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둘은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시원스레 느껴졌다.
피에로는 환락가를 빠져나가 시멘트 다리를 건너서는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농촌 마을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벽에 슬래브 지붕이 얹힌 삭막한 집들이 무리져 있었다.
“저긴 양갈보나 양공주라고도 불리는 여자들이 많이 세들어 살아.”
삭막한 집들
피에로가 골목을 돌아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인적이 끊긴 오솔길을 계속 걸어갔다. 차가운 하늘에 별이 반짝이며 저들만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다.
“별들의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니?”
피에로가 물었다.
“글쎄…그런데 형은 왜 무대에서 한국말을 쓰는 거야? 미군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을 텐데 말야.”
“흥, 영어만 언어냐? 내가 영어를 씨부려 봤자 얼마나 잘 씨부리겠냐? 그리고 사실상 난 언어를 뛰어넘는 연기를 하고 싶어. 아마 미군 놈들도 딱딱한 의미보다는 미지의 동물이 지껄이는 소릴 더 좋아할걸, 하하”
보산리의 낡은 철둑길 주변에 닥지닥지 붙은 하꼬방엔 하류급 위안부들이 살고 있었다. 철길 언저리엔 마흔 살, 쉰 살을 넘은 늙어빠진 히빠리들이 지나가는 미군들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대부분 질겁하며 뿌리치곤 했다. 푼돈밖에 없는 녀석이나 술과 마약에 취해 헤롱거리는 놈들만 그녀들을 따라갔다. 한동안 오솔길을 걸어가자 산기슭에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간판의 칠이 다 벗겨진 허름한 가게에서 피에로는 소주와 오징어를 사 들고 나왔다. 완만한 길을 좀 에돌자 문득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나무 기둥과 판자벽은 낡아빠져 곧 쓰러질 듯했고 볏짚을 엮어 얹은 지붕은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게 삭아 마치 빈민 노인의 머리카락 같은 몰골이었다.
“구름아, 들어가자. 여기가 내 임시 간이역이야.”
피에로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는 선감도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부터 청운을 구름이라고 불렀다. 푸른 하늘의 흰 구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지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오두막 안쪽엔 방 비슷한 공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잔뜩 찌그러진 상태라 머리를 숙인 채 기듯이 겨우 들어갔다.
“히히, 대충 앉아 봐라. 그래도 난 이 정도나마 감사하고 싶다. 청량리 나이트클럽에서는 한 방에 대여섯 명씩 껴 누워 잤지. 오사리 잡놈들의 인생 얘기도 들을 만했지만 독이 되는 것도 많아. 거기 비하면 여긴 작은 천국이야. 히히”
피에로는 양초에 불을 붙이고 나서 술과 안주를 꺼내 놓았다. 낡은 군용 담요로 외풍 구멍을 차단하고 바닥에도 두껍게 깔아 놓아, 바깥에서 불어대는 거센 바람마저 오히려 안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기적 같구나야. 너도 나도 어찌 살았을까. 나비가 아닌 나방 같은 삶…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피에로는 소주잔을 홀짝 비웠다.
“쓸쓸할 땐 늘 형의 미소를 생각했었지.”
“헤헤…나도 구름이 니가 어딘가에 살아 있으리라 믿으면서도 찾아 나설 생각은 하지 못했어. 형편이 돼야지. 그래서 내가 우선 배우로 성공하면 좀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야.”
“그랬구나. 그래, 그 거친 바다에서 어찌 살아났어? 듣기론 반쯤 죽은 상태로 파도에 밀려 다시 선감도로 돌아갔다던데…믿기지가 않아. 상어 밥이 된 줄 알았다니까.”
“흐흐…나도 저승 길목의 삼도천까지 갔다 온 셈이야. 자연의 힘은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려 주기도 하나 봐. 바람결과 물결…삼신할미의 가호로 알고 남은 생은 감사하면서 살려고 해. 히히”
“사실 난 아직도 진짜루 형인지 유령인지 좀 헷갈려. 헤헤”
둘은 건배하고 소주를 마셨다.
“그건 그렇고 구름이 넌 그동안 어떻게 살았었냐?”
피에로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난…난 그냥 거센 물살에 시달리다가 여기로 떠밀려 온 느낌이야.”
청운은 사이비 종교단체에 잠입했다가 쫓겨나온 이야기, 그곳의 사악한 실상, 그리고 특수부대에 들어가 겪은 체험 따위를 대충 들려 주었다.
곧 시멘트 다리 건너 시골길로
빈민 노인 머리카락 같은 몰골
너무 속속들이 늘어놓을 계제도 아니었지만, 피에로 자신이 암담하고 처참한 얘길 싫어했던 것이다. 그는 앞니 빠진 자리를 내보이며 히벌쭉 웃었다.
“그랬구나. 어쩐지 전보다 몸도 강건해졌지만 기운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어. 다리만 예전 같으면 좋을 텐데….”
“지금보다는 차츰차츰 나아진다니까 크게 걱정할 것 없어. 흐흐”
“그렇구나. 그래야지. 그럼 미래의 완쾌를 위하여 건배!”
둘은 잔을 쭉 비우곤 웃었다.
“형은 왜 여기로 들어온 거야? 서울에 질려서 도피? 흐흐, 어떤 여자를 따라왔다는 소문도 있던데 말야.”
“히히, 사실 여자가 웅지를 품은 남자 뒤를 따라오는 게 예쁜데 말이지…흠, 내가 뒤따라오긴 했지만 여자 꽁무니를 쫓아온 건 아니니껴 오해랑 말랑께. 서로 콤비를 이뤄 무대에 서야 하니 왔을 뿐야.”
“그렇구나. 아까 그 꽃팔이 아가씨?”
“응.”
“연인 사이는 아니구?”
“야, 그런 게 어딨냐. 진짜 채플린은 부자에다가 감독에 유명한 배우였으니까 고다르를 연인으로 챙겨…사랑과 연기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렸겠지만…나 같은 새우야”
“새우보다는 차라리 곤쟁이라고 해. 우리가 선감도에서 질리도록 먹은 곤쟁이젓…그런데 형은 꿈이 뭐야? 공상 속에서 꾸는 꿈 말고 현실에서 이루는 것”
“음, 일단은 미8군 연예단에 들어가는 거야. 치사스럽지만 그래야 좀 알아주니까. 한국 사람들은 미군이나 미국인들이 꺼림칙한 듯 쌍을 찡그리면서도 속으론 은근히 좋아하거든. 히히, 그래도 양놈들의 노리개가 되고 싶진 않아. 언젠가는 순수한 금수강산의 엿장수로 떠돌아야지. 히힛”
청운은 잔을 들어 투명한 소주를 바라보았다.
“난 저격수가 되고 싶어.”
“뭐? 특수부대에서 총질은 많이 해봤을 텐데 지겹지도 않니? 사실 난…… 니가 그런 델 다녀왔다는 게 아직도 잘 믿기질 않아.”
“형, 꼭 총으로만 저격하는 건 아니잖아.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엔 아마 이 세상에서 통하는 저격 방도가 꼭 있을 거야. 그 전에 나 자신부터 저격해야겠지.”
“뭔 소리야?”
“내 속에도 더럽게 악한 요소가 많이 있으니까. 흐흐”
청운은 주절거리며 술을 쭉 들이켰다.
“야, 뜬구름 잡는 소리 그만두고…너 앞으로 어찌 살 작정이니?”
투명한 소주
“뭐 그냥 구름처럼 떠돌면서 세상 공부나 하다 보면…”
“얼뜨기 같은 소린 집어치고 현실을 봐야지, 임마! 세상살이가 삼팔선을 넘나드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음, 그렇겠지. 선감도 수용소든 특수부대 훈련소든…최하급이나마 일단 의식주는 보장되니까, 흐흣…”
“그래, 이게 우리가 사는 현실이야.”
“흐흐흐”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