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대명 흔드는 이재명 대항마 합종연횡 막후

다시 드리운 수박 그림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더불어민주당은 조기 대선을 확실시하면서 이재명 대표 체제를 굳히고 있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이들이 ‘이재명 일극 체제’를 비판하며 일제히 활동 반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곱지 않은 시선이 따갑지만, 앞당겨진 대선 시계에 저마다 분주한 움직임을 보인다. 각자도생하던 이들이 목소리를 합치면서 이 대표를 견제하고 나섰다.

대선은 더 많은 중도를 확보하는 쪽의 승리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경제 우클릭을 시도하자 국민의힘이 유산취득세 전환으로 맞불을 놓은 것 역시 조기 대선을 의식한 여론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당의 통합과 화합도 빼놓을 수 없다. 총선 전 이미 계파 갈등 최고조를 찍은 민주당이 조기 대선이라는 또 다른 상황에 놓였다.

명분 내세워
앞으로 전진

지난달 30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설 인사차 문재인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날 문 전 대통령은 “민주당과 이 대표가 통합하는 행보를 잘 보여주고 있다”며 “지금과 같이 극단적인 정치 환경이 조성된 상황에서는 통합과 포용 행보가 민주당의 앞길을 여는 데 매우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이 전했다.

아울러 문 전 대통령은 “당내에 비판적인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이 대표는 “당내에 (정치적 의견과 관련해)여러 스펙트럼이 있어 애로사항이 있다”면서도 문 전 대통령의 말에 공감하고 통합 행보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이 같은 문 전 대통령의 당부는 비명(비 이재명)계가 이 대표 일극 체제를 비판하고 이를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시 받아치며 계파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을 염려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루 전날인 29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이 대표와 친명계를 겨냥한 글을 작성했는데, 이를 도화선으로 날 선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김 전 지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표는 최근 정치 보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집권 세력의 핵심적인 책임과 의무는 통합과 포용”이라며 당에서 멀어진 사람들에 대한 사과와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을 폄훼한 당사자의 반성, 그리고 당 차원의 재발 방지 등을 요구했다.

아울러 김 전 지사는 “지난 대선 패배의 책임을 당내서 서로에게 전가하는 모습은 옳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마녀사냥하듯 특정인 탓만 하고 있어서는 후퇴할지언정 결코 전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치 문화가 우리가 저들과 다름을 증명하는 길”이라며 “일극 체제, 정당 사유화라는 아픈 이름을 버릴 수 있도록 당내 정치 문화를 지금부터라도 바꿔나가야 한다”고 직언했다.

문 전 대통령과 이 대표가 만남을 가진 당일에도 이 대표 체제를 겨냥한 쓴소리는 이어졌다. 지난 총선서 원외로 밀려난 비명계 민주당 박용진 전 의원은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막 대하는’ 민주당의 도덕적 내로남불을 그대로 두면서 이재명 1극 체제만 극복되면 청년 세대들은 우리를 지지해 줄까”라고 가감 없이 말했다.

이 두고 비호감+사법 리스크 집중 공격
“수박 들이면 아사리판” 개딸 맹공격

김부겸 전 국무총리는 CBS 라디오에 출연해 “민주당의 생명력은 결국 포용성, 다양성, 민주성”이라며 “민주당이 김 전 지사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비판 정도는 충분히 받아내야 당 지지가 올라간다”고 조언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도 “성찰해야 답이 보인다”며 “민주당은 공식적인 대선 평가를 하지 않았다. 패배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문재인정부에 떠넘겨졌고 지금까지도 문정부 탓을 하고 있다”고 아픈 부분을 찔렀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이 대표가 내세우는 실용주의를 에둘러 비판하며 “진보의 가치와 철학을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해 푸는 것은 필요하다”면서도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은 정체성을 분명히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비판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이유는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진 상황서 ‘이재명 체제로 대선서 승리할수 있는가?’라는 의문점이 제기됐고, 이를 명분으로 삼은 이들이 같은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이 대표 체제를 흔들려는 목소리는 비판의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 대표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다는 분석과 사법 리스크로 인한 불확실성이 굳어지면서 이재명 대안론이 고개를 들었다.

비판 목소리가 하루걸러 하나꼴로 나오면서 이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3일 “여러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함께 이기는 길을 찾는 데 노력하겠다”며 “작은 차이로 싸우는 일은 멈추고 총구는 밖으로 향했으면 한다”고 말해 다시 한번 당내 통합을 언급했다.

이어 “저 극단과 이단들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다”며 “내부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보다 민생, 경제, 안보, 민주주의를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통합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집안싸움은 뒤로하고 비상계엄 사태서 시작된 특수한 상황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통합과 포용의 정치를 말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역시나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이 대표는 “강성 팬덤에 휘둘린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던 만큼 지지층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설득하는지가 통합의 의지로 여겨질 전망이다.

까마득한
화합의 길

이 대표 팬카페인 ‘재명이네 마을’에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살벌한 비판이 오가기 시작했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단어는 ‘수박’이다. 이는 겉(파란색)과 속(빨간색)이 다르다는 의미로 비명계를 지칭하는 은어다. 지난해 8월 이 대표의 불체포특권 포기 서명에 이름을 올리거나 체포동의안에 동의한 의원을 색출해 ‘수박 리스트’를 만들기까지 했다.

아무리 이 대표가 통합을 주장해도 강성 지지층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민주당은 또 다른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재명이네 마을에서는 “수박이 들어오면 아사리판(깽판)이 난다” “제철도 아닌데 수박이 보인다” 등의 게시글을 작성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대표 체제로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내서도 비명계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계파 갈등으로 번질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표적인 친명 인사인 양문석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이 당신들의 사유물인가?”라며 이들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양 의원은 “웬만하면 참으며, 윤석열의 대통령직 파면까지 입 다물고 인내하려 했다”면서도 “당신들이 천방지축 나대는 지금, 우리 당원과 지지자들의 박탈감을 생각하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당신들만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을 사석에서는 이리저리 흉보며 씹고, 공석에서는 찬양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며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역사 속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고 ‘민주당의 대통령’이지 당신들이 사적으로 소유해 당신들의 출세를 위해 언제든지 호주머니서 꺼내 들고 장사할 수 있는 구슬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최민희 의원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최선을 다 했나?’ 묻고 또 묻는다. 임종석님은 스스로 성찰이란 것을 해봤나?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기록된다. 임 실장의 ‘통일 반대’ 주장은 어떤 성찰의 결과였나”라고 반문했다.

이 대표 체제로 대선을 준비하는 만큼 민주당이 날을 세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조기 대선이 치러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비상계엄’ ‘내란’의 잔재를 겪고 있다. 따라서 지금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싸울 대상은 이 대표가 아니라 윤석열정부와 이들을 옹호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사공 많으니
배가 산으로?

유시민 작가는 유튜브 방송 ‘매불쇼’에 출연해 비명계 인사를 겨냥하며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유 작가는 “비명계가 ‘윤리적으로 틀렸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이 특수하다는 것”이라며 “12·3 내란 세력의 준동을 철저히, 끝까지 제압해야 하는 비상시국이다. 게임의 구조가 지난 총선 때보다도 극화된 상황서 훈장질하듯 ‘이재명 네가 못나서 대선서 진 거야’ 등 소리를 하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명계와 이 대표가 힘을 합쳐야 내란을 종식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만약 이 대표가 조기 대선에 못 나가게 된다면 이 대표를 지지했던 유권자가 누굴 지지하겠느냐”며 “‘이재명이 사법 리스크가 있어서 안 돼’라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제일 열심히 싸웠던 사람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당에 있어 최악의 시나리오는 비상계엄과 12·3 내란 사태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에 실패하는 것이다. 지난 20대 대선서 민주당이 패배한 후 남은 건 경선 과정서 서로 주고받은 상처뿐이었다. 계파 갈등이 폭발하고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 공세가 펼쳐지면 이번 조기 대선 역시 지난 대선과 같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지난 2021년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와 이 대표의 경선은 그야말로 피바람이었다. 후보 토론회마다 이 전 대표는 이 대표의 도덕성 논란을 띄웠고 이 대표는 이에 맞서 “네거티브 공격을 자제해달라”며 언성을 높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선 과정이 대선 패배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0.7%p 차이로 정권을 뺏기자 서로를 향한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계파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뼈아픈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잡음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 대표 체제로 조기 대선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직 남은 20대 대선 패배 트라우마
K먹사니즘 VS 개헌 흑백선전 최소화

민주당은 민주주의와 성장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산업정책을 중심으로 성장 드라이브를 걸고 빅테크 육성과 더불어 ▲방산 ▲에너지 ▲식량산업 등 안보산업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이 대표를 제외한 이들은 개헌 논의를 띄우며 차별화에 나섰다. 김 전 지사는 “내란 세력에 대한 단죄가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으로 끝나선 안 된다”며 “탄핵의 종착지는 이 땅에 그런 내란과 계엄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개헌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민주당 전당대회서 이 대표 대항마로 나선 김두관 전 의원도 “지금이 개헌의 가장 적기”라며 “다시는 ‘제2의 윤석열’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개헌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제1당인 민주당이 개헌에 미온적이라는 태도를 지적하며 “이 대표가 결단할 경우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개헌 국민투표까지 부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지금까지 이 대표는 개헌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확실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이 점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있는 분들이 개헌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 표면적으로 계엄을 차단하기 위함이지만 저마다 명분을 쌓고 있는 것 같다”며 “‘이재명 체제로 대선을 이길 수 없는 이유’를 내세우는 것보다 낫지만, 정말 개헌 의지가 있다면 구체적인 단계를 제시해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당 안팎서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이 건강하다는 증거”라면서도 “진심 어린 조언이 담긴 비판과 남을 깎아내리기 위한 비난은 다르다.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해야 하는데, 만일 당내 경선이 치러진다면 네거티브 공세가 강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대표를 깎아내리면 오히려 상대방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다. 대선 끝나고 다시는 안 볼 사이처럼 굴면 안 된다. 보수 대권주자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칼을 휘둘러야지, 안 그러면 함께 탄 배에 구멍을 내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공통의 적
선택과 집중

‘이재명 흔들기’가 강해져도 민주당은 이 대표 외에 다른 노선은 염두에 두지 않는 모양새다. 민주당 집권플랜본부에 속한 한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 대표 외에 플랜B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이 대표 체제로)승리할 것이라고 모두가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비명이니 친명이니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건 윤정부의 내란 사태를 정리하는 것”이라며 “이번 조기 대선은 내란범과 내란 동조 세력을 심판하는 심판대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조국혁신당은 지금…

조국혁신당 황운하 원내대표가 조기 대선이 열릴 경우 당에서 대선후보를 낼 가능성을 언급했다.

황 원내대표는 YTN 라디오서 “실제로 후보를 낼 수 있을지 당원들과 의원들 의견을 수렴할 것”이라면서도 “제3당으로서 후보를 낸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진보 연합 세력 구축을 강조하며 “거기에 조국혁신당이 기여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권교체를 담당해야 할 쪽의 후보는 이 대표가 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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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