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치부 덮기’ 건국대-교육부 커넥션 의혹

똑같은 판결에 엿가락 판단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건국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교육부가 관리·감독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사이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지적이다. 더 나아가 교육부가 건국대의 ‘치부’를 암묵적으로 덮어주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 건국대학교 ⓒ고성준 기자

민주노총 산하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학교법인 건국대의 사모펀드 투자에 대한 교육부의 종합감사와 검찰 고소·고발을 촉구했다. 건국대는 학교법인의 수익 사업체인 더클래식500이 임대보증금 일부를 옵티머스자산운용에 투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육부의 현장조사를 받았다.

잦은 논란
부처 책임도

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학교법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교육부의 허술한 관리·감독으로 건대법인이 임대보증금과 임대료, 학교와 병원 등 산하 비영리법인의 고유 목적 사업 준비금 등을 마치 자기 돈처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방치한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허술한 조사로 또 다시 이사장과 법인에 면죄부를 주지 말아야 하며 철저한 감사를 통해 법 위반 사실에 대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교육부는 건국대 관련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함께 자주 언급됐다. 특히 현재 서울동부지검에서 수사 중인 ‘건국대 임대보증금 393억원 사건’이 교육부의 부실한 관리·감독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은 끊이질 않고 있다. 


2017년 3월 감사원의 기관운영 감사에서 건국대의 임대보증금 문제가 불거지기 전, 교육부는 2014년 4월 ‘대학 교육 역량 강화시책 추진 실태’ 특정감사에서 같은 문제로 ‘주의 조치’를 받은 바 있다. 건국대 임대보증금 논란에서 교육부 책임론이 불거지는 이유다.

최근에는 교육부가 2015년 대학 구조개혁평가에서 B등급으로 정원 감축 권고를 받은 건국대를 ‘자율감축’으로 구제해줬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교육부의 정원 감축 권고는 이행하지 않을 경우 페널티가 있지만, 자율감축은 말 그대로 대학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대학 구조개혁평가는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에 대비하고 교육의 질 하락을 막기 위한 일종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이다. 2014년 교육부는 2023년까지 대학 정원을 16만명 감축해 40만명까지 줄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평가 결과에 따라 대학을 A~E등급으로 분류하고 A등급은 자율감축, 그 외 등급은 비율에 따라 대학의 정원을 줄이도록 권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전임 이사장 확정 판결
교육부 “정원 줄여라”

2015년 9월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 구조개혁평가 결과에 따르면 건국대 서울 캠퍼스는 A등급, 충주 글로컬 캠퍼스는 D등급을 받았다. 당시 평가대로면 건국대 서울 캠퍼스는 정원 감축 비율을 따로 정하지 않은 자율감축 대상으로 정원을 줄일 필요가 없었다.

반면 충주 캠퍼스는 10%의 정원을 줄여야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7년 11월30일 교육부는 건국대에 서울 캠퍼스의 등급을 당초 A등급에서 B등급으로 1단계 하향 조정한다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정원을 감축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김경희 전 건국대 이사장의 횡령 혐의 등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확정 판결이 나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교육부는 지난 2014년 1월 종합감사 결과를 발표한 뒤 242억원의 업무상 배임, 회계비리, 수억원의 재단 자금 횡령 등의 혐의로 김 전 이사장과 김진규 전 건국대 총장을 검찰에 고발 조치했다. 
 

▲ ⓒ건국대학교

김 전 이사장은 판공비와 업무추진비 등의 횡령 혐의와 재단 소유 아파트를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출장비로 가족여행을 하고 판공비로 딸의 대출금을 갚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2017년 4월 대법원은 업무상 횡령·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이사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판결했다. 이에 따라 김 전 이사장은 금고 이상의 형량을 받은 사람은 임원으로 재직할 수 없도록 한 사립학교법에 따라 이사장직을 잃었다. 

교육부는 건국대 전임 이사장을 직접 고발한 사건의 결론이 나오자 후속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A등급에서
등급 하향

교육부의 조치에 따라 건국대는 2013학년도 입학정원 대비 4%를 2020년까지 감축하고 2019~2020년 정원 감축 이행 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교육부는 건국대의 이행에 따라 1주기 평가 정원 감축 미이행으로 인한 감점은 적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건국대는 2017년 12월 재고를 요청한다며 교육부에 선처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전임 총장의 과오로 1주기 대학 구조개혁평가에서 감점을 받았지만 대부분 평가항목에서 우수한 실적과 역량을 인정받아 A등급을 받았다”며 “등급 하락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청산했고, 이 과정에서 촉발된 구성원 간의 갈등 역시 해소됐다”고 호소했다. 

이어 “전임 경영진의 잘못이 결과적으로 이와 전혀 관계없는 학생들의 자긍심과 교육여건에 큰 상처를 주게 돼 대단히 우려스럽다. 또 2016~2017년 PRIME사업과 LINC+사업 등 재정지원 사업에서 이미 예산감축 제재를 받은 바 있기에 이번 정원 감축이라는 추가 제재는 가혹한 처분”이라고 덧붙였다.

건국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정원 감축은 등록금 수입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학교에 재정적으로 타격을 준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학 이미지, 명예의 실추다. 단순히 학생 수가 줄어드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명문 종합대학의 입학정원 기준을 3000명으로 잡는다. 건국대의 경우 그 숫자를 계속 유지해왔는데, 교육부의 정원감축 권고로 그 마지노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교육부는 건국대의 호소에 ‘불수용’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2015년 대학 구조개혁평가 기본 계획’ ‘부정·비리 대학과 평가 결과를 연계한 제재 방안’에 따라 각 등급별로 정해진 조치를 적용한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또 대학 구조개혁평가와 재정지원 사업은 독립적으로 운영되기에 부정·비리에 대한 제재 조치도 별도로 실시된다고 설명했다.


2014년 12월 교육부에서 내놓은 ‘2015년 대학 구조개혁평가 기본 계획’에는 최근 3년간(2012~2015년) 고등교육법에 따른 행·제정 제재, 감사에 따른 교육부 처분을 받은 부정·비리 발생 대학은 사안의 경중에 따라 구조개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등급의 하향 조정 여부를 결정한다고 명시돼있다. 

이메일 민원
다른 대학은?

결국 건국대는 2018년 3월 교육부에 ‘1주기 대학 구조개혁평가 결과 등급 하향 조정에 따른 후속 조치 계획’을 제출했다. ‘2020학년도 모집단위별 정원 감축 계획(안)’에는 3000명 정원의 4%인 120명을 줄인다는 계획을 담았다.

공과대학 기술융합공학과를 없애고(26명 감축), 사회과학대학 글로벌비즈니스학과에서 16명을 줄이는 등 총 2880명만 모집하겠다는 내용이다. 
 

▲ ▲건국대학교 ⓒ고성준 기자

그로부터 1년 뒤인 2019년 3월 교육부는 건국대에 조치한 4% 정원 감축 권고를 자율감축으로 변경했다. 2019년 2월 전자메일을 통해 대학 구조개혁평가 결과 조치 관련 민원이 접수된 지 한 달 만이었다. 2015년 대학 구조개혁평가 결과가 처음 나오고 이후 4년 동안 총 3차례에 걸쳐 건국대에 대한 조치가 바뀐 것이다. 

한 건국대 관계자는 “정원 감축 권고 조치를 재고해달라고 총장 명의로 공문을 보냈을 때도 ‘불수용’을 외쳤던 교육부가 불과 1년 만에 이메일로 들어간 민원에 조치를 변경했다. 다른 대학에도 이런 경우가 있는지 조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육부는 1주기 대학 구조개혁평가의 대상 기간인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전임 보직자의 비리 행위가 없었기에 정원감축 조치를 취소했다고 해명했다. 다시 말해 김 전 이사장의 대법원 확정 판결 결과 유죄는 인정됐지만, 2012~2015년 사이 비리 행위로 유죄를 받은 사안은 없다는 점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교육부 고등교육정책과 관계자는 “당초 평가를 진행할 때 2012~2015년 사이에 발생한 비리에 대해서만 문제로 삼는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 전 이사장의 경우 2012년 이전에 발생한 사안들만 유죄로 인정됐다. 그래서 감점을 취소했고, 건국대의 등급이 다시 A등급으로 올랐다”며 “정원 감축은 등급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정원 감축 권고도 자율감축으로 바뀐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1심 판결문에 따르면 김 전 이사장은 건국대로부터 출장비 명목으로 수령한 돈을 임의로 사용해 업무상 횡령 혐의를 받았다. 1심 재판부는 김 전 이사장이 2007년 7월31일부터 2011년 8월3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출장비 총 5320만원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업무상 횡령을 했다고 판단했다.

갑자기 자율감축으로
보이지 않는 손 영향?

이사장 판공비를 업무상 횡령했다는 혐의 역시 2007년 4월12일부터 2011년 10월26일까지 사용된 부분만 유죄로 인정됐다. 1심 재판부는 김 전 이사장이 2012년 2월에 사용한 업무추진비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1심 재판부의 판결은 항소심과 상고심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석연치 않은 점은 교육부가 2017년 건국대의 등급을 하향 조정하는 근거로 김 전 이사장의 대법원 확정 판결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확정된 판결을 두고 2017년과 2019년 교육부의 판단이 달랐던 셈이다.

이렇다 보니 일부 건국대 관계자들은 교육부의 ‘태세전환’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게 아닌지 의심을 품고 있다.
 

▲ ▲ 교육부 공문 ⓒ고성준 기자

정원 감축 권고가 자율감축으로 바뀔 무렵 교무처장을 맡고 있던 원모 교수가 교육부의 조치 변경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 9월 교학부총장이라는 요직을 맡게 된 것도 그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는 의혹도 추가로 나왔다.

한 건국대 관계자는 “해당 교수가 교육부의 결정을 ‘자신의 공’이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공교로운 점은 원 교수가 받고 있는 의혹이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8년 4월 교육부는 사립대학들에 ‘교수 논문에 자녀 공저자 등록’에 대한 철저한 검증 및 결과 보고 요청 공문을 내려보냈다.

당시 교수인 부모가 본인이나 동료 교수의 논문에 자녀를 공저자로 올리는 사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커질 무렵이었다.

원 교수는 2013년 자신의 논문에 자녀를 공저자로 올렸고, 2018년 교육부의 조사가 시작되기 전 자녀의 이름을 삭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원 교수의 자녀로 추정되는 인물은 당시 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논란 교수
요직 승진

건국대 홍보실 관계자는 “원 교수는 해당 사안(정원 감축)에 대해 교무처장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번에 교학부총장이 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설명했다. 원 교수의 논문 의혹과 관련해 교수들의 연구윤리를 담당하는 교육부 학술진흥과 관계자는 “민원이 들어온 사안”이라며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논문과 관련해 원 교수의 입장을 들으려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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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