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대담> ‘숨은 킹메이커’ 신계륜 살벌한 경고

“안전한 길로만 가면 진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정치인으로 겪을 수 있는 흥망성쇠를 다 경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킹메이커’ 역할을 하기도 했고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도 갔다. 남북 관계에 있어서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장면마다 지근거리에 자리했다. 지난해 복권돼 8년 만에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한 신계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났다.

탄핵 정국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내릴 판결에 윤석열 대통령의 운명이 달려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이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 청구를 인용하면서 탄핵 심판 사건에 또 하나의 변수를 던졌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은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때와 달리 변수가 많아 전문가들 사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굴곡 많은
정치 인생

정치권은 변수가 등장할 때마다 출렁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탄핵 인용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섰다. 그러면서도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국민의힘은 신중론을 고수하면서도 장외로 나서는 의원들을 말리진 않고 있다. 그 사이 국론은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다.

신계륜 전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이 탄핵 정국서 나타난 일련의 정치적 흐름을 읽지 못하면 본선서 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박 전 대통령 때와 달리 탄핵 반대 세력이 거대해진 점에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다. 탄핵 찬성, 반대 집회에 모두 참석해 봤다는 그는 “(탄핵 반대 집회에)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8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신 전 의원은 그해 5월 ‘서울의봄’ 당시 학생들을 이끌고 계엄령 철폐 시위에 나서는 등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다. 1991년 신민주연합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정계에 입문했던 그는 14대, 16~17대, 19대 총선서 당선돼 4선을 지냈다.


신 전 의원의 정치 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15대 대선에 나섰을 때는 청년위원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후보 비서실장으로 역할을 했다. 민주당서 나온 3명의 대통령 가운데 2명의 당선에 기여한 것이다. 동시에 17대 국회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고 2017년 입법 로비 사건으로 정치 활동이 중단됐다.

그로부터 8년 후 신 전 의원은 다시 정치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동안 2008년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의 18대 총선 대패 이후 설립한 사단법인 신정치문화원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물밑에서 남북 관계 개선에 몰두했던 그였다. 신정치문화원의 핵심사업인 ‘걸어서 평화 만들기 한라에서 백두까지’도 꾸준히 진행 중이었다.

지난 1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신정치문화원 사무실서 신 전 의원을 만났다. 사무실에는 그의 정치 인생을 상징하는 물건이 많이 있었다. ‘걸어서 평화 만들기 한라에서 백두까지’ 행사를 하면서 맞춘 조끼가 벽 한쪽에 진열돼있었고 인터뷰를 진행한 사무실에는 2007년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을 기념하면서 제작한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신정치문화원 이사장으로
8년 만에 정치적 메시지

신 전 의원은 “당시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측에서 (시계를)스무 개 제작해 갔는데 북한서 청와대를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는 이유로 받지 않았다.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들고 왔다. 이후에 기념으로 받은 것을 걸어뒀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신 전 의원의 정치 인생과 앞으로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망가진 남북 관계에 안타까움을 표했고 탄핵 정국과 조기 대선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또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로 꼽히고 있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 사건에 대한 헌재의 빠른 판결을 촉구하며 거리로 나선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조용히 응원하면서도 현재 당내 상황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동시에 탄핵 정국을 통해 싹트기 시작한 정치 지형 변화에 대해 “내가 틀렸다”면서 흥미로움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못 내는 소리를 정치 원로인 내가 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창당 선언”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윤 대통령은 민주당을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를 막지 못한 국민의힘에 대한 불만을 이번 비상계엄 선포로 터트렸다. 민주당의 탄핵, 입법 폭주에 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느냐는 분노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이런 생각을 담화, 편지, 헌재 변론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했다. 내가 놀란 대목은 윤 대통령의 말에 상당수 사람이 공감을 표했고 이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물론 극단적인 정치 성향의 사람이 있었지만, 표면화되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이른바 극우 보수 성향을 띤 국민이 전체의 20%는 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신 전 의원은 이 같은 상황이 장기적으로 봤을 땐 우리나라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분화를 통해 정치 다변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과거 민주화가 간절했던 시기에는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을 사이에 두고 정권 연장과 정권교체라는 대의가 충돌했다.

일단 이겨야 다음 행보를 모색할 수 있기에 정당은 ‘승리’에 사활을 걸었다. 빼앗으려는 쪽과 지키는 쪽의 대결은 ‘결집’을 불렀다. 보수진영은 ‘3당 합당’을 감행하면서까지 정권 유지에 매달렸고 진보진영은 그 벽을 부수기 위해 몇 번이고 두드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정치 상황은 양당제로 나아갔다.

민주화의 주역
1991년 정계로

신 전 의원은 탄핵 정국이 만들어낸 현 상황이 다당제로 가는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소위 합리적 보수 성향의 분들은 국민의힘에 남고 극우 보수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창당의 깃발을 꽂으면 된다. 현 상황서 윤 대통령과 한동훈 전 대표가 함께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극우 보수층 가운데서도 20~30대 남성의 마음을 잡지 못한 부분에 대해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데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전 의원은 “그동안 민주당은 20~30대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해 공허하고 구호적인 얘기만 던졌다. 이들은 민주화가 간절한 시대에 살지 않는다. 이미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상태서 ‘나한테 중요한 게 뭔지’를 따지는 세대다. 그들의 손에 민주당이 정말 필요한 걸 쥐어주려고 노력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제언했다.

신 전 의원은 민주당이 이런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탄핵 반대 집회에 사람이 모이는 걸 보고 민주당서 ‘일시적인 현상’ ‘순간적인 반발’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증명되지 않았나.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건 잘못됐지만 거기까지 몰아붙인 민주당도 잘못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분명히 실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윤 대통령을 구속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과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꽤 들었다”며 “(민주당이)비상계엄 사태에 너무 놀라 허둥지둥하면서 조급하게 군 부분이 드러났다고 본다. 헌법에 따라, 법에 따라 절차대로 탄핵하고 수사하면 되는데 ‘사형시켜야 한다’는 등 과한 표현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든 부분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 대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신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의)구속 취소 청구 인용으로 변수가 생겼다”면서도 “헌법상 비상계엄 선포 배경(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은 인정될 것 같지 않아 결국 탄핵안은 인용될 것으로 본다”고 조기 대선 가능성을 언급했다.

신 전 의원은 “대통령 경선 현장서 이 대표가 연설하는 걸 처음 봤는데 감탄했다. 미국 힐러리 클린턴에 맞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던 버니 샌더스가 떠오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표의 연설은)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직접적이었다. 손에 딱딱 쥐어주는 듯한 연설이었다”며 “연설 이후 이 대표에게 ‘잘 들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고맙습니다, 선배님’이라고 답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신 전 의원은 이 대표를 ‘뛰어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부정적 인식이 많은 점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도 이 대표는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야당 대표로서 윤석열정부의 집중 표적이 된 점도 원인 중 하나겠지만 이 대표가 자초한 부분도 절반은 차지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능력 좋은데
인성은 결격

신 전 의원이 특히 지적한 부분은 ‘인성’이었다. 능력 부분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인성 부분에서 결격 사유가 많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측근에 대한 언행이 아쉽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는 “대북 송금 사건을 보자.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1심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대장동 사건으로는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구속돼있는데, 이 대표는 이들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어 “재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부분은 법정서 다툰다 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그들의 상관으로서 ‘내 책임’이라는 발언이 있어야 했다. 이 대표는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등 주변 인물이 연루된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에 대한 죄송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의 말 바꾸기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신 전 의원은 “판단이 빠른 건 좋지만 상황에 따라 말이 자주 바뀌는 부분은 좋지 않다. 특히 불체포특권과 관련해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더니 본인이 연루되자 말이 없어졌다. 이 외에도 이 대표의 말 바꾸기 사례가 참 많다”고 쓴소리를 남겼다.


신 전 의원은 이 대표가 좀 더 내려놔야 한다고 했다. 민주당 당헌·당규대로 당원을 대상으로 대선후보 경선을 진행하면 이 대표 85%, 나머지 후보 15%의 극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신 전 의원은 ‘일극 체제’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인 현재 민주당 상황서도 이 대표가 안전한 길로만 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민주당원 사이서 85%를 득표한다는 것은 사실상 추대나 다름없다. 하지만 진짜 싸움은 본선이다. 수많은 선거를 겪어본 입장서 안전한 길만 찾는 후보는 낙선한다. 국민이 모를 것 같아도 다 알아본다. 어떤 후보가 국민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신 전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할 당시 후보 비서실장을 맡았고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진행할 때는 협상단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은 약체로 꼽히던 후보다. 여론조사로는 이회창 후보는 물론, 정몽준 후보에게도 지는 걸로 나왔다”고 회상했다.

탄핵 반대 집회 인원에 놀라
여당은 분립, 야당은 위험천만

이어 “하지만 단일화 과정서 노 전 대통령은 내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 협상에 쟁점이 생겨도 ‘내가 다 양보하겠다’고 나섰다. 곁에서 지켜본 노무현의 리더십은 ‘내던지는 것’이었다.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가 지지를 철회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나. 그 ‘내려놓음’이 상대 후보를 이겨내는 힘이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수많은 선거를 치러본 신 전 의원은 후보는 가장 최악을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누가 봐도 이기는 상황서도 질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의힘이 1명의 후보로 단일화를 이뤄내면 대선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민주당 내에 다음 대선서 ‘여당’이 되리라는 생각이 팽배한 지금 가장 ‘위험천만’한 때라고 분석했다.

신 전 의원은 “민주당원의 추대만으로는 이 대표의 인성이 야기한 위태로움을 극복할 수 없다. 특히 이런 단기간의 비상시국에는 양보와 희생 없이는 비토 세력을 설득하기 어렵다. 나는 이 대표에 앞서 민주당과 평생을 함께한 정치인이다. 이번에는 절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 전 의원이 주장하는 방식은 ‘오픈프라이머리’, 즉 완전국민경선제다.

그는 “국민의힘 지지자를 거르고 나머지 국민을 대상으로 경선을 치르는 방식을 채택하길 바란다. 무수한 선거를 치러본 입장서 역선택 방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방식을 통해 선출된 민주당 후보와 다른 야당 후보가 또 한 번 경선을 치러 최종 후보를 결정하면 더 좋다. 이 대표가 최종 후보로 결정된다면 사법 리스크에도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국민은 선택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윈-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헌‧당규가 문제가 된다면 비상시국임을 감안해 이 대표가 조치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은 이 대표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 대표에게 열혈 지지자가 아닌 국민의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라고, 나를 죽이든지, 살리든지 국민에게 모든 걸 맡기라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신 전 의원은 당내 소위 말하는 ‘비명(비 이재명)계’ 정치인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만 기댄 채 제대로 된 행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뭔가를 하고 싶으면 나서서 ‘깃발’을 들어야 한다. 깃발도 들지 못한 채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건 리더의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노처럼
던져라

신 전 의원은 인터뷰 말미에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좋은 상황을 생각하고 선거를 치르는 후보는 바보다.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게 내 선거 철칙이다. 과거 이회창 후보는 5년 내내 여론조사에서 1위였다. 그런데 본선에서는 졌다. 내가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 내게 불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 거기서 오는 감동이 국민의 선택을 좌우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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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