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05.21 17:09
1960년에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의 해였다. 4·19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자유당 정권을 종식한 의거였다. 집권 자유당은 후보로서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이승만 현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차기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3·15 부정선거 자유당은 1959년 초부터 전면적인 선거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시·읍·면장 임명제를 도입해 득표에 유리한 인사를 임명할 길을 만들고, 자유당 중앙조직위원회에 특수조직책을 두고 이들을 정부 각 부처의 국·과별로 특수임무를 수행토록 보임할 수 있도록 했다. 3월에는 개각으로 경찰과 지방공무원의 총수 격인 내무부 장관에 이기붕 의장과 사적으로 친밀한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곧 7개 도의 도지사를 경질했다. 6월에는 일찌감치 전당대회를 거쳐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공식화했다(민주당에선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후보 선정 문제가 혼미에 빠져있었다. 11월26일에야 전당대회서 조병옥(구파), 장면(신파)을 후보로 선정했다). 11월, 자유당은 본격적인 선거 대책을 세우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자유당 중앙당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정치는 4·19 혁명을 지지하는 진보 세력과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는 보수 세력이 각각 4월 정신과 5월 정신으로 대립각을 세워왔다. 그러나 30년 동안 정치적 역동기를 거쳐 지금은 진보 세력이 지지하는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이 4월 정신과 5월 정신을 대표하고 있다. 4·19 혁명의 경우 군사정권이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 5·16은 ‘혁명’으로 명명하고, 4·19는 ‘의거’로 명명해 4·19를 폄하했지만, 문민정부 들어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킨 4·19의 의미와 가치를 부활시켜 ‘혁명’으로 바꾸면서 4월 정신으로 복귀됐다. 5월 정신을 상징하는 5·18 민주화운동도 초기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간주돼 5·18 광주소요사태로 불렸으나, 시대가 변하고 진실이 밝혀지면서 쿠데타 세력에 대한 최고의 저항권 행사로 인정돼 현재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한편 5·16 군사정변은 무능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5·16 혁명으로 불렸지만, 결국은 군사 쿠데타로 밝혀져 5·16 군사혁명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은 5·16 군사정변으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