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실패한 영웅’ 장태완

재조명되는 장군의 외길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 테니!” 이 대사는 영화 <서울의 봄> 명대사로 장태완 장군이 실제로 12‧12 사태 당시 신군부에 실제로 한 말이다. <일요시사>는 쿠데타를 저지하려 노력한 장 장군의 행보를 재조명했다.

12‧12 사태가 발발한 지 44년이 지나 영화 <서울의 봄>으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전두광(실제 인물 전두환) 패거리와 이를 막고자 한 이태신 장군(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단 9시간의 대립으로 구성돼있다.  

누리꾼들은 쿠데타에 끝까지 맞선 이태신 장군을 응원했다. 이태신 장군의 실제 인물은 장태완 소장이다. 장 장군은 1931년생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해 11기로 임관했다.

전두환 견제
극적인 9시간 

소위 총알받이였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교였다. 이후 제5군단 참모장,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발탁된 데 이어 12‧12 사태 3주 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장 장군이 임명될 당시 국가는 10‧26 사태가 발생한 후 일부 계엄 체제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책임을 맡게 된다.


최규하가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됐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은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79년 11월 장 장군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서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헌병, 특공, 방공 병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주 만에 12‧12 사태가 발생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한 뒤 신군부에 대항했던 장 장군은 신군부에 체포돼 서빙고서 45일간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는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 생활을 마치게 됐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전두환이 움직였다. 신군부 소속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했다.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 대령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총장의 신병을 확보했다.

당시 장 장군은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 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 총장이 불법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경비사령부로 즉시 돌아갔다.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등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장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도 정 총장의 신병을 풀어달라고 신군부 측에 전화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회유하려는 신군부 측에 “너네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며 일갈하고 전화를 끊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장 장군은 신군부 반란군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 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며 33경비단의 전차중대를 보내 반란군 일당을 제거하려고도 했다. 또 대한민국 육군본부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직 신군부에 넘어가지 않은 9공수에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천만이 본 <서울의 봄> 이태신 실제 인물
“싹 깔아 죽인다” 하나회와 끝까지 대립

이 소식을 들은 신군부는 매우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공수의 병력이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반면, 신군부 세력의 1, 3공수의 병력의 교통요건이 더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9공수의 병력이 본거지에 들이닥치면 신군부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란군 측은 9공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서 아군인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며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을 약속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9공수를 원대 복귀시켜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같은 국군 병력들끼리 그것도 서울 도심지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벌이는 위험천만한 참극만은 피하자는 이유로 신사협정을 받아들인다.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9공수여단장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고 9공수여단은 이 명령에 따라 병력을 부천IC 부근서 회군시킨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신군부는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를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로 보내고 3공수가 특전사령부를 공격하도록 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에 점령당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 의해 체포됐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다 반란군 총격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도경비사령부만 남게 된다. 장 장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과 반란군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노재현 국방 장관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를 들은 장 장군은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켰다. 

“난 죽기로 
결심한 놈”


이후 반란군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돼 서빙고서 45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쳤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장 장군은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직접 만났다. 장 장군은 “전두환이 12‧12 사태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하자 전두환보다 윗기수인 육사 5기(정승화 총장)~8기와 종합행정학교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전역하게 됐으며 기수와 상관없이 전두환 측에 비우호적인 세력들도 좌천되거나 군문을 떠났다.

이로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됐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장 장군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들의 체포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 장군은 이에 대해 “완고한 선비 기질이었던 제 아버님께서는 12‧12 사태 소식을 접하신 후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드러누우셨다”며 “예로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 집안은 모반자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라시며 식음을 단절하시다 내가 석방되고 난 뒤인 80년 4월18일 73세로 별세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장군은 더 큰 슬픔을 겪었다. 장 장군의 아들이 실종됐다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장 장군 아들은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6개월 간 보안대원 2명이 방을 차지하는 소란 속에서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에 진학했다. 1982년에는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평소와 같이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실종됐다가 칠곡군 낙동강변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들의 실종 
시체로 발견

장 장군은 회고록에 “만 한 달 동안 엄동설한의 강추위 속에서 낙동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쐰 탓인지 전신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있었다. 나는 얼어있는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비벼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주며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 녹였다”고 적었다.

이어 “얼마 동안 빨다 보니 아들의 눈 안에서 사탕만한 모난 얼음 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아들놈이 마지막 흘린 눈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삼켜버렸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장 장군은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9일로 끝난 것”이라며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 사태를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는 전두환정부 시절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 사장에 임명됐다. 한국증권전산은 증권거래소 자회사로 각 증권회사의 전산 업무를 공동 처리하는 회사다.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이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신군부 정부에 여러 보직을 제안받고도 야인으로 지냈지만 장 장군은 공기업 사장직을 수용하자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장 장군도 신군부를 용서하진 않았다. 장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아들의 사망 이후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한 것이다.

장 장군은 이후에도 12‧12 사태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93년에는 여러 장성과 함께 전두환 등을 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반란세력 대적한 참군인들 재평가
12·12 사태 이후 가족들 비극까지

1996년 12‧12 사태과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전격 구속된 노태우·전두환 재판서 증인으로 참석해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됐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장 장군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때 장태완은 국회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현실 여건상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편이었다.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의 선제 작전으로 북한 해군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 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며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했고 2002년 12월17일 노무현 후보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분당 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동참했으나 정작 표결은 미국 방문으로 불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0년 7월26일 향년 78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을, 노태우에 대해서는 징역 17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 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하나회 최후
전원 유죄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서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피고인들의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12‧12 사태 반란군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유죄를 확정지었다. 

이어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 양쪽의 상고를 전부 기각해 황영시, 허화평에게 징역 8년,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 7년, 허삼수 6년, 최세창 5년, 차규헌, 신윤희, 박종규에게 3년6개월을 각각 확정지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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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