했을 때 사망 동기와 원인을 밝히는 것은, 민간인이 사망했을 때의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 중요하다. 이 자체가 어불성설로 여겨질 수 있으나, 민간인이 사망한 경우에는 극단적 선택과 타살을 구분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군인은 극단적 선택과 타살을 구분하고 거기에 더해 사망 원인과 동기에 따라 순직 여부가 판단된다. 

끝없는
사망사건

설령 사망한 군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여도, 사망 원인이 공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면 순직으로 인정된다. 한국전쟁 이후 군 내 사망 사건은 꾸준히 줄었다. 유신정권기인 1970년대에는 1400여명이었던 군 사망사건은 문재인정권엔 90명대로 대폭 줄었다. 

군이 군 내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2006년대를 기점으로 군사경찰이 군 수사 시스템을 재정립한 결과다.

25년 이상 재직한 전직 군사경찰 수사관은 “군 범죄 수사환경은 2000년대를 기준으로 구분된다. 2000년대 이전에는 수사관의 감으로 수사한 게 사실”이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증거를 위주로 한 과학수사가 지금까지 이뤄지고 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군 수사 결과가 조작돼 완벽하게 뒤집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군 수사체계가 발전했다는 증거다. 반면, 여전히 군사경찰 수사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은 묵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재조사 활동 결과서 보듯, 군에서 사망한 군인의 사망 원인이나 사망 결과가 바뀌기도 했다.

이 자체로 군사경찰이 군 수사 과정 중 은폐나 조작했다는 증거가 되진 않지만, 분명히 수사 과정서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애초에 군사경찰이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수사 방향을 정해놓는 경우도 있다.

한 군 관계자는 “절대적 권한을 가진 사단장이나 군단장(지휘관)의 성향에 따라서 사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수사기관의 대표 군사법 경찰관(헌병 대장)이 직속상관이어서 진급 때문에 눈치를 보게 된다”며 “군사경찰이 지휘관의 의중을 맞춰서 수사 결과를 내놓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군은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특수한 상황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는데, 결국 이런 상황으로 국민이 군 수사 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같은 맥락서 군 관계자는 최근 발생한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을 둘러싼 외압 의혹에 관해서, 분명한 군의 과실이라고 지적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수사 방향
지휘관 의중 맞춰서 결과 도출


군 관계자는 “채 상병 사망사건은 이미 군사경찰이 초동조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물살이 센데 들어가서 수색하라고 한 것은 분명 잘못된 것 아니냐? 지휘관의 조치 부실 결과”라며 “군 수사 1차 초동조사에서 사망 원인이 지휘관 과실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도출돼 박정훈 대령이 관계자 8명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보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문건은 해군 참모총장과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 및 결재까지 완료됐음에도, 다음날 돌연 수사 보고와 언론 브리핑 등이 취소됐다. 8명 중 한 명인 임성근 사단장이 빠지고 대장급 2명의 혐의만 경찰로 이첩됐다. 

이 부분에 관해 군 관계자는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되는 판단이다. 이럴 거면 군은 현장 보존만 하고, 경찰이 초동수사부터 해야 한다. 군사경찰 측에서 해병대 사령관, 해군 참모총장, 국방부 결재를 맡았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이미 채 상병 유가족에게 상황 설명을 마쳤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1차적으로 군사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사건 현장을 훼손하지 않도록 현장 통제 라인을 설치한다. 유가족이 현장에 도착하면 군사경찰이 ‘현장 감식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라고 유가족의 허락을 구한 뒤, ‘입회에 참여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절차를 거쳐 현장 감식을 진행한다.

군 관계자는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이미 유가족이 상황을 다 아는데, 서류가 바뀐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유가족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특히 조사 서류는 수사관이 조사 결과를 적어서 본인 도장을 찍는 순간 공문서다. 그런데 윗선서 이 문서를 바꾸라고 지시한다면 자체가 문제로, 어떤 이유라 해도 그 순간부터 공식적인 은폐‧축소가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사관
입장은?

결국 유가족은 이미 현장서 조사 상황을 확인했는데, 박 대령은 이 일로 항명죄에 걸려버렸다. 이때 박 대령은 조직을 살리기로 선택했다는 것이 군 관계자의 의견이다. 또 군 사망사건을 경찰이 이첩받은 후의 문제점도 있었다. 전직 군사경찰은 ‘군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만든 법’이라고 표현했다.

2021년 5월21일 공군 제20전투비행단 소속 이예람 중사의 성범죄 사망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공군 참모총장은 8개월 만에 사의를 표하고 불명예 전역을 했다.

해당 사건으로 여론은 “군사법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형성되면서 군 3대 중대 범죄인 성범죄·사망사건·입대 전 사건은 수사권을 민간경찰에 이관한다는 내용의 군사법원법이 개정됐고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됐다. 

법 개정으로 군 수사의 문제점이 해결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컸지만, 군사경찰과 경찰 사이에서는 혼란이 빚어졌다. 경찰에게 사건을 이첩하는 것 자체가 군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전직 군사경찰 관계자는 “군에서 사망사건이 발생하면 군사경찰에게 신고한다. 현장 보존 등의 초동수사에서 사망 원인을 판단하고, 사망 원인이 범죄로 인한 것이면 경찰에 사건을 인계한다. 결국 군이 사건 인계를 지연해도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검토 중’이라고 말하면, 경찰은 이를 확인하기 어렵다. 결국 유가족이 2차 피해를 겪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이 초동수사 단계서 범죄행위가 있다고 판단을 내린 뒤 경찰에 수사를 이관해도, 경찰 수사 단계서 군 사망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확인되면, 사건은 다시 군으로 돌아간다.


경찰이 군 수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이유도 있다. 바로 군 강력 사건은 비무장지대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군인이 실탄을 들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범죄와 관련돼있으니 바로 경찰이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GP·GOP 지역은 군 사단장이라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으며 경찰도 마찬가지다.

군사경찰 관계자는 “단순히 사고가 났다고 경찰에게 ‘빨리 군대로 들어오라’고 할 수 없다. 그 절차를 밟는 데만 한나절이 걸릴 것이다. 군사 요충지니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현장은 계속 방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이 경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문제점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군 자체의 특성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군사경찰 관계자는 “군대 내에서 난 사망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경찰이 들어와도, 군이 경찰에 협조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것이다. 결국 군 내부 문제를 외부에 밝히는 것이고, 군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게 현실”이라며 경찰 수사의 어려운 점에 대해 토로했다.

서둘러 
덮기 급급

결국 군사경찰이 사망사건을 수사했을 때 내부 문제를 숨기거나, 편의를 봐줄 것이라는 생각에 경찰에 수사를 맡긴다는 것은 근시안적인 사고라는 것이다. 


물론, 군 수사에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군 내부서 사망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 사실을 가장 빨리 아는 것은 같은 부대원이다. 결국 발생 부대 지휘관이 사건을 군사경찰에게 신고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특징이 군대의 ▲사건 현장을 임의로 훼손하거나 ▲증거를 인멸하거나 ▲관계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하는 등의 가능성을 만든다. 

군사경찰 관계자는 “사건 발생 부대 지휘관과 간부들이 군 사망자의 일기장, 메모지를 군사경찰에 신고하기 전 훼손한 사례도 적지 않다. 부대의 부정적인 내용이 적혀 있어서다. 또, 동료 병사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하는 등 계획적인 사건 축소‧은폐 행위가 군 수사 과정서 발각돼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상황을 회상했다. 

이런 가능성이 있더라도 현시점서 군사경찰의 수사 결과가 완벽하게 은폐·축소될 수는 없다. 이미 수사 시스템이 확립돼있고, 수사의 전 과정을 유가족이 지켜보고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사 과정 중 정무적 판단이 개입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군사경찰 관계자는 “사건 발생 부대 지휘관 또는 관계자들과의 평소 친밀도나 지휘관 또는 관계자가 ‘잘나가는 사람인지 아닌지’ ‘부하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지, 없는지’ ‘주변 여론이 긍정적인지 아닌지’ ‘상급 지휘관(여단장, 사·군단장)에게 신뢰를 받는지 아닌지’ 등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게 수사의 강도, 범위 등이 눈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친다”며 “이렇듯 사건 관계자 선정과 처벌 수위까지 정무적인 개입이 작동되면서 사건 은폐, 축소 의혹을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또 ▲사건 신고 접수 후 수사관 지연 출동에 의한 초동조치 부실 ▲현장 보존 미흡으로 인한 결정적인 증거물 훼손 및 증발 ▲조작된 진술에 미검증 등의 원인으로 수사부실 결과를 낳게 되고 수사 방향 설정에 혼선을 초래하는 사례들도 들었다.

사건 현장선 수사원칙 무시되는 상황
경찰 수사 ‘협조할 수 없는’ 사정은?

그렇다면 군사경찰의 수사를 신뢰하기 위해선 무슨 노력을 해야 할까? 군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에는 군사경찰이 선망 보직이었다면, 현재는 기피 보직으로 변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수사관들의 ▲일반 보직에 비해 휴무일 없는 잦은 비상대기 ▲가중되는 책임성 ▲각종 민원에 시달려야 하는 열악한 수사환경을 들었다.

여기에 더해 최근 들어 베테랑 군사경찰 수사관들이 자격을 자진해 반납하거나, 조기 전역을 해 제2의 직업을 선택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는 실정이다.

군 관계자는 “이런 문제는 군사법원법 개정 이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사망사고 발생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군사경찰 수사관이 현장 통제 라인만 설치해놓고 무작정 대기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현장을 훼손했다는 오해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군사경찰은 ‘법이 오히려 수사의 원칙을 깨고 있다’는 불만으로 의욕상실 상태다. 현장에 사법경찰, 국가인권위원회 관계자들과 유가족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 보존만 한 채 대기만 한다. 결국 수사원칙은 무시되는 상황”이라고 고백했다. 

이 밖에도 ▲민간 자원 직접 선발권이 없는 우수 자원의 제한 ▲편제 대비 과부족으로 인한 과도한 업무 집중 ▲과학수사 장비 획득 시 중·장기 계획으로 기본 3~5년 소요 ▲범죄 수법 발전에 비해 복잡한 절차 등으로 인한 교육 효과의 저해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군 수사는 ‘투명성’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서 발전돼야 한다. 이 방법에 대해서 군 관계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먼저 약해진 군사경찰의 역량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 군 관계자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그러나 군의 각종 사건사고가 국민들이 볼 때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군사경찰 관계자는 “최근 군사법원법 개정으로 군사경찰의 수사 기능을 떼어내 각 군 참모총장 직속으로 들어가 수사의 독립성을 보장한 것은 큰 발전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은 지휘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보장받을 수 없다”며 “아예 각 군의 수사 기능을 통폐합해 국방부 장관 직속으로 만들어 범죄수사 기능을 완전히 독립시키고, 각 군은 교육훈련과 전투 준비만 집중해 범죄수사에 지휘 부담을 없애는 것이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일요시사>가 만난 상당수의 군 관계자는 군사경찰의 수사 기능이 발전돼 투명한 군대가 될 때, 지휘권 보장과 전투력 향상은 물론, 군사력이 더 증진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성하고 
투명하게

이들은 “전·현직 군사경찰 수사관은 군 내 수사환경의 급속한 변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겠지만 가장 우선시 돼야 하는 것은 ‘군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고자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여태까지 군이 잘못한 것은 반성하고 이제는 투명한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방위를 위해 귀한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를 생각해 한 사람의 생명도 헛되게 잃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현장서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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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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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