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건국대 이사장 징계의 전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방향으로 질주하던 열차가 갑자기 탈선했다. 탈선의 원인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왔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서야 당시 열차가 철로를 벗어난 이유가 어렴풋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차를 달리게 만들고 또 끝내 멈춰 세운 현장에 작용한 거대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옵티머스 사태는 라임 사태와 함께 단군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불린다. 2019년 라임 사태가 불거지고 채 1년도 되지 않은 2020년 6월 피해액이 5000억원대에 이르는 옵티머스 사태가 터졌다. 옵티머스 자산운용은 공공기관 매출 채권에 투자하는 안전한 상품이라고 속여 투자자를 모았다.

문제는 공공기관에 투자한다는 내용이 거짓이었다는 점이다. 옵티머스 자산운용은 부실기업의 채권을 사들여 펀드를 돌려막기 하면서 자금을 빼돌렸다. 이 사건으로 김재현 옵티머스 자산운용 대표는 2022년 7월 대법원서 징역 40년형이 확정됐다. 라임‧옵티머스펀드를 판매한 증권사들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 

흥미로운 대목은 라임‧옵티머스 사태와 관련된 인물과 기관이 법의 철퇴를 맞는 동안 유유하게 그 집중포화를 피해 간 대학과 이사장이 있다는 점이다. 건국대와 유자은 이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100억원이 넘는 돈을 옵티머스펀드에 투자하는 과정서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점이 확인됐지만 유 이사장에게 가해진 징계는 ‘엄중 경고’에 그쳤다.

2020년 8월말 건국대 내부가 술렁였다. 건국대가 학교법인 수익사업체 더클래식500의 임대보증금 일부인 120억원을 옵티머스펀드에 투자했다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당시는 옵티머스펀드 환매 중단 사태가 확산되면서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기였다.

구성원 사이에서는 건국대가 투자금 120억원을 고스란히 날리게 됐다는 흉흉한 소문이 이어졌다. 


언론 등을 통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교육부는 2020년 9월 현장 조사에 나섰다. 교육부는 건국대가 NH투자증권을 통해 ‘옵티머스 크리에이터 전문투자형 사모신탁’에 120억원을 투자한 사실을 확인했다. 교육부는 건국대가 옵티머스펀드에 투자한 120억원을 ‘수익용 기본재산’으로 보고 조치를 취했다. 

사립학교법 제28조(재산의 관리 및 보호)는 ‘학교법인이 그 기본재산에 대해 매도·증여·교환 또는 용도변경하거나 담보로 제공하려는 경우 관할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건국대가 옵티머스펀드에 투자하려면 교육부의 허가 조치가 선행됐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1년 12월 처분 완화
배경 두고 갑론을박 일어

하지만 교육부의 현장 조사 결과 건국대는 이 과정 없이 투자금을 넣었다. 교육부는 2020년 11월 건국대 법인이 수익용 기본재산을 부당하게 관리해 더클래식500이 투자 손실을 보고 이사회를 부실하게 운영했다고 지적했다.

유 이사장과 건국대 법인 감사에 대해서는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를 추진하고 이사 5명에 대해서도 경고 조치를 내렸다.

건국대 법인 전·현직 실장 2명에겐 문책·징계, 더클래식500 사장 등 4명에겐 문책·중징계를 요구했다. 건국대 법인에는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라고 했다. 유 이사장과 더클래식500 사장에 대해서는 배임 혐의로 수사도 의뢰했다. 이보다 앞서 2020년 10월 국정감사에서는 유은혜 당시 교육부 장관이 건국대의 옵티머스펀드 투자를 ‘사립학교법 위반’ 사항이라고 언급했다.

건국대의 옵티머스펀드 투자 사건은 세 갈래로 진행됐다. 먼저 교육부의 의뢰로 검찰 수사가 이뤄졌다. 여기에 건국대가 교육부의 징계 조치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교육부는 유 이사장에 대한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를 밟았다. 검찰-교육부의 공격에 유 이사장은 ‘사면초가’ 상태가 됐다. 


하지만 검찰이 옵티머스펀드에 들어간 건국대의 투자금을 ‘보통재산’으로 판단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보통재산은 사용 전 관할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기본재산과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투자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고 손실을 끼친 부분 역시 고의성을 입증할 수 없어 횡령‧배임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봤다.

단호하더니
갑자기 왜?

보건의료노조 건국대 충주병원 지부가 “투자의 구체적 경위와 동기에 대한 고려 없이 상품 위험성이 낮다는 설명을 듣고 투자한 것이라는 피의자의 입장만 고려해 내린 잘못된 판단”이라고 반발하며 서울고검에 항고를 제기했지만 재차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

눈여겨볼 지점은 교육부와 건국대가 직접 맞붙은 행정소송 결과다. 앞서 교육부는 건국대의 현장 조사 결과 처분 재심의 요청을 기각한 바 있다. 여기에 행정소송은 교육부의 완승으로 끝났다. 건국대의 옵티머스펀드 투자에 대한 교육부의 징계 조치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온 셈이다.

건국대와 교육부의 행정소송 1심 판결이 나온 날은 2021년 7월23일. 그보다 앞서 교육부는 2021년 7월13일 유 이사장의 임원 취임 승인 취소를 계고했고 건국대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2021년 9월15일 유 이사장을 상대로 청문이 진행됐다.

건국대가 행정소송서 패소하면서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가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건국대 내부에서는 유 이사장이 낙마하고 교육부서 관선이사를 파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머니인 김경희 전 이사장에 이어 딸인 유 이사장도 결국 물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특히 교육부 장관이 국감서 언급하는 등 교육부의 단호한 태도가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실었다.

교육부가 임원 취임 승인을 취소할 것이라는 다수의 예상과 달리 징계는 대폭 감경된 ‘엄중 경고’로 결정됐다. 2021년 12월 당시 교육부는 “건국대 법인에 유자은 이사장의 임원 승인 취소 절차를 중단한다고 통보했다”고 밝혔다.

3년 동안
감감무소식

그 배경으로 건국대가 옵티머스펀드 투자금을 모두 회수한 부분이 언급됐다. 실제 건국대는 NH투자증권으로부터 투자금 120억원을 모두 돌려받은 바 있다.

2022년 7월 행정소송 항소심서 교육부가 이겼지만 징계는 이미 감경된 뒤였다. 건국대 충주병원 노조를 비롯해 구성원의 반발에도 교육부는 꿈쩍하지 않았다. 징계 감경 조치 사유를 둘러싸고 추측이 난무했고 청문 절차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됐다. 하지만 교육부가 해당 조치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상황은 그대로 종료됐다.

건국대의 옵티머스펀드 투자 사건이 일어나고 3년이 지났지만 유 이사장의 징계 감경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계속됐다. 국감서 언급될 만큼 정치권의 관심을 받았고 교육부가 유 이사장 등을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등 징계 조치에 강한 의지를 보였던 사안이기에 반전이 준 충격이 컸다.


최근 <일요시사> 취재 결과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단서가 포착됐다. 교육부는 ▲시정 요구 이행 정도 ▲법원 판례 ▲청문 결과를 들어 징계 조치를 감경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건국대가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사유 3건에 대한 시정 요구 사항을 모두 완료한 점을 들었다.

건국대가 ▲수익용 기본재산 관리 규정을 제정했고 ▲투자 손실금 보전을 완료했으며 ▲재산 관리 책임 임원 제도 도입 등 이사회의 전문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감경 사유로 든 것이다. 여기까지는 교육부가 유 이사장의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를 중단하면서 밝힌 내용과 맞닿아 있다. 

해임 위기에서 기사회생
교육부 판단 문제없었나

눈길이 가는 지점은 ‘법원 판례’ 부분이다. 교육부가 유 이사장의 징계를 엄중 경고로 감경 처분하는 과정서 사용한 판례가 김경희 전 이사장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 전 이사장이 교육부를 상대로 낸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처분 취소’ 소송을 근거로 유 이사장의 징계를 감경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학교법인이 관할청의 시정 요구를 모두 이행한 이상 관할청은 사립학교법상 임원 취임 승인 취소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언급했다. 교육부는 2013년 11월 건국대 법인에 대한 회계 감사를 진행해 ‘수익용 기본재산을 부당하게 관리한 사항 등에 대한 시정 요구 등을 거쳐 이사장(당시 김경희)의 임원 취임 승인을 취소한다’고 통보했다. 

건국대는 교육부의 통보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2심서 모두 김 전 이사장이 승소했다. 이 과정서 교육부는 김 전 이사장의 연임을 승인했다. 또 2심 패소 이후 상고도 포기했다. 다시 말해 교육부는 자신들이 패소한 소송의 판례를 근거로 삼아 유 이사장을 벼랑 끝에서 건져 올린 셈이다. 


청문과 관련해서는 ‘현장 조사 결과 처분사항 조치 및 시정조치 요구 등이 적법하나 시정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볼만한 특별한 사건이 없어 보여 3인 모두 임원 취임 승인 취소 부적절’ 의견을 냈다고 언급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시정 조치 이행 여부와 청문 결과 등을 종합해 유자은 건국대 이사장에게 엄중 경고 처분을 내렸다”면서도 “판례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했다.

이래서
말 없었나

건국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유자은 이사장에 대한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는 김경희 전 이사장 사례와 상당히 닮아있다. 교육부는 엄마의 판례를 이용해 딸을 구한 셈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진 소송을 가지고 징계 감경 사유로 사용했다는 게 어이없다”면서 “그동안 교육부가 유자은 이사장의 징계 감경 과정에 대해 그토록 숨긴 이유가 이것이었느냐”고 한탄했다.

<jsjang@ilyosisa.co.kr>

 

<반론보도> <단독> 건국대 이사장 징계의 전말 관련

<일요시사>는 지난 2024년 2월25일자 종합면 및 26일 인터넷 사회면에 학교법인 건국대학교가 교육부 허가 없이 옵티머스펀드에 투자한 것과 관련해, 교육부가 2020년 11월 이사장에 대한 임원 취임 승인 취소 절차를 추진했으며, 국정감사에서 ‘사립학교법 위반’ 사항이라고 언급하고 행정소송에서도 모두 승소했으나 실제 징계는 ‘엄중 경고’에 그쳐 의혹이 제기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측은 “투자 주체는 대학이 아닌 법인 산하 수익사업체였고, 당시 교육부 조사 결과 처분서에는 이사장에 대해 <별도 조치 예정>으로 언급돼있을 뿐이었으며, 행정소송 재판부는 펀드에 투자한 임대보증금은 기본재산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사립학교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사장에 대한 임원 취임 승인취소 처분이 되지 않은 것은 사립학교법 및 기존 판례에 근거한 정당한 결정이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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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