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실패한 영웅’ 장태완

재조명되는 장군의 외길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이 반란군 놈의 새끼야. 너희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싹 깔아 죽일 테니!” 이 대사는 영화 <서울의 봄> 명대사로 장태완 장군이 실제로 12‧12 사태 당시 신군부에 실제로 한 말이다. <일요시사>는 쿠데타를 저지하려 노력한 장 장군의 행보를 재조명했다.

12‧12 사태가 발발한 지 44년이 지나 영화 <서울의 봄>으로 인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전두광(실제 인물 전두환) 패거리와 이를 막고자 한 이태신 장군(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의 단 9시간의 대립으로 구성돼있다.  

누리꾼들은 쿠데타에 끝까지 맞선 이태신 장군을 응원했다. 이태신 장군의 실제 인물은 장태완 소장이다. 장 장군은 1931년생으로 경상북도 칠곡군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해 11기로 임관했다.

전두환 견제
극적인 9시간 

소위 총알받이였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장교였다. 이후 제5군단 참모장,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으로 발탁된 데 이어 12‧12 사태 3주 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다.

장 장군이 임명될 당시 국가는 10‧26 사태가 발생한 후 일부 계엄 체제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책임을 맡게 된다.

최규하가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됐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은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79년 11월 장 장군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수도경비사령관은 서울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며 헌병, 특공, 방공 병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주 만에 12‧12 사태가 발생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한 뒤 신군부에 대항했던 장 장군은 신군부에 체포돼 서빙고서 45일간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는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 생활을 마치게 됐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전두환이 움직였다. 신군부 소속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했다.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 대령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총장의 신병을 확보했다.

당시 장 장군은 전두환의 간계에 의해 동료 장군 한 명과 연희동에 있는 요정(고급 술집)으로 초대받아 가볍게 술 몇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 총장이 불법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경비사령부로 즉시 돌아갔다.

그가 부대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당한 대로 움직인 신군부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등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장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도 정 총장의 신병을 풀어달라고 신군부 측에 전화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회유하려는 신군부 측에 “너네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며 일갈하고 전화를 끊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장 장군은 신군부 반란군을 막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정 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하며 33경비단의 전차중대를 보내 반란군 일당을 제거하려고도 했다. 또 대한민국 육군본부서 피난 온 육군 수뇌부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작전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직 신군부에 넘어가지 않은 9공수에 보안사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천만이 본 <서울의 봄> 이태신 실제 인물
“싹 깔아 죽인다” 하나회와 끝까지 대립

이 소식을 들은 신군부는 매우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9공수의 병력이 경인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 이내로 서울에 진입할 수 있는 반면, 신군부 세력의 1, 3공수의 병력의 교통요건이 더 좋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9공수의 병력이 본거지에 들이닥치면 신군부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란군 측은 9공수 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육군본부 측에 전화를 걸어 “서울 한복판서 아군인 국군끼리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며 “우리도 더 이상의 무력 동원은 안 할 것을 약속할 테니 진압군 측에서도 9공수를 원대 복귀시켜라”는 내용의 상호 신사협정을 제안했다.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남침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김일성을 눈앞에 두고 같은 국군 병력들끼리 그것도 서울 도심지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벌이는 위험천만한 참극만은 피하자는 이유로 신사협정을 받아들인다.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9공수여단장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했고 9공수여단은 이 명령에 따라 병력을 부천IC 부근서 회군시킨다.

자신들을 칠 수 있던 유일한 군부대였던 9공수가 본대로 되돌아가자 하나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신군부는 협정을 지키지 않고 바로 1공수를 대한민국 국방부와 육군본부로 보내고 3공수가 특전사령부를 공격하도록 했다.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1공수에 점령당했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3공수에 의해 체포됐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려다 반란군 총격에 숨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그나마 남은 우군이었던 육본과 국방부도 점령당하고 특전사령부까지 반란군 손아귀에 떨어지면서 진압군 거점은 수도경비사령부만 남게 된다. 장 장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행정병, 취사병, 자기 휘하에 있는 극소수 전투병 등을 합한 100여명과 남은 전차 중대 4대를 소집하고 보안사를 직접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마저 배신하면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장교들의 설득과 반란군의 도청, 반란군에게 항복한 노재현 국방 장관의 사실상 백기투항하라는 지시를 들은 장 장군은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켰다. 

“난 죽기로 
결심한 놈”

이후 반란군이자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돼 서빙고서 45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장 장군은 해가 바뀐 1980년 2월 초에 수사관으로부터 예편서를 쓰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군생활을 마쳤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장 장군은 예편서를 쓰기 직전 전두환을 직접 만났다. 장 장군은 “전두환이 12‧12 사태 관련 경위를 묻자 자기들은 책임이 없고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2‧12 사태가 성공하자 전두환보다 윗기수인 육사 5기(정승화 총장)~8기와 종합행정학교 출신들이 대대적으로 전역하게 됐으며 기수와 상관없이 전두환 측에 비우호적인 세력들도 좌천되거나 군문을 떠났다.

이로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원들은 군부 요직을 장악하면서 사실상 실권자가 됐고, 이후 이들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야당의 반대를 무시하고 5‧17 내란을 일으키고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등의 피를 뿌리면서 결국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장 장군의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들의 체포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다 과음으로 별세했다. 

장 장군은 이에 대해 “완고한 선비 기질이었던 제 아버님께서는 12‧12 사태 소식을 접하신 후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드러누우셨다”며 “예로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 집안은 모반자 밑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라시며 식음을 단절하시다 내가 석방되고 난 뒤인 80년 4월18일 73세로 별세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장군은 더 큰 슬픔을 겪었다. 장 장군의 아들이 실종됐다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장 장군 아들은 대학 입시 준비를 하던 6개월 간 보안대원 2명이 방을 차지하는 소란 속에서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에 진학했다. 1982년에는 수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평소와 같이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실종됐다가 칠곡군 낙동강변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들의 실종 
시체로 발견

장 장군은 회고록에 “만 한 달 동안 엄동설한의 강추위 속에서 낙동강의 매서운 강바람을 쐰 탓인지 전신은 돌덩이처럼 꽁꽁 얼어있었다. 나는 얼어있는 아들의 얼굴에다 내 얼굴을 비벼대면서 흐르는 눈물로 씻겨주며 입으로는 아들의 눈부터 빨아 녹였다”고 적었다.

이어 “얼마 동안 빨다 보니 아들의 눈 안에서 사탕만한 모난 얼음 조각들이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아들놈이 마지막 흘린 눈물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삼켜버렸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장 장군은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9일로 끝난 것”이라며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 사태를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는 전두환정부 시절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 사장에 임명됐다. 한국증권전산은 증권거래소 자회사로 각 증권회사의 전산 업무를 공동 처리하는 회사다.

같이 반란군에 저항한 김진기 헌병감이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신군부 정부에 여러 보직을 제안받고도 야인으로 지냈지만 장 장군은 공기업 사장직을 수용하자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장 장군도 신군부를 용서하진 않았다. 장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이한동 민정당 총재 비서실장이 연락해 아들의 사망 이후 집안에만 있으면 더 속이 상한다며 직장서 근무를 통해 슬픔을 잊고 집안도 수습하라고 조언을 했고, 장태완도 거부감이 심했지만 가족 회의 끝에 남은 딸이라도 살려야겠다고 생각해 수락한 것이다.

장 장군은 이후에도 12‧12 사태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1993년에는 여러 장성과 함께 전두환 등을 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반란세력 대적한 참군인들 재평가
12·12 사태 이후 가족들 비극까지

1996년 12‧12 사태과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으로 전격 구속된 노태우·전두환 재판서 증인으로 참석해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됐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장 장군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때 장태완은 국회서 386세대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을 만나 “12·12 쿠데타를 내가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러분이 그간 고생 많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당 활동 당시엔 장성 경력을 내세워 국방 분야서 주로 일했는데, 성향은 민주당 내에선 안보 보수파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서도 현실 여건상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편이었다.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의 선제 작전으로 북한 해군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북한 측 경비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며 “어망 때문에 초계함 접근이 어려웠다고 하지만 평상시에 기동 훈련이 부족했던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곤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를 맡았다가 후보 단일화 협의회에 참여해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후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결정되자 승복했고 2002년 12월17일 노무현 후보 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의 분당 사태가 일어나자 새천년민주당의 당론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발의에 동참했으나 정작 표결은 미국 방문으로 불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불출마,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0년 7월26일 향년 78세에 숙환으로 별세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기징역과 2205억원의 추징금을, 노태우에 대해서는 징역 17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 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하나회 최후
전원 유죄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서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며 “피고인들의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12‧12 사태 반란군에 참여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유죄를 확정지었다. 

이어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 양쪽의 상고를 전부 기각해 황영시, 허화평에게 징역 8년,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 7년, 허삼수 6년, 최세창 5년, 차규헌, 신윤희, 박종규에게 3년6개월을 각각 확정지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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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학의 교수 수준은 강의의 질과 비례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인재 양성, 특히 초등학생을 가르칠 선생님을 배출하는 ‘교대’라면 그 본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진주교육대학교(이하 진주교대)에서 2020년 시작된 교수 채용 논란이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32년 공립사범학교로 시작해 100여년 동안 초등교육 발전에 힘을 보태 온 학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진주교대가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멀찍이서 논란을 지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첫 단추 잘못 끼웠나 2020년 10월 진주교대는 미술교육과, 수학교육과 등에 각 1명씩 총 4명의 교수를 채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2021년 1학기 임용을 목표로 같은 해 11월부터 채용 절차가 시작됐다. 교육공무원법에 명시된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일반 요건과 함께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자격 요건이 붙었다. 전형은 ▲자격 심사 ▲전공 적부 및 전공 심사 ▲경력 심사 ▲면접 심사(심화 과정) ▲면접 심사(최종) 등으로 이뤄졌다. 논란은 미술교육과 교수 채용 과정에서 불거졌다. 진주교대는 채용 계획에서 미술교육과 전공 분야를 ‘도자공예 또는 미술교육(도자공예)’으로 정했다. 도자공예 교수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 후임자를 뽑기 위한 채용이었다. 문제는 미술교육과에 최종 합격한 A 교수가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A 교수는 진주교대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학사)했고, 석사 학위는 초등미술 교육(진주교대), 박사학위는 디자인학(광주대) 전공으로 받았다. 미술교육과 채용에 지원하려면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즉, 도자 관련 전공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자격 요건에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A 교수의 전공 적부 논란은 면접 심사 과정에서 언급됐다. 면접에 들어간 한 심사위원이 A 교수의 전공이 채용 분야와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면접 심사(5배수) 대상자 명단’ 자료에 따르면 A 교수를 제외한 4명의 지원자는 학사, 석사, 박사 과정 등에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면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미술교육과 B 교수는 “전공 적부와 관련해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심사가 이뤄지긴 했다”며 “그런데 첫 번째 전공 적부 전형에 참여했던 위원들이 재심사를 담당했다. 결과가 바뀔 리가 있겠나”라고 한탄했다. A 교수는 2021년 2월 최종 임용됐다. A 교수를 둘러싼 논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쓴 <프리미티비즘의 조형 표현 요소 및 특성을 통한 현대 도자 작품 연구>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광주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은 A 교수의 학위 논문이다. 2020년 6월경 논문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주교대 교수 채용공고가 뜨기 3~4개월 전이다. 채용 과정에서 전공 적부 논란 임용 이후 추가 문제 제기됐다 2021년 3월, B 교수는 A 교수의 연구 부정행위(표절)를 광주대에 제보했다. A 교수가 해당 논문으로 광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검증도 광주대에서 진행해야 했다. 교육부 훈령 제449호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18조(연구부정행위 검증 절차)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를 검증하려면 예비조사와 본조사, 판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절차를 총괄하는 게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대한 심의, 의결 권한을 갖는다. 또 예비조사와 본조사에서 나온 결과를 승인한다. 제보를 받은 광주대는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를 소집했다. 황당한 지점은 광주대에서 A 교수의 논문을 두고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B 교수가 마지막에 나온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결과를 두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24년 8월로, 처음 제보했던 2021년 3월 이후 무려 3년5개월이나 걸렸다. 그나마도 표절 여부는 여전히 판명 나지 않았다. 교육부의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25조(판정)에 따르면 예비조사 착수 이후 판정까지의 모든 조사는 6개월 이내에 종료해야 한다고 돼있다. 물론 이 기간 안에 조사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연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광주대의 경우는 ‘절차상 하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제보자나 피조사자 양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재조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2021년 8월 광주대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에 대해 만장일치로 표절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 교수에게 의견 진술권을 부여하지 않은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A 교수가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모든 조사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2022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재구성됐는데 5월 예비조사와 8월 본조사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 논문의 총 1234개 문장 중 425개(34.4%)가 표절로 의심되며 ▲특정인의 논문을 몇 페이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용했고 ▲독창적인 부분을 적시해 달라는 요청에 피조사자가 답변을 회피하며 적극적 방어를 하지 않아 비교 대조표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근거로 표절로 판정했다. 거듭된 하자 조사만 4번 반면 본조사위원회는 “이 사건 논문은 ‘작품 논문’이라는 특성상 다른 분야와 같은 기준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며 “작품 논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논문의 핵심 부분인 작품 그 자체에는 독창성이 인정되므로 논문 자체를 표절이라고 판정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조사에서도 또다시 ‘하자’가 발견되면서 판정이 무효로 돌아갔다. B 교수는 피조사자인 A 교수가 심사위원 제척 여부를 이유로 외부위원 명단을 요청했고 실제 공개된 점, 제보자에게 의견 진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점 등의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본조사위원회 보고서에 각 당사자의 진술 요지와 조사 결과 등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데도 이 부분을 빠뜨리면서 실체상 하자도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법원에 본조사위원회 판정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건은 피고(광주대 측)가 “원고 측 이의를 받아들이고 기존 본조사 판정을 무효화하고 다시 본조사위원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B 교수가 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2023년 세 번째로 소집된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다. 의견서에는 ▲전체 1200여개 문장 중 출처 표시 없이 인용된 문장이 360여개로 과도하게 많은 점 ▲저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4장과 결론에서도 타인의 학술 논문과 내용이 유사하거나 출처 표시가 없는 문장이 다수인 점 등이 근거로 기재됐다. 하지만 이 결과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구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전면 무효화됐다. ‘광주대학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설치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학장, 교무처장 및 산학협력단장은 당연직으로 하고 교무처장이 위원장이 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일부 준수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해를 넘겨 2024년 6월 예비조사위원회는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놨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A교수가 KCI 논문 유사도 검사에서 1%의 유사도를 보인 결과서를 제출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저작위원회 “유사성 인정” 또 A 교수가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부분이 타인의 아이디어나 창작물을 침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른 저자의 논문 역시 다른 논문이나 저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서 승인했다는 점이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결론을 확정했다. 3년5개월여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판정 승인이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최종 결론이 난 셈이다. 첫 채용 공고 시기로 따지면 4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은 B 교수의 반발로 법정에 가게 됐다. B 교수는 2024년 7월 광주대가 자신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자 같은 해 8월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학교법인 호심학원을 상대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판정 무효확인 등’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승인한 부분과 본조사위원회가 불필요하다고 한 부분을 무효로 판단해 달라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도 절차상 하자가 언급됐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충분한 혐의를 인지했을 경우에 예비조사를 생략할 수 있고, 피조사자가 연구 부정행위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경우 본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판정을 내릴 수 있다”며 “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 결과를 확정해 판정할 근거가 없다. 본조사 결과만 승인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A 교수 논문에 대한 표절 여부도 제대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표절 판정이 엇갈린 만큼 저작권법,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및 한국연구재단이 제시하는 인용 방법 및 논문 표절 기준 등에 따라 A 교수의 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B 교수는 A 교수의 논문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감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저작권법 제112조에 따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법원이 B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저작권위원회는 A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12편의 논문을 비교, 감정했다. 반복된 조사 엇갈린 판정 결국 법정 공방으로 번져 <일요시사>가 입수한 감정 결과서에 따르면 A 교수의 논문은 총 12편의 비교 대상 논문 중 총 11편에 대해 저작권법상 보호를 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을 상당 부분 복제하고 있다며 저작권법상 실질적인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또 ‘단순히 학술적 아이디어나 이론적 사실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선행 저작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관점과 예술적 주관에 따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문장 구조, 단어 선택, 서술 방식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외국 문헌을 연구자 본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요약하거나 번역한 문장의 경우에도 원저작자의 창작적 개성이 반영돼 저작권법의 보호 범위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A 교수의 논문은 이를 무단으로 복제해 논문에 활용했다’ 등의 감정 결과를 내놨다. B 교수는 “저작권법 위반 여부는 표절보다 그 인정 범위가 좁다. 논문의 독창성을 저작권으로 인정해 그 부분을 침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결론은 A 교수가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의 독창성을 인용 없이 가져다 썼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호심학원 관계자는 “소송 중인 사안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 문제는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손 놓고 있는 진주교대의 태도다. A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여부는 진주교대의 교수 채용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채용 공고에서 지원 자격으로 박사학위 소지자가 명시됐던 만큼 논문 표절 여부는 이번 논란의 중요한 요소다. 표절로 판명되면 학위 자체가 취소되는 사례도 있어 A 교수가 진주교대 교수 채용에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주교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광주대와 B 교수 간의 소송 결과가 나오고 그에 따라 광주대가 조치한 뒤에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진주교대 교무처 관계자는 “(학교가) 손 놓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법률 검토 등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B 교수는 “학교는 학생들의 수업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저 누가 학교에 책임을 물을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학교 측에서 했다는 법률 검토도 현재 손 놓고 있는 학교의 행보가 나중에 직무유기로 문제가 될까 알아본 것이라고 한다. 교대는 학생들이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신청해야 하는 구조라 교수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생들만 뒷전 됐다 그러면서 “광주대와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A 교수가 수업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공무원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직위해제’ 조치를 하지 않나.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내는 대학이다. 학교가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한편, A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