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심층취재>② 끝나지 않은 악몽

“악마를 만났습니다. 지금도 지옥입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2년이 흘렀다. 가해자의 시간은 매일 흐르고 있지만 생존자의 시간은 감금됐던 그날에 멈춰 있다. 잃어버린 2년, 그리고 앞으로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그날의 악몽은 생존자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일요시사와 인터뷰 중인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피해자

2020년 11월11일 오전 11시20분.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3단독 353호 법정. 원고 김가은(가명)과 피고 강정준(가명)의 민사재판이 열렸다. 오전 11시7분경 수의를 입은 강정준이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안경을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강정준의 목에 있는 한자 문신이 눈에 띄었다. 

얼굴만 봐도
두려움 떨어

판사가 사건번호를 부르면서 원고와 피고를 각각 호명했다. 김가은의 변호인이 “원고 김가은씨가 지금 오는 중입니다”라고 하자 강정준의 고개가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3~4분 뒤, 모자를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김가은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쳐다봤지만 김가은은 강정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년6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강정준은 변호인 없이 변론했다. 강정준은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민·형사상의 합의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의금도 지불했는데 또 다시 이렇게 한 이유를(잘 모르겠습니다). (김가은이) 저에게 보복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강정준이 말한 합의서는 김가은이 쓴 처벌불원서를 뜻한다.


판사가 발언 기회를 주자 김가은은 합의서에 대해 설명했다. 김가은은 “합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민사를 뜻하는) ‘민’ 자를 삭제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김가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판사는 합의서 내용을 확인하고 “여기에 민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은 없네요”라고 설명했다. 

강정준은 재판이 끝나자 교정당국 관계자와 함께 법정을 나섰다. 그 사이 김가은은 강정준과 마주칠까 봐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강정준이 사라지고도 김가은은 한참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갔어요? 갔어요?”하고 변호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김가은은 “심장이 터질 뻔했다”며 마치 감금됐던 그때로 돌아간 듯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천데이트폭력 사건 생존자 김가은은 가해자 강정준에 의해 2018년 10월초 자신의 집에 감금됐다가 11월7일 탈출했다. 감금 기간 동안 강정준으로부터 폭언·협박·폭행·성폭행 등을 당했다. 11월9일에 검거된 강정준은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6월, 강간 혐의로 징역 1년6월 등 4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사건 후 2년이 지났지만 김가은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만신창이다. 2번의 수술 과정에서 장기 일부를 잘라냈고, 강정준의 폭행으로 생긴 골반염은 이미 여러 차례 재발했다. 또 머리에 반복적인 폭행이 가해지면서 후유증으로 광시증(어둠 속에서 눈앞에 빛이 번쩍하는 현상)이 생겨 시력이 떨어졌다.

심리상태는 더 심각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불면증으로 깊은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잠이 들어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했다. 밤마다 괴한에게 쫓기는 꿈, 재해가 일어나는 꿈, 칼로 위협당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있다고 했다.

데이트폭력은 미혼남녀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차이를 보일 뿐 가정폭력과 그 양상이 비슷하다. ▲생존자에 대한 가해자의 심리적 지배 ▲생존자의 무기력으로 인한 적극적 대응 실패 ▲당사자 간의 해결을 요구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 ▲친밀한 관계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주변의 반응 등이다. 그 결과는 생존자의 완벽한 고립이다. 


가스라이팅
합의서까지

#. 심리적 지배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은 데이트폭력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가해 양상이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때릴 때마다 “네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이다” 등의 말로 폭행을 합리화했다. 자존감을 깎는 방법을 이용해 심리적으로 김가은을 조종한 것이다.

폭언과 폭행이 반복되자 김가은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강정준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강정준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관을 꾸몄고, 말과 행동도 강정준의 뜻에 따랐다. 강정준의 요구도 무조건 다 들어줬다. 탈출 이후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김가은씨는 정말 강정준씨의 꼭두각시였네요”라고 말했을 정도.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폭언과 폭행에 김가은의 정신은 붕괴됐다. 탈출 이후 몸은 수술 등을 거쳐 회복이 진행된 반면 정신적인 부분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 사이에도 경찰 조사와 재판이 숨 가쁘게 진행됐다. 차마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던 김가은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친구도 점차 멀어졌다. 

사건 후 2년 지났지만
정신적 상처는 그대로

김가은에 대한 강정준의 심리적 지배는 탈출 이후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완전한 고립에 빠진 김가은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정준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하는 강정준에게 화가 났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는 대화 상대가 필요해서였다. 김가은은 강정준을 10번 이상 접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을 감금할 당시에도 폭행을 저지르고 난 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다. 김가은을 무자비하게 때리다가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호소했다. 김가은에게 처음 폭행을 가했을 때, 김가은의 2차 탈출 시도에 폭행을 가했을 때도 그랬다. 김가은은 강정준에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집에 혼자 있으면 계속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바깥에 나가고 싶은데 갈 곳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피했고 가족에게는 말할 수 없었고요. 강정준이 계속 편지를 보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솔직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강정준밖에 없었어요.” 

강정준의 각서와 김가은의 합의서가 오간 시점도 이때쯤이다. 강정준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 ‘(강정준이 김가은의 이름으로 받은) 대출금과 카드빚 변제에 힘쓰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작성했고, 김가은은 ‘강정준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 ‘형사상 합의했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했다. 
 

▲ 부천데이트폭력 사건의 가해자가 법정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특히 채무 압박에 시달리던 김가은은 엄마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돈을 갚겠다는 강정준의 말을 믿고 기다렸다. 추심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이상 전화가 오고 집으로도 사람이 찾아오던 때였다. 강정준은 카드빚과 대출금 변제를 호소하는 김가은에게 해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7개월 동안 반복했다.

“빚에 대한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몸과 마음이 아픈 것보다도 더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고요. 강정준은 계속 ‘엄마가 많이 아프다. 그래도 해주실 거다’ 라면서 죄책감을 자극하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계속 돈에 절절 매니까 그걸 이용한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이 끝난 후 강정준은 돌변했다. 

“사실 2019년 1월 합의서를 써준 직후부터 후회했죠. 몸이 낫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기 시작하니까 강정준의 모든 게 다 이상해 보였어요. 오히려 (2019년) 6월에 강정준이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서 ‘사람 안 변하는구나’ 했어요. 심지어 합의금조차 5개월이 지나서야 보내주더라고요.”

카드빚만
3000만원

2019년 6월 강정준은 김가은에게 ‘이제 재판도 끝났으니 너한테 잘 보일 필요 없겠다. 너 내가 나가면 머리에 칼 꽂을 거니까, 밤길 조심해라. 조금 있으면 출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시켜서 너 죽여버릴 거다. 옛날 기억 다시 떠오르게 해줄게’라고 협박했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강정준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어요. 확실하게 죗값을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 경제적 파탄
하지만 김가은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출금과 카드빚이 어마어마했다. 강정준이 한 달 동안 김가은의 카드로 쓴 돈은 3000만원에 이른다. 강정준은 헤어짐을 요구하는 김가은에게 돈을 주면 헤어져 주겠다고 말했다. 전정가위(가지치기용 가위)로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면서도 1억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정준은 김가은의 명의로 2000만원가량의 카드론 대출을 받았다. 이 돈으로 강정준은 자신의 빚을 갚고 중고차를 구입했다. 강아지를 2마리 사들였고, 지포라이터와 가방 등 명품 쇼핑을 했다. TV, 청소기 등 집안의 가전도 마구잡이로 바꿨다. 2018년 11월7일 이후 검거될 때까지도 강정준은 김가은의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모든 돈은 김가은의 명의로 대출받았기 때문에 빚도 고스란히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사건 전 17평대 전셋집에 살고 있던 김가은은 사건 이후 연체기록이 잔뜩 남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2019년 6월 몸도 마음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찾아 나섰던 것도 말 그대로 돈이 너무 없어서였다. 

“집 형편이 좋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내가 벌어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죠. 또 불면증도 너무 심했어요. 일을 하고 몸을 혹사시키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을까 싶어 일자리를 찾아봤어요. 운 좋게 한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게 됐죠.” 

회사생활은 6개월 만에 한계에 다다랐다. 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손 떨림, 조금만 큰 소리가 나도 바짝 얼어버리는 몸, 회사로 걸려오는 연체 독촉전화, 자꾸만 주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기 어려웠다. 회사 동료들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결국 지난해 말 회사를 그만뒀다. 
 

대출금과 카드빚 연체기록은 두고두고 김가은의 발목을 잡았다. 최종합격한 또 다른 회사에서 연체기록을 이유로 채용취소를 통보했다. 첫 출근 후 퇴근하는 길에 받은 전화였다. 연체기록이 확인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하루 일한 것은 일할로 계산해 돈을 챙겨주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계속 일을 하려고 한 게, 집에만 있으면 나를 아예 놓아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최종합격했다가 취소되니까…. 통보를 받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서 엄청나게 울었어요. 이제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

김가은은 올해 2월 전문상담기관을 찾았다. 일이나 취미 등으로 마음을 달래보려 했던 시도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 상담 당시 김가은은 ‘우울감 및 불안감이 지속적이고 침습(원치 않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것) 및 해리 증상, 회피 행동과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 관련 증상’이 있는 상태였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스스로를 굉장히 유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로 인식’ ‘일상의 일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주변의 요구에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힘겨운 상태’ ‘자책하는 면이 있음’ ‘외상적 경험 이후 유발된 정서적 혼란감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음. 이것이 대인상과 자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등의 소견이 나왔다.

“길을 가다가도 울컥해요. 갑자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화도 엄청나게 나요. 강정준이나 강정준 누나는 저한테 미안하단 말 한 마디가 없어요. 그저 자기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걸 제 탓으로 돌리고 있어요. 자기 엄마가 잘못되면 절 죽이겠다고. 그게 왜 내 탓이에요, 대체?”

상담사들은 김가은이 최소 몇 년 동안 상담치료 등 전문적인 의료기관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전폭적으로 김가은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김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회사원에서 신용불량자 신세
연체기록 때문에 채용 취소도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세요. 형제도 없고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저를 키워주셨어요. 솔직히 할머니께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편은 아니라 모든 걸 혼자 해야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한 것도 할머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랬던 거고요.”

“친구들은 제 상황을 자세히 몰라요. 그래서 몇몇 친구들은 아직도 힘들어하는 저를 보고 ‘한심하다. 언제까지 그 일에 휘둘릴 거야’라면서 욕하기도 해요. 그러면 ‘네가 사건에 대해 뭘 알아’ 하고 속으로 말하고 말죠. 어떤 친구한테는 말해보려 했는데, 몇 마디 하니까 ‘징그럽다고 그만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회사 생활, 대학원 준비, 사업 준비, 운동, 독서 등으로 바빴던 김가은의 삶은 이제 단조로워졌다. 일어나서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 그러다 일주일에 1번 상담을 위해 병원에 가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만난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산더미처럼 많지만 무기력증이 김가은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강정준에 대한 추가 고소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공갈도 있고, 협박도 있고. 고소 시효가 있어서 빨리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마음은 급한데 뭘 하려고 하면 집중도 안 되고. 일상을 사는 방법을 아예 까먹은 것 같아요.”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바깥으로 다 드러내면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까 봐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속은 다 썩어 문드러졌거든요. 정말 회사 다니고 사회생활하면서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요. 제 미래에 대해서만 걱정하면서요. 사실 이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힘들잖아요, 충분히. 근데 왜 내가 이런 것까지….”

#. 엄습해오는 공포

강정준은 2022년 11월 사회로 돌아온다.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김가은은 올해 초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전 집은 악몽의 공간이 됐다. 줄곧 원룸에서 살다가 처음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돼 직접 페인트칠까지 하면서 꾸몄던 집이었다. 30년간 쓴 이름도, 주민번호도 바꿔야 한다. 김가은이 아는 강정준은 ‘출소하면 너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한 말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가족에도
말 못해요”

“2018년 11월7일에 탈출하고 보호소에서 잤던 때가 생각나요. 그때 30일 만에 정말 편안한 잠을 잤거든요. 그 이후로 편안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발 뻗고 잘 수 있죠. 그런데 앞으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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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단독] ‘구로발’ 국민의힘 당원 명부 유출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서울의 한 지역구에서 특정 당의 당원 명부가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총선, 지방선거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당 관계자의 업무용 노트북에 담겨있던 정보가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올림픽 육상 100m 경기를 생각해 보자. 8개 레인에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선다. 이 선수들은 국내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뽑힌 선수는 올림픽에 출전해 예선을 치르고 결승에서 금메달을 다툰다. 0.01초 차이로 메달 색깔이 달라지는 경기에서 승자는 늘 단 1명뿐이다. 치열한 공천 경쟁 선거는 올림픽보다도 더 확고한 ‘승자 독식’ 구조다. 올림픽에선 2등에게 은메달, 3등에게 동메달이라도 주지만 선거에서 2등은 꼴찌와 같다. 당선자는 후보자에서 국회의원, 시·군·구의원, 구청장·군수, 시·도지사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이뤄진다. 명예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자리로 순식간에 올라가는 셈이다. 이렇다 보니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당선 가능성이 큰 자리로 몰린다. 어떤 경기든 일단 출발선에 서야 경쟁을 할 수 있듯, 선거에서 공천은 본선으로 가기 위한 1차 관문이 된다. 자리는 하나, 후보는 여럿이니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최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서 불거진 공천 헌금 의혹은 자리를 돈으로 사려 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는 구속됐다. 최근 서울 구로구에서 일어난 당원 명부 유출 의혹도 공천 경쟁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의 업무용 노트북에서 수십개의 엑셀 파일이 발견됐는데 그중 일부가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였고 이름, 연락처, 거주지 등이 포함된 이 파일이 상대 당의 후보 경선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0년 21대 총선 당시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거물급 인사가 후보로 맞붙었다. 구로을 지역은 서울에서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곳이다. 17대(2004년)부터 지난 22대(2024년) 총선까지 20여년간 민주당이 이겼다. 민주당(당시 통합민주당)이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한 18대 총선에서도 구로을 지역은 넉넉하게 수성한 바 있다. 업무용 노트북에서 발견 이름·연락처·거주지 담겨 구로에서만 평생 살았다는 한 시민은 “선거 때마다 텃밭, 험지 이런 말을 많이 쓰지 않나. 구로는 국민의힘 입장에서 ‘사지’다. 민주당이 아주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총선 등에서 민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몇몇 인사들은 바닥부터 훑어가며 선거를 준비한다. 민주당은 21대 총선 때 구로을 지역 후보로 윤건영 의원을 전략공천 형태로 낙점했다. 윤 의원은 당시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복심으로 불린다. 국민의힘은 서울 양천을 지역에서 내리 3선을 지낸 김용태 전 의원을 ‘자객’ 공천했다. 민주당의 독식으로 관심 지역에서 벗어나 있던 구로을이 순식간에 ‘격전지’로 떠올랐다. 문제는 구로을 지역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예비후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민주당 조규영 전 서울시의원의 반발이 거셌다. 조 전 시의원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서울 비례대표로 정치권에 입성, 이후 구로2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재선했다. 조 전 시의원은 최소한 경선은 치를 수 있게 해달라며 민주당의 전략 공천을 비판했다. 당시 조 전 시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지역 당원 수보다 더 많은 권리당원을 모았다. 열심히 뛰었다. 누구와 경쟁하든 경선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는 낙하산 공천이었다. 저는 특혜나 찬스를 원하지 않았다. 공정한 경선만을 바랐다. 낙하산 공천은 공정하지도 않고 본선 경쟁력도 없다”고 강조했다. 어디에 사용했나 조 전 시의원은 노숙 단식까지 해가며 경선을 촉구했지만 결국 낙천했다. 이후 다른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잊히는 듯했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최근 다시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업무용 노트북에서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표기된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발견된 것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이름과 연락처, 행정동 등이 기재된 엑셀 파일은 ‘(보안철저)저쪽디비’ 폴더에 담겨있었다. 해당 파일의 ‘구분’ 부분에 ‘조규영 일반 당원’이라고 표기돼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가 맞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에 민주당 구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였던 조 전 시의원의 이름이 기재돼있다는 점에서 의심이 촉발됐다. 동시에 누가 노트북에 해당 파일을 옮겼는지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문서가 발견된 노트북은 2020년 총선 과정에서 당원협의회에 업무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 말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로 구로구의회에 입성한 A 구의원이 해당 노트북을 사용했다. A 구의원은 2022년 국민의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여성부장을 맡은 이력도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문제의 노트북은 A 구의원이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무렵 사용했다가 후임자에게 넘겼다. 그는 “이후 여성부장이 바뀔 때까지 쭉 A 구의원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쉬쉬하다 이제서야 눈여겨볼 대목은 A 구의원의 이력이다. 그는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아 당선됐지만, 2020년 총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조 전 시의원을 보좌하는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실제 조 전 시의원이 예비후보로 선거운동을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곳곳에서 A 구의원을 확인할 수 있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A 구의원은 조 전 시의원 낙천 이후 김용태 전 의원 배우자의 수행비서로 발탁됐다. 김 전 의원의 측근이 A 구의원을 추천한 것으로 안다”며 “2020년 총선에서 김 전 의원이 낙선하고 당협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A 구의원이 비례대표로 공천받았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측 정치인을 수행했던 인사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한 데 이어, 그가 직접 사용한 노트북에서 자신이 보좌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파일명이 기재된 국민의힘 당원 명부가 발견된 셈이다. A 구의원이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 명부를 민주당 측에 유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대목이다.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A 구의원이 조 전 시의원을 수행할 당시 지역구 경선을 대비해 당원 명부를 입수한 게 아닌가 싶다”며 “당시 경선까지 진행되지 않았기에 당원 명부가 실제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아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 관계자는 “사실 이 문제는 올해 1월경에 처음 드러났다. A 구의원이 당원협의회에 노트북을 반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해당 폴더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쉬’하다가 최근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설명했다. 당협 회의에서 논의 A 구의원 “문제없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A 구의원의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지난 1월 국민의힘 구로구 당원협의회에서 논의됐다. 해당 의혹이 구로 지역에서 확산하자 A 구의원이 먼저 이 문제를 먼저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당원협의회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에 따르면 대부분 위원은 ‘덮고 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가 불거지면 지방선거를 망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부 관계자가 “심각한 개인정보 유출” “해당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조사를 요청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아 관철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위원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원 명단이 일부 흘러 다니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명부가 통째로 유출되는 건 심각한 일”이라며 “명백한 해당 행위다. 자체 조사를 통해 징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규정 제20조(징계사유)에 따르면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를 했을 때 ▲현행 법령 및 당헌·당규·윤리 규칙을 위반해 당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 행위의 결과로 민심을 이탈케 했을 때 등의 사유로 징계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해당 관계자는 A 구의원의 행위가 당에 극히 유해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해당 행위? 징계 가능성? A 구의원은 해당 의혹은 전부 해명됐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당협 회의에서 이 문제가 논의됐는데 문제없다고 결론 났다. (당원 명부 유출 의혹은) 일고의 논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의혹을 언급한 제보자에게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등으로 조치할 수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고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