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① 지옥에서의 30일

“살았지만 모든 게 망가졌다”

 

“출소하면 어떡하죠?”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에게 가해자와 만난 30일은 낙인처럼 기억에 박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가해자는 상습특수상해 및 강간 혐의 등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는 구속됐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빚과 트라우마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구제할 법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요시사>는 6편의 기사를 통해 생존자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전하려고 한다. 그 목소리에 정답이 있다고 판단했다. <편집자 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11년부터 2018년까지 284명이 데이트폭력에 희생됐다.(경찰청) 매년 36명, 열흘에 1명꼴로 연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여성이 살해당했다. 전문가들은 데이트폭력의 끝이 살인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데이트폭력 후유증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피해자와 사망자 사이, 그들을 데이트폭력 생존자라 부르기로 했다.
 

▲ 강정준의 상습폭행으로 만신창이가 된 김가은의 몸과 마음

28년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30일이면 족했다. 2018년 11월7일 부천의 한 경찰서 형사는 데이트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한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앞서 남자친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경찰서를 찾았던 여성이었다. 2주 만에 다시 본 여성의 모습은 처참했다. 얼굴과 몸에 각기 다른 색의 멍이 가득했다. 상습폭행의 흔적이었다. 

여성들이
죽고 있다

김가은(가명)은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생존자다. 2018년 10월 초부터 11월7일까지 한 달간 자신의 집에 감금된 채 가해자 강정준(가명)이 가하는 신체적·심리적 학대에 시달렸다.

강정준은 유사강간·상습특수상해·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보복폭행 등)·특수협박·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 이용 촬영)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징역 4년을 받았다. 구속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 30세에는 사회로 돌아온다. 


판결문에 따르면 강정준은 ‘말대답을 했다는 이유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알루미늄 재질로 된 대걸레 자루로 몸 전체를 때렸다’ ‘머리채를 잡고 안방 침대 옆으로 끌고 가 주먹으로 몸 전체를 때렸다’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이 오는 동안 너는 죽도록 맞을 것이고, 네 머리에 칼을 꽂을 것이라고 말하며 유리 맥주잔으로 정수리 왼쪽 부위를 내리쳤다’ 등 총 14회에 걸쳐 김가은에게 폭행을 가했다. 

또 “야, 너 죽여버리고 싶다, 내가 너 못 죽일 것 같냐”며 목에 식칼을 들이댔다. 강제로 옷을 벗게 한 후 유사성교 행위를 강요했고, 그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폭행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몸에 멍은 지워질 날이 없었고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럼에도 김가은은 살아남았다. 살고자 했다. 사건 발생 2년 뒤, 김가은은 <일요시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제가 데이트폭력을 당했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일요시사>는 김가은을 만나 2018년 9월 강정준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총 7번, 20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김가은의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 내 집에 갇혔다.

강정준과의 만남은 모든 게 평소와 달랐다. 만남의 시작도, 데이트도. 유튜브를 보는데 데이트어플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었을 뿐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날 강정준을 알게 됐다.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영상통화도 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다.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정준을 처음 만날 때도 무섭다는 느낌은 없었다. 전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무거웠기 때문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다. 몇 번 만나다가 강정준의 사귀자는 말에 그러자고 했다. 각자 회사가 멀다보니 데이트는 자연스럽게 밤에 하게 됐다. 

최소 14회 이상 상습폭행
성폭행하면서 영상도 찍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강정준은 ‘회사 일이 잘 안 풀려서 너무 힘들다. 네가 나를 좀 받아줘야 하는 거 아냐?’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 다음부터 강정준이 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가는 일이 많아졌다. 가끔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내 말에 화를 벌컥 낼 때도 있었지만 일이 힘들어서 그렇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숟가락으로

그날은 강정준이 처음 집에서 자고 간 날이었다. 아침 10시가 되도록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아침을 차려놓고 일어나라고 말했더니 오만 짜증을 다 냈다. ‘우리 엄마도 나를 아침에 안 깨우는데, 네가 뭔데 나를 깨우느냐’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숟가락으로 내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처음 든 생각은 ‘얘 뭐지?’였다. 

대꾸할 새도 없이 강정준은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 TV를 보기 시작했다. 옆에 앉으라는 기색에 다가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쇼핑몰에서 온 메시지에 강정준은 다른 남자한테서 온 게 아니냐고 길길이 뛰었다.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휴대폰이 무릎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때부터 휴대폰은 무조건 소리로 해놔야 했다.
 

▲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형을 받았다.

다음날부터 강정준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 눌러앉았다.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에도 나를 혼자 보내지 않았다. 당시 다니고 있던 학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머릿속에서는 ‘이 남자 너무 이상하다’고 경고를 보내는데 강정준은 자꾸만 내가 비정상이라고 했다. 내 집에 갇혀 버렸다.

#. 미친 듯이 때렸다.

평생 그렇게 맞아본 기억이 없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강정준은 시도 때도 없이 때렸다. 때리기 시작하면 최소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처음에는 대걸레 밀대로 때리더니 그게 휘어지자 청소기 봉대를 뽑아 때렸다. 때리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한 번은 졸린다고 했더니 바로 손이 날아왔다. 강정준은 자기보다 먼저 자려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무조건 내가 늦게 잠들어야 했다. 무슨 말을 하면 1초 안에 답하라고 했다. 대답이 늦어지면 어김없이 뭐라도 날아왔다. 눈을 안 마주치면 주먹질을 해댔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배가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엄살을 피운다면서 더 때렸다. 

삼시세끼 밥을 차렸다. 청소, 빨래, 심지어 강정준이 데려온 강아지 2마리를 돌보는 일도 내 몫이었다. 강아지가 낑낑거려도 맞았고, 강아지가 똥오줌을 못 가려도 맞았다. 자는 동안 강아지가 소리라도 낼까 계속 긴장상태였다. 강정준은 강아지들이 소리를 낼 때마다 조용히 시키라고 발로 나를 밀어댔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구나 생각한 순간 도망치려 문 쪽으로 달렸다. 도어락 풀리는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띠링’ 소리와 함께 머리채가 잡혔다. 문을 열고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세상은 고요했다. 머리채가 잡힌 채 질질 끌려 들어가 다시 미친 듯이 맞았다. 

입가가 찢어져 피가 바닥에 흥건한 데도 ‘피 흘리면 내가 덜 때릴 줄 아느냐’면서 엄살을 피운다고 계속 때렸다. 벽에 손을 짚으라고 했다. 청소기 봉대로 엉덩이를 세게 후려쳤다. 허리에 맞았는지, 골반에 맞았는지 몸이 저절로 꺾여 주저앉았다. ‘빠따’를 5~6대 맞고 나니 죽어야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강정준은 분이 풀릴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헤어지자고 말한 날은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주먹으로 온몸을 때리더니 청테이프로 입을 막고 몸과 손목을 묶었다. 그리고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려 들었다. 강정준은 ‘억울해서 못 헤어지겠다. 너 어디 하나 ○○ 만들고 헤어져야지 안 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화장실에서 그 난리를 피웠다. 손가락을 자르자마자 접합도 못하게 변기에 넣고 내려버린다고.


웃으면서 장애인을 만든다고 하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입으로는 계속 빌었다. 안 그러겠다고,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한 번만 봐달라고. 

표정, 말투…
통제하려 해

#. 꼭두각시

바깥에 나갈 때마다 화장을 진하게 하라고 강요했다. 멍자국이 보이면 컨실러를 더 바르라고 내밀었다. 머리는 항상 풀고 다녀야 했다. 강정준은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내 머리를 정돈해주는 척 매만졌다. 사실은 머리로 멍자국을 가리려고 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아마 다정한 연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바깥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두고 타박이 이어졌다. 점원에게 왜 그렇게 말했냐고, 왜 눈을 보지 않느냐고, 왜 대답을 늦게 하느냐고.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일단 강정준이 매를 들면 입에서는 자동으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잘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그냥 되는 대로 빌었다. 
 

▲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강정준의 법원 판결문

뭘 하든 내 탓이라고 했다. 내가 맞는 것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고, 자기가 나를 때리는 것도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눈을 부라리며 ‘대답 안 해? 어?’ 하고 몰아붙일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바짝 얼어붙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보면서 강정준은 운다고 또 때렸다. 나중에야 그게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인 걸 알았다.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화장실 문을 닫지 말라는 말에 용변을 볼 때도 열고 있어야 했다. 인간 이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끝에 ‘했다’ ‘했나’를 붙여 말하면 사투리 흉내내는 거냐고 때렸다. 말투까지 뭐라 하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하면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게 진짜였다. 

모든 전화는 스피커폰으로 받도록 했다.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내가 뭐라고 하나 듣고 있었다. 가족의 안부 전화에도 늘 ‘괜찮다’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강정준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지시했다. ‘밥 차려와’ ‘강아지 똥·오줌 치워’ ‘이리 와서 여기 뽀뽀해줘’ ‘옷 벗어’ ‘다리 벌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늘 웃고 있는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평범하게 대답해도 말투가 그게 뭐냐고 닦달을 해대니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부드럽게, 얼굴은 미소 지으면서, 호칭은 자기나 여보, 말에 토 달지 말고 재빨리 대답할 것. 부탁을 할 때는 최대한 공손하게. 강정준은 나에게 모든 것을 시켰지만 나는 밥 먹으라는 말조차 빌듯이 해야 했다. 

#. 최악의 날

10월초 강정준의 감시가 느슨할 무렵 탈출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처음에는 신고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냥 다니던 학원에 가지 못하게 됐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 몸 상태를 본 학원 선생님들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 그 길로 경찰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날 밤엔 경찰이 마련해준 숙소에서 잤다.

강정준의 전화와 문자로 휴대폰이 터져나갈 듯했지만 무시했다. 잠을 자고 있는데 경찰서가 아니라 한 파출소에서 전화가 엄청나게 걸려왔다. 하도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내가 가출했다는 신고가 들어와 있다고 했다. 같이 사는 남자친구가 가출신고, 실종신고를 했다면서 난리를 피웠다고 했다. 내가 납치된 것 같다고. 

그때 왜 다시 돌아갔을까. 미안하다는 말에? 내가 납치된 줄 알았다며 걱정하는 말에? 다시는 안 그런다는 말에? 강정준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 형사님이 다가와 저런 놈은 꼭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면서 번호를 알려줬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신신당부하면서. 그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머리로는 번호를 외우면서도 발걸음은 집으로 향했다. 

몸과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
가해자 징역4년·30세면 사회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날아든 손에 바로 후회했다. 감시는 더 심해졌다.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 족족 체크했고, 어디 가기라도 할까 봐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댔다. 숨이 막힌다는 게 뭔지 알았다. 

강정준은 걸핏하면 경찰에 신고한 사실을 운운했다. 그날도 그랬다. ‘다시 경찰에 신고하면 내가 너 결혼도 못 하고 연애도 못 하고 평생 다른 남자 못 만나게 해줄게’라면서 옷을 벗으라고 강요했다. 못 벗겠다고 했더니 ‘맞고 벗을래, 그냥 벗을래’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주먹질을 해댔다. 

겉옷을 벗으니 속옷도 벗으라 난리였다. 속옷까지 벗고 나니 알몸. 강정준은 휴대폰 카메라로 내 몸 구석구석을 찍었다. 다리를 벌려라, 손을 들어라, 몸을 돌려라. 싫다고 하면 맨몸에 청소기 봉대가 날아들었다. 광대뼈가 부어오를 정도로 얼굴을 맞고 나니 이제 모든 걸 체념하게 됐다.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모습은 고스란히 휴대폰 영상에 남았다. 

강정준은 그 영상을 제 친구에게 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상을 억지로 보게 했다. 울면서 성폭행당하는 내 모습이 큰 모니터 화면으로 보였다. 강정준은 ‘야 이거 봐라? 이거 너다? 웃긴다’ 이러면서 실실 웃었다.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다. 끝도 없는 바닥까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 탈출
전날 새벽에 맞은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강아지들이 밤새 싸놓은 똥오줌을 치우고 아침을 차렸다. 일어나는 기색이 보여 상을 차려 들고 들어갔다. 아침에는 강정준의 기분이 좋지 않다. 조심해야 한다. 밥도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담배를 피러 베란다로 나간다. 그 사이 또 강아지들이 싸놓은 똥오줌을 치웠다. 

면접에 가기 전 머리를 한다고 했다. 같이 나가는 줄 알았는데 혼자 가려는 기색이다. 배웅을 위해 주차장으로 나갔다. 볼에 뽀뽀를 해달라고 조른다. 억지로 입을 맞춰주고 웃어주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다. 금방이라도 ‘같이 가자’며 차에 타라고 할까 봐 온몸이 떨려왔다. 강정준이 탄 차가 멀리 사라졌다. 

제 번호를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형사님이 떠오른다. 손이 떨려 번호가 잘 눌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계속 카톡이 날아왔다. ‘어디야?’ ‘뭐해?’ ‘뭐하느라 답이 없어?’ ‘너 죽을래?’ ‘어디야?’ 전화도 온다. 간신히 형사님과 전화가 연결됐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는 말에 경찰을 보낸다는 답이 돌아왔다. 1분이 1시간처럼 흘렀다. 

계속 걸려오던 전화를 받았더니 대뜸 쌍욕이 넘어온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느냐고 따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또 도망치려는 거 아니지?’ 그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지’ 최대한 목소리를 가볍게 내려고 노력하면서 달랬다. 경찰이 왔다. 내 집에서 탈출했다. 2018년 11월7일, 감금된 지 30일 만이었다.

도망쳤지만
망가진 삶

3번의 시도 끝에 탈출한 김가은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복통을 호소하다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을 땐, 이미 복강에는 염증이 가득했고 장기가 파열돼 출혈이 심했다. 결국 2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폭행 후유증으로 시력이 떨어졌고 골반염은 걸핏하면 재발했다. 불안증과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김가은을 덮쳤다.

피해의 낙인은 김가은의 몸과 마음에 남았지만 가해의 흔적은 옅어지고 있다. 자신의 집에 갇혀 30일간 지옥을 경험한 김가은에게 주어진 건 4년의 시한부 자유뿐. 강정준은 출소하면 김가은을 죽이겠다고 수차례 협박했다. 김가은은 매일 밤 ‘밤길 조심해라’ ‘내가 네 머리에 칼 꽂을 거다’라는 말을 환청처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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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단독]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캄보디아 ‘셀허브’ 추적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민낯이 드러났다. 주로 수도인 프놈펜 인근과 시아누크빌 범죄 단지가 그들의 주둔지였다. 국내 조직폭력배가 중국 갱단과 결탁해 만든 ‘셀허브’의 경우 피해자만 수십명이다. 이들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가장했다. 사이트에는 유명인의 사진이 수차례 도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는 사라진 셀허브 엔터테인먼트의 홈페이지. 지난해 7월 <일요시사>가 취재한 이후 대표이사의 이름과 사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표창장을 받았다며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이 기업의 정체는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확인된 피해액만 약 40억원, 피해자는 수십명이다. 한 언론사는 보도자료까지 작성하며 홍보하기도 했다. 조직적 준비 경찰 수사 중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4일, 셀허브 조직원 3명을 각각 구속·불구속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이들은 조건 만남 사이트를 운영한 로맨스 스캠 조직이다. 여성 관련 데이트 상품을 판매하거나 연애 빙자 사기를 일삼았다. 셀허브 조직원이던 A씨는 “연예인 지망생이나 모델과 연락하게 해 준다며 5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대포통장 계좌에 돈을 입금하게 한 뒤 텔래그램 아이디를 알려주고 연락하게 하는 시스템”이라며 “연결된 여자는 실제 남성이고 한국에서 조직폭력배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직은 지난해 3월 캄보디아 범죄 밀집 지역인 태자 단지에서 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사이트를 개설해 조직원들에게 민간인 협박, 중국어 통역 등의 역할을 맡기고 수십명으로부터 약 40억원을 뜯어냈다. 같은 해 7월 <일요시사> 취재가 시작되자 이 조직은 셀허브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의 이름을 ‘김현숙’에서 ‘박소희’로 변경하고 유명인의 사진을 수차례 도용했다. 유 전 장관에게 표창장까지 수여받았다며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하려는 꼼수도 서슴지 않았다. A씨는 “조직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은 밤새 맞거나 강제로 마약을 투약당하기도 했다. 조직폭력배 출신 한국 사람들이 간부고 일반 조직원은 교민 사이트를 통해 ‘한 달에 500만~100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서울경찰청이 수사하기 이전인 지난해 7월부터 강서·영등포·구로경찰서 등에 여러 고소장이 접수됐었다. 하지만 수사는 원활하지 않았다. 주요 혐의자가 해외에 거주 중이거나 피의자 특정이 어려운 게 난관이었다. 수사를 담당했던 한 경찰 관계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 주요 혐의자들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지난해부터 공조를 요청했으나 캄보디아 당국이 비협조로 일관했다”며 “고소인분들이 ‘왜 안 잡냐’ ‘내 돈 어떻게 하냐’는 등 불만이 많으셨다. 매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캄보디아가 협조하지 않으면 조치가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3월부터 조직원 모집…태자 단지서 모의 ‘유인촌 표창장’ 걸어 놓고 ‘정상 기업’ 홍보 막막했던 수사는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이재명정부가 캄보디아를 압박했고 현지에 구금된 한국인 범죄자 겸 피해자 수십명을 국내로 송환했다. 송환된 인원 중 일부는 셀허브 사건과도 연관된 것으로 파악됐다. 정성학 충남경찰청 수사부장은 지난 20일 청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들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사기) 및 범죄단체 가입 및 활동 혐의로 전원 구속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부건(총책 가명, 40대 초반, 한국말을 쓰는 외국인 추정) 조직으로부터 확인된 피해 건수는 110건, 피해액은 93억여원에 달했다. 약 1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부건은 지난해 중순부터 올해 7월까지 주로 프놈펜 웬치(범죄 단지) 및 태국 방콕 등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범행을 벌여왔다. 부건 조직은 지난 2018년 중국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 그동안 단속을 피하려 태국, 캄보디아 등지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범행을 계속해 왔다. 이들은 데이터베이스, 입출금 등을 지원·관리하는 CS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팀, 검찰 사칭 보이스피싱팀, 코인투자리딩 사기팀, 공무원 사칭 노쇼 사기팀 등 총 5개 팀으로 이뤄진 조직체계를 갖췄다. 이들은 가구판매업을 하러 캄보디아에 갔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지역 선·후배 권유, 고액 아르바이트 인터넷 광고 등을 접하고 범죄에 연루된다는 걸 알면서도 조직에 가입해 활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속아서 조직에 들어갔다고 진술하지 않은 이들의 유입 경로는 ▲지인 포섭 29명 ▲인터넷 광고 등 포섭 8명 ▲현지 카지노 포섭 6명 ▲기타 2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남성 42명과 여성 3명으로 연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20~30대 연령으로 최소 2개월부터 최대 16개월까지 범행에 가담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건 만남 사이트 경기북구경찰청 형사기동대도 전기통신금융사기특별법 위반 등 혐의로 피의자 15명 중 11명을 구속 송치했다. 이들은 지난해 8월부터 한 달간 캄보디아 범죄 단지에서 여성을 사칭, 조건 만남 등을 명목으로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가로챘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성 만남 광고를 낸 후 이를 보고 연락해 온 피해자에게 여성인 척 채팅으로 유인했다. 여성을 소개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개발한 조건 만남 사이트에 회원 가입과 인증을 받아야 한다고 속여 인증을 위한 돈을 요구했다. 3차례에 걸친 인증 절차 과정에서 여러 게임에 성공하면 가입비를 돌려준다고 속여 피해자로부터 1인당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받아 챙겼다. 피해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별도의 만남 인증과 후기글을 남기는 ‘화력방’도 운영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규모는 피해자 36명, 피해금 16억원 상당이며, 1인당 최대 피해 금액은 2억1000만원이다. 이들은 대부분 20~30대 남녀다. 최초 범죄집단을 구성한 캄보디아 프놈펜 지역 명칭 ‘툴콕’을 의미하는 ‘TK’파로 스스로를 부르며 총책을 정점으로 한 지휘·통솔 체계를 갖췄다. 조직 운영을 총괄하는 총책, 이를 보좌하며 실무 전반과 인력 공급 등을 담당하는 총관리자, 각 파트 팀원의 근태를 관리하고 지시하는 팀장으로 구성됐다. 또 자체적인 조건 만남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개발자, SNS에 광고 글을 게시하는 홍보팀과 광고를 보고 접근한 피해자를 기망하는 로맨스 2개팀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상호 가명 사용 ▲근무 중 휴대전화 금지 ▲사진 촬영 금지 ▲야간에는 커튼으로 외부 차단 ▲다른 부서와의 업무 내용 공유 금지 등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기도 했다. 중국 국적 100명 뒷배 이들은 총책이 마련한 건물에서 2인1조로 합숙했는데 프놈펜 툴콕 지역의 13층 건물을 사용하다가 지난 8월, 현지 단속을 피해 센소크 지역 7층 건물로 이전해 범행을 이어오던 중 현지 수사 당국에 의해 검거됐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SNS 구직 광고나 조직원을 통해 범죄단체에 가입했다고 진술했으며 사기임을 알고도 범행을 지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의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구금된 중에도 총책이 이른바 관작업을 통해 자신들을 석방시켜 줄 것이라는 말만 믿고 대사관의 도움을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셀허브 사건 간부들은 타 사건에도 연루됐다. 지난 7일 캄보디아 바벳에 인접한 베트남 떠이닌 지역 국경 검문소 인근에서 30대 여성 B씨가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숨지기 직전까지 셀허브 간부와 같이 있었다. B씨의 사인은 마약 과다 투약이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B씨가 셀허브에서 한국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공급해 왔다고 보고 있다. A씨는 “셀허브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던 B씨인데 통장을 팔려고 캄보디아에 도착한 한국인들을 유인해 범죄 단지로 팔아넘기고 유인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정보·수사기관도 B씨에 의해 범죄 단지에 넘겨지는 피해를 입거나 유흥업소 일을 강요당한 사례를 확인하고 조사 중이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사실상 마약을 강제로 과다하게 투약당한 살인사건이라는 첩보는 아직 확인 중”이라며 “특정 조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건 현지 경찰도 수사 중인 내용”이라고 말했다. 대개 조직폭력배 출신…지휘는 중국 조직이 맡아 40억 피해액 환수 불가능 “자금 세탁 끝났다” 첫 데이트하던 연인을 치어 여교사를 숨지게 했던 이른바 ‘대전 머스탱 교통사고’의 피의자도 셀허브 조직원으로 확인됐다. 피의자 전모씨는 2019년 2월10일 오전 10시14분 대전 중구 대흥동에서 면허도 없이 외제차를 운전하던 중 인도를 걷던 조모씨와 박모씨를 들이받아 박씨를 숨지게 하고, 조씨에게 중상을 입혔다. 전씨가 대여한 외제차는 불법 대여 차량이었다. 이 차량은 애초 대구에 사는 C씨가 자신 명의로 캐피털에서 월 115만원씩 주는 조건으로 60개월간 대여한 것이다. C씨는 사촌 안모씨와 함께 인터넷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나모씨가 올린 ‘외제차 저렴하게 빌려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보고 접근, 한 달에 136만원씩 받기로 하고 대여한 머스탱 차량을 재임대했다. 나씨는 이렇게 빌린 머스탱 차량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외제차를 빌려준다”고 광고하며 또다시 대여업을 했다. 전씨는 나씨가 올린 이 글을 보고 일주일에 90만원씩 주기로 약속하고 머스탱을 빌려 운전했다. 매년 확정되는 범죄수익 추징금은 30조원을 넘지만 환수 금액은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법무부가 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과 로맨스 스캠 등의 범죄로 발생한 현지 범죄수익을 국내로 환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법무부는 “캄보디아 내에서 벌어진 범죄 가운데 현재 국내에서 수사 중이거나 재판 중인 사건이 1차 현지 수사 의뢰 대상”이라며 “이후 국내에서 유죄 선고를 받으면 최종적으로 환수 대상이 된다”고 밝혔다.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에 따르면 해외에서 발생한 범죄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국내에 있고 피해액이 특정될 경우, 우리 정부가 해외에 범죄수익 환수를 요청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 캄보디아와 국제형사사법공조 조약을 체결해 2021년 정식 발효됐다. 주요 간부들 타 사건 연루 정보기관 관계자는 “범죄자 개인이 아닌 조직을 대상으로 한 범죄수익 환수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국내에서 수사와 재판이 끝나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좋지만 이미 늦었다. 범죄조직 특성상 이미 코인이나 대포 통장으로 제3국에 은닉하거나 세탁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도 “수사가 끝나고 유죄 판결이 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데 환수 절차는 이 모든 사법절차가 종료돼야 가능하다. 특히 조세회피처로 범죄수익을 옮겨놨다면 환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봤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