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안건을 의결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데 이어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상황서 정치적으로 개입했다는 비판이 상당하다. 인권위 내부 직원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어 후폭풍은 심각해질 전망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내란 수괴(우두머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석열 대통령을 사실상 옹호했다. 인권위가 의결한 안건에는 윤 대통령에 대해 불구속 수사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헌법재판소의 편향적 진행에도 문제가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독립기관이 정권 방패막이로 전락한 셈이다.
정치 개입
인권위 바로잡기 공동행동(이하 인권위 공동행동)은 지난 1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인권위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통과된 안건은 인권위가 보호해야 할 일반 시민들의 권리와 무관하고, 권력자인 대통령과 장관의 탄핵 심판에 인권위가 개입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날 인권위는 전원위원회(이하 전원위)를 열고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을 일부 수정해 의결했다.
김용원 상임위원이 주도해 발의한 이 안건의 주요 내용은 ▲윤 대통령 등 내란죄 피의자들에 대한 불구속 수사 원칙 준수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 철회 권고 등이다. 이 안건에는 안창호 인권위원장을 포함해 강정혜, 김용원, 이충상, 이한별, 한석훈 등 6명의 위원이 찬성했다.
이 안건에는 헌재가 헌정 위기 단축을 위해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하는 걸 놓고 “비상식적”이라며 헌재가 “실체적인 진실의 발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탄핵 심판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상태서 오로지 요식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며 “대통령이 신속히 계엄을 해제해 단시간에 그쳤고, 다른 국가기관의 권한 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건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비상계엄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윤 대통령의 궤변과 큰 차이가 없는 대목이다.
김 상임위원은 인권위 내부 매뉴얼도 무시하고 찬성 측 입장만 담은 보도자료를 강행하기도 했다.
같은 날 인권위는 안건 관련 두 쪽짜리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국가인권위원회, 헌법재판소·법원·수사기관에 관한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관련 인권침해 방지 대책 권고 및 의견 표명 결정’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0일 전원위 회의에서 의결된 안건의 주문만이 담겼다.
헌재·법원·수사기관에 감 놔라 배 놔라
이례적 내란 수괴 혐의자 감싸기 논란
인권위 내부에서는 이번 보도자료가 비상식적이고 반대 의견이 팽팽했던 전원위 회의를 왜곡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권위 보도자료 작성·배포 매뉴얼에 따르면, 보도자료 작성·배포의 기본 원칙으로 결정문, 조사결과집, 토론발표집, 시각적 자료 등을 참고 자료로 제공해야 한다. 인권위서 배포하는 대부분의 보도자료에 결정문이 첨부되는 이유다.
그러나 이번 보도자료는 결정문은 배제한 채 주문만 담았다. 이달 17일까지 반대 의견을 수렴하기로 한 만큼, 결정문 작성은 시작조차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매뉴얼에서 ‘언론 관심 사안, 국민 인권 보호를 위해 신속성을 요하는 사안은 결정문이 없더라도 결정 당일 또는 익일 보도자료 배포’ ‘사회 관심 현안에 대한 보도자료는 해당 위원회의 결정 취지, 배경 등 핵심 사항을 면밀히 반영해 왜곡이 발생하지 않도록 작성’이라고 적시돼있는 만큼 보도자료 배포와 작성은 중립성과 신중을 요한다.
이번 보도자료는 안건 제안자인 김 상임위원의 건의로 작성됐다. 그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개인 명의 보도자료를 인권위 양식을 빌려 배포해, 인권위 사무처가 ‘규정상 근거 없는 행위’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보도자료 관련 보고를 받은 안 위원장은 어떤 의견 표명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권고 거부해도 사회적 압력 무시 못해
유리한 여론 형성 극우세력 결집 유도
인권위의 권고는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의무적 명령이 아니다. 인권위법에 따르면 인권위는 관계기관에 인권 관련 정책과 관행의 개선을 권고할 수 있고 해당 기관은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지난 2017년 12월 당시 이성호 인권위원장의 특별보고를 받고 인권위 권고 이행 여부를 기관 평가에 반영할 것을 주문하는 등 인권위에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윤석열정부서도 인권위의 권고 불수용률은 적지 않았다.
인권위 관계자는 “과거 인권위 권고 수용률은 90%가 넘었다. 정부 기관의 권고 거부에 따른 개선안을 마련하려 수년간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인권위의 이번 안건을 헌재와 수사기관이 거부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나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인권위 출신 한 변호사는 “인권위가 그간 권고해 왔던 사례를 들며 기관 차원서 거부해 왔으나 이번처럼 재판 또는 수사 중인 상황에서는 피의자 신분인 인물이 ‘법꾸라지’처럼 정치적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관계자도 “인권위 권고가 강행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독립기관의 권고는 무시할 수 없다”며 “사회적 압력 또는 새로운 정치적 여론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차후 검찰이 윤 대통령의 구속 상태를 유지하며 재판을 진행할 때 극우 단체에 유리한 여론이 형성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나쁜 선례
검찰 관계자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을 구속 기소한 상태고, 보석 등은 사법부가 판단할 사안이다. 인권위의 권고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인권위 공동행동 관계자는 “윤석열의 구속 취소에 대한 법원 판단이 임박한 시점서 (안건 발의가)이뤄졌기에 우려가 큰 상황”이라며 “법원의 판단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며, 구속 취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극우 세력이 다시 폭동을 일으킬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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