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립된 지 2년이 넘었다. 출범 이후 기대와는 다르게 무기력한 모습만 보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검찰로부터 사건을 가져와 재판에 넘겨도 재판부로부터 뭇매를 맞을 정도로 수사 전문성에도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최근 ‘대우산업개발 뇌물’ 사건 인지수사를 진행 중이지만 이미 검사와 수사관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검사가 직접 프린트를 해야 할 정도로 인력난이 극심하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고 매력적인 기관이 아니라는 게 외부의 시선이다. 답답하다.” 지난 5일 <일요시사>와 접촉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신 관계자가 한숨을 쉬며 한 말이다. 사실상 윤석열정부로부터 외면받은 이후 정치권의 관심도 꺼졌다. 첫 자체 수사에 착수했으나 고질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수처 안팎서 나온다.
첩보 입수 후
강제수사 전환
공수처가 ‘대우산업개발 뇌물’ 사건을 인지한 것은 올해 초다. 경찰 간부가 약 2억원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상한 자금흐름까지 포착했다.
지난달 13일 공수처 수사3부(부장검사 송창진)는 김모 서울경찰청 경무관에게 뇌물을 공여한 의혹을 받는 이상영 대우산업개발 회장이 지인 A씨에게 2억원가량을 송금해 현금화한 정황을 확인했다. 이 회장이 ‘삼촌’으로 부르는 A씨는 2억원을 전액 5만원권으로 인출해 이 회장에게 다시 건넸다.
공수처는 이 돈이 김 경무관이 받기로 했던 3억원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회장은 가족의 부동산 매매 대금일 뿐 자금세탁과 무관하고 현재도 금고에 보관 중이라며 의혹을 부인 중이다.
공수처는 분식회계 의혹으로 수사를 받던 이 회장이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계장과 친분이 있는 김 경무관을 통해 수사무마를 청탁했다는 혐의도 수사하고 있다.
김 경무관은 지난해 하반기 서울경찰청에 보임하기 전 강원경찰청에 재직하며 금품을 수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청탁 대가로 3억여원을 약속하고 실제 1억여원을 김 경무관에게 건넨 혐의를 받는다. 추후 자금 거래 추적 결과에 따라 수뢰액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공수처는 통화 분석을 통해 이 회장이 분식회계에 대한 경찰 수사정보를 인지한 정황을 확보하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공수처는 수사 과정서 이 회장의 변호인 B 변호사가 수사를 방해한 정황을 포착하고 대한변호사협회(변협)에 징계 개시를 신청했다.
자신이 사건관계인의 변호인으로 선임됐다면서 조사 전날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한 것이 그 이유다. 공수처는 B 변호사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이 회장과 사건관계인을 동시에 변론하는 행위 등이 위법하다고 봤다.
이외에도 공수처는 대우산업개발을 법률 자문하는 법무법인의 변호사들이 변호인 선임서를 제출하지 않은 채 대우산업개발 압수수색 절차에 참여했다면서 이들에 대한 징계 개시도 변협에 신청했다. 또 지난달 21일과 22일, 이달 3일 서울경찰청, 대우산업개발 사무실, 관련자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다.
첫 인지수사…성과 내기 안간힘
“인력난 해소 안 돼” 수사 골머리
공수처가 최근 확보한 대우산업개발 이 회장과 한재준 대표의 통화 녹취록엔 수사정보가 유출된 듯한 대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수처는 이 회장이 지난해 8월 한 대표와의 통화에서 “방금 경찰 전화를 받았다”며 경찰 측으로부터 수사정보를 들은 듯한 발언이 담긴 녹취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사자들은 수사에 반발 중이다. 김 경무관은 이 회장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하면서 억울함을 토로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 측은 “김 경무관에게 전달했다는 1억여원은 김 경무관이 아니라 이번 사건과 무관한 후배 사업가와 채무관계를 정리한 것이고, 입증이 가능하다”고 해명했다. 경찰청은 지난 2월, 김 경무관을 대기발령 조치했다.
이번 사건은 공수처의 첫 인지 범죄 사건이다. 지난 2월 검찰 출신 ‘특별수사통’ 송창진(사법연수원 33기) 부장검사를 새로 임명한 뒤 수사3부는 공수처의 주력 수사부서로 거듭났다.
이번 수사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으면 사실상 ‘존재 이유’는 증명한 셈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공수처 내부에선 ‘인력난’이라는 고질적 문제부터 해결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와 만난 공수처 전·현직 관계자들은 산적한 업무량 때문에 휴직계를 마음대로 내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대변인실 직원이 행정업무 부서에 발령될 만큼 기본적 사무 업무를 처리할 인력이 타 기관보다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전직 공수처 관계자는 “휴직했던 직원이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다가 바로 복귀했다. 사람 1명이 없으면 여러 명이 배로 일을 해야 한다. 대변인실 관계자가 행정업무 부서로 가는 등 어쩔 수 없는 인력난으로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인력 문제는 김진욱 공수처장도 직시하고 있다. 지난해 출범 기념 기자간담회서 김 처장은 “인력난이 제일 큰 문제”라고 밝혔다. 공수처 정원은 85명이다. 검사 25명, 수사관 40명, 행정직원 20명으로 구성된다. 2023년 3월 기준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은 각각 23명, 38명으로 정원 미달이다.
특수통 영입
주력 부서로
행정직원도 미달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체 정원이 채워진 바 없다.
한 공수처 검사 출신 관계자는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사정기관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거나 수사 의뢰가 온 사건만 수사한다. 인지수사 자체가 어려운 환경이고 수사 과정상 여건이 되지 않으면 검찰에 다시 넘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국회서 법 자체가 개정돼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정치권마저 공수처에 큰 관심이 없다”고 비판했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수사 전문성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비서·감사·예산·인사·급여·계약·지출·결산·기록관리 등 공수처 운영의 기반이 되는 행정직원들의 환경이 바뀌는 게 급선무다. 현재 공수처는 분야당 1명의 직원으로 구성돼있다.
조직 운영 업무도 밀리고 있는 형국이라 중앙·지자체·공공기관서 정원 외 파견 직원을 받고 있다. 검찰과 경찰로부터 지원받는 수사 담당 인력과는 별개다. 파견된 행정직원들은 통상 6개월~1년 단위로 근무한다. 원소속 기관과 지자체 사정에 따라 파견 기간이 다르지만 업무에 익숙해질 때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인수인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고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와중에 정치권과 법조계로부터 ‘종이호랑이’라는 비판과 함께 “존재 이유가 무의미하다”는 지적은 검사와 수사관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공수처는 ‘메리트’ 없는 기관으로 낙인찍혔고 ‘가고 싶지 않은 기관’으로 불리게 됐다.
문서 출력할
인원도 없다?
한국정책능력진흥원은 지난해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정책연구용역을 수행한 뒤 <공수처 조직역량 강화 방안 마련 정책연구 보고서>를 발간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공수처는 중앙행정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하다.
공수처 정원은 85명서 170명으로 2배가량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검사(공수처장·차장 포함)는 부장검사 5명·부부장검사 7명·검사 26명 등 총 40명이 필요하고, 수사관은 검사 인력의 두 배인 80명, 행정직원은 50명이 적정 인력이라고 분석했다.
공수처 인력이 늘어나려면 국회서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수사관을 40명서 80명, 행정직원을 20명서 50명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았다. 같은 당 기동민 의원안은 검사를 25명서 40명으로 늘리는 방안이다.
그러나 공수처 설립을 주도한 민주당 의원들은 해당 법안에 관심이 없다. 민주당 일각에선 공수처가 자초한 일이라는 견해가 나온다. 과거 감사원이 수사 의뢰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사건과 대통령 직속 검찰 과거사위원회 대검찰청 과거사진상조사단 소속이던 이규원 검사에 대한 수사가 이뤄진 것이 ‘태클’이었다는 주장이다.
‘고발 사주’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공수처가 맡았던 사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7개월가량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했으나 실패했다는 평가가 전반적이다. 구속영장·체포영장 등이 모두 기각됐다. 문제의 ‘고발장 작성자’도 특정하지 못했다. 그 밖에 공수처 1호 기소 사건인 김형준 전 검사 뇌물수수 혐의 사건 역시 1심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수사 전문성 논란도 지속됐다.
‘공수처 폐지’를 거듭 강조하던 대통령실과 국민의힘도 조용하긴 매한가지다. 지난해 4월 작성된 윤정부의 ‘국정과제 이행계획서’에 공수처법 개정이 언급된 것과는 딴판이다. 해당 문서는 총 1170페이지가량의 대외비 문서다.
수사관이 행정업무까지 커버 “국회서 법개정 시급”
설립 주도한 민주당조차 무관심…스스로 자초했다?
이행계획서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언급했던 검찰·경찰·공수처 관련 발언과 공약들이 실천 과제와 함께 담겼다. 대표적 실천 과제로는 ‘공수처법의 독소조항을 폐지, 검찰과 경찰도 고위공직자 부패를 수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수처를 정상화하겠다’는 내용이 제시됐다.
이행계획서는 “공수처법 제24조 폐지 등 관련 법령 제·개정을 통해 검찰·경찰·공수처가 함께 부패수사를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사기관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 공정한 경쟁과 협력을 통해 부패와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더불어 검찰, 경찰, 공수처 3자 협의를 통해 수사중복 등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수사 지연 등을 방지토록 하고 있다.
공수처의 수사 대상도 애매한 부분으로 꼽힌다. 대상의 한계 때문에 수사에 제동이 걸린다는 지적이다. 공수처 수사 대상은 판사, 검사, 경무관급 이상 경찰공무원, 정무직 공무원 및 고위공무원단 이상(대체로 2급 이상)과 가족이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정보원, 감사원, 금융위원회 등의 경우 3급 이상 공무원까지 수사 대상에 속한다.
공수처가 수사할 수 있는 범죄는 ▲직무유기 ▲직권남용 ▲뇌물범죄 ▲허위 공문서 작성, 강요, 공갈, 횡령·배임, 알선수재 등 ▲변호사법 위반, 정치자금 부정수수, 정치 관여, 공무원 등의 선거 관여, 국회 위증 등이다.
통상 고위공직자 비리는 기업인과 얽힌 구조가 많다. 예시로 대장동과 같은 부동산·금융 범죄가 그렇다. 검찰과 경찰은 경제범죄를 수사할 때 공여자인 민간인 조사를 시작으로 자금 흐름을 먼저 파악한다. 정황이 포착되면 사건에 연루된 공무원을 소환 조사한 이후 고위공직자의 혐의 입증에 매달린다.
현행 공수처법상 이 같은 수사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고위공직자 본인이 부하 직원, 실무자를 거치지 않고 민간으로부터 직접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돼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건에 연루된 공무원이 3급 이상이 아니면 수사에 제동이 걸리거나 분리 후 타 수사기관에 이첩해야 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차이도 크다. 공수처는 대법원장 및 대법관, 검찰총장, 판사 및 검사, 경무관 이상 경찰공무원만 재판에 넘길 수 있다. 수사 대상이어도 기소 대상이 아니라면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이첩해야 한다. 공수처가 고발 사주 사건서 손준성 검사의 공범으로 판단했던 국민의힘 김웅 의원이 대표적이다.
애매한
수사 대상
김 의원은 사건 당시 변호사였다. 고위공직자가 아니라서 손준성 검사와 따로 떼어내 수사를 마치고 검찰에 이첩했지만 불기소 처분됐다.
수사 대상과 수사권, 기소권 역시 공수처 설치법을 둘러싼 국회 여야 합의 과정서 원안이 바뀐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법 설계 문제는 공수처 안팎서도 신중히 검토한 뒤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수처 권한 확대와 직결되는 만큼 학계와 전문가, 관계 기관, 국회 등과 협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