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 ‘트럼프 취임식 직관기’

MAGA 시대를 마중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다시’ 트럼프 시대가 도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4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뒤 1기 때보다 더 강한 행보를 공언했다. ‘Make America Great Again(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세계 질서 재편에 나섰다. <일요시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을 만나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

8년 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다.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던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포부와 함께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의 당선을 예측하지 않았지만 당선 이후 행보는 더더욱 예상 밖이었다.

4년 만
재집권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벽을 세우고 불법 이민자를 추방했다. 미국에 무역 흑자를 기록한 나라를 상대로 관세를 부과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지도자가 관례, 관행처럼 따르던 선을 서슴없이 넘나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침없는 언행과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지지 세력과 반지지 세력 모두를 자극했다.

재선에 도전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에게 밀려 낙선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성추문 의혹으로 기소되는 등 송사에 휘말렸다. 지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낙선한 선거를 ‘부정선거’로 단정 짓고 ‘STOP THE STEAL’을 외치며 국회의사당을 점거, 폭동을 일으켰다.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을 대신해 민주당 후보로 나선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을 크게 이겼다. 31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고 전국 득표율에서도 상대 후보를 200만표 차로 따돌렸다. 상·하원 의석수도 공화당이 우세한 상황이라 의회 권력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힘을 싣고 있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각) 열린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은 4년 만에 세계 패권국의 수장으로 다시 올라선 그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평가다. 이날 취임식은 원래 국회의사당 앞 야외 무대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한파로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국회의사당 중앙홀로 장소가 바뀌었다.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600여명, 인근 체육관 ‘캐피털 원 아레나’에 2만여명이 실내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회의사당서 취임식을 진행한 이후 캐피털 원 아레나로 이동해 즉흥 연설을 펼쳤다. 지지자들 앞에서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사용한 펜을 던져주는 ‘쇼맨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캐피털 원 아레나 메인 좌석서 취임식을 지켜본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은 “우아하고 장엄했다. 생동감 넘치는 현장이었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의 공식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김회창 박사(미국 공화당 필승 한인팀 총회장), 박문희 예당미디어 대표, 임주영 중국 목포그룹 대표 등이 함께했다.

유 원장은 지난 1985년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에 현역 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던 바 있다. 당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1년 당선된 뒤 4년 뒤 재임에 성공했다. 유 원장은 그 시기를 “(자신의)정치적 변곡점”이라고 언급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취임식을 앞두고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난 것이다.

공화당 하원의원 직접 초청으로 참석
국내 참석자 중 가장 가까운 메인 좌석

전두환정권의 정치 탄압을 피해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 전 대통령은 3년 만인 1985년 2월 총선을 사흘 앞두고 귀국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미국으로 갔던 유 원장은 워싱턴 D.C.가 아닌 LA로 날아가 김 전 대통령을 만났고, 1985년 1월19일 귀국 기자회견에 배석했다.

그로부터 꼭 40년 만에 유 원장은 대통령 취임식 참석을 위해 다시 미국을 찾았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은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정성이라는 이중고를 겪던 미국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자리였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은 기존의 외교·경제정책을 대대적으로 바꾸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현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40년을 사이에 뒀지만 두 대통령의 취임식은 미국이 세계 패권국가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레이건정부 때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고 트럼프정부는 중국과의 패권 경쟁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당일 현장의 열기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수십만 명의 미국 국민은 행사장인 캐피털 원 아레나에 입장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등 열정을 보였다. 취임식 전날인 지난달 19일 열린 전야제 ‘MAGA 승리(VICTORY)의 랠리’ 역시 대규모 집회를 방불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전야제에 참석해 1시간 동안 즉흥 연설을 선보였다.

유 원장은 “1973년 서울 여의도 집회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연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감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호명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도 아들과 함께 깜짝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의 1등 공신으로 꼽히는 머스크에게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기는 등 신임을 보내고 있다.

유 원장은 “이틀에 걸쳐 진행된 전야제와 취임식 행사는 미국 국민에게 강한 지지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정치 이벤트를 넘어 미국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논의의 장이 됐다고 말하고 싶다. 2기 트럼프 정부에 대한 미국 국민의 기대감이 느껴졌고 전 세계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100여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성별과 인종 등을 고려한 다양성 정책을 폐기하는 행정명령도 포함됐다. 그는 “오늘부로 미국에는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별만 존재한다”고 공언했다. ‘PC(정치적 올바름)’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등 민주당 정부의 정책을 180도 뒤집었다.

40년 전엔
현역으로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 등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통상 전쟁의 막을 열었다. 덴마크의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등을 언급하면서 ‘영토 확장’을 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제국주의로의 회귀냐는 지적도 나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거는 모양새다.

유 원장은 2기 트럼프정부에 기대를 드러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은 여러 측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미국의 경제 회복과 성장에 대한 강력한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1기 정부 때 경제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내 제조업과 일자리 창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대북 정책 역시 트럼프 대통령만의 방식대로 풀어갈 가능성이 크다. 취임식서 본 트럼프 대통령은 굉장히 ‘창의적인 사람’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그걸 추진할 힘을 가진 인물로 봤다. 실제 보기 전까지는 사업가 마인드로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연설을 들어보니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했다”고 평했다.

또 “27세 최연소 대변인을 백악관의 얼굴로 내세우는 등 정부를 조각하는 과정도 이전보다 자신감이 붙었다고 생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중 ‘함께 일한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은 없다(If work together, No dream cannot achieve)’는 구절이 인상 깊었는데, 취임식 과정서 주변 사람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가 환기됐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야제와 취임식 당일 가족은 물론 각료, 주변 인사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유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막내아들인 배런 트럼프를 소개할 때 가장 큰 환호성이 터졌다”고 현장 상황을 언급했다. 배런 트럼프는 트럼프 대통령과 영부인 멜라니아 여사 사이에 낳은 아들이다.


유 원장은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해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 원칙 아래 동맹국과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2기 트럼프정부 출범과 공화당의 재집권은 미국과 한국 모두에 긍정적인 변화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상황
우려 드러내

미국이 세계 패권국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는데, 이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중심축을 담당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 원장은 “굳건한 한미동맹과 일본, 기타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은 아태 지역서의 미국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인 4년 동안 이 같은 방향으로 정책이 유지된다면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여러 변화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한국 상황이다. 4선(11~14대) 국회의원이자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유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미국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개탄스러움을 표했다.

국민의힘 상임고문도 맡고 있는 유 원장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일련의 정치 상황에 대해 국가 원로로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유 원장은 현재 한국의 상황을 ‘무정부 상태’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은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로 구속된 상태고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대에도 올라있다. 국무총리도 탄핵소추돼 직무가 정지됐다. 경제부총리로까지 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이 넘어가 있는 헌정사상 초유의 상황이다.


유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등장은 한국에 전략적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무역 갈등이 역으로 한국에는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할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무역 기회를 창출할 방향으로 상황을 끌고갈 수 있다. 현재의 기회를 잘 활용해 국제 사회서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빨리 정치 안정화를 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실망감이 최고조에 달한 만큼 협치를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는 물론 국민도 반으로 쪼개져 대화와 협력이 사라진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되, 소수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우아하고 장엄한, 생동감 넘쳐”
‘미국 우선주의’ 앞세워 드라이브

유 원장은 ‘이미 많이 늦은 게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이 제일 빠르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정부의 역할이 어려울 경우에는 시민사회단체, 정당, 기업 등이 다각도로 외교전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국회의원 이후 오랜 시간 ‘스포츠맨’으로 살아온 그는 스포츠 외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이 과정서 유 원장은 이동섭 국기원장을 언급했다. 이 원장은 2021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를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태권도 명예 9단증을 수여하고 태권도복을 증정한 인연이 있다. 이 원장은 이번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해 그레이스 멩 뉴욕주 하원의원과 마르크 베세이 텍사스주 하원의원에게 명예 7단증을 수여하는 등 ‘태권도 외교’를 펼쳤다.

유 원장은 “스포츠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다. 스포츠 외교가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 나도 이 원장으로부터 명예 7단증을 받았다. 이번에 다른 일정 때문에 이 원장과 일정을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전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상황서 차기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유 원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의 지도자는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안보와 경제 분야서 협력할 필요가 있다.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고 북핵 문제에 대해 함께 대응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균형 잡힌 외교 전략’을 강조했다.

개헌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유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개헌의 필요성을 느꼈다”면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없다. 높은 확률로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결말에 이르렀다.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1987년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바꿔야 한다. 헌법재판소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인용되면 조기 대선서 ‘원포인트’ 개헌으로, 탄핵안이 기각되면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개헌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권력을 분산하고 견제 장치가 작동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유 원장은 “지난달 17일부터 25일까지 9일 동안 체류하면서 미국의 다양한 정치인, 전문가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시각서 바라본 한미 관계와 미래,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이 고민한 시간이다.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교 전략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각적인 접근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87년 체제
종말 고해

그러면서 “한국은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나라다. 주요 7개국 모임으로 불리는 G7(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20년 동안 정치인으로, 또 스포츠인으로, 야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느낀 것은 결국 국민에게 달렸다는 점이다. 미국 국민이 또다시 트럼프 대통령을 정치권에 불러낸 것처럼 한국 국민도 행동을 통해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최근 2030세대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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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최근 행적이 확인됐다. 지난해 탈옥에 성공한 이후 1년여 만이다. 박씨와 함께 탈옥에 성공했던 인물은 총 3명이다. 이들은 올해 초까지 말레이시아로 여러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박씨는 최근 필리핀 카비테 부근 한 시골 마을로 주거지를 옮겼다. <일요시사>는 지난해 초부터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탈옥 가능성을 제기했다. 외교·수사당국은 현지 담당자가 철저하게 관리 중이라며 ‘소극 행정’으로 대처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꼴이다. 1년이 지난 현재, 박씨는 필리핀 서부 지역 한 시골 마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못 잡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는 필리핀 카마린스 수르 교도소에서 탈옥한 이후 올해 초까지 총 세 차례 이상 말레이시아 사바주로 밀항을 시도했다. 이들이 밀항을 시도한 곳은 필리핀 남서부 잠비앙가와 민다나오 다바오 시티다. 잠비앙가의 경우 여행경보 4단계인 흑색 경보(여행금지) 발령 지역이다. 외교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없이 흑색 경보 지역을 방문·체류하는 경우, 여권법 제26조 등 관련 규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잠비앙가는 우리나라 국민이 여행할 수 없는 곳인 셈이다. 박씨와 송모씨 등 ‘탈옥 멤버’들은 다바오 시티에서 두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잠비앙가로 이동했다. 잠비앙가에서 술루 제도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루 제도로 이동하던 박씨 일당들은 필리핀 반군에 억류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박씨가 밀항을 시도한 잠비앙가를 비롯해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는 이슬람 반군들이 주둔해 있다. 지난해 10월 말에도 무력 충돌이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했다. 당시 민다나오 마긴다나오델수르주의 파갈룽간시에서 필리핀 최대 반군단체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두 지휘관과 수하 병력이 총기와 흉기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70년대부터 분리주의 무장투쟁을 벌여온 MILF는 2014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를 통해 정부가 민다나오섬에 설치한 이슬람 임시 자치정부인 ‘방사모로 과도당국(BTA)’과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지역(BARMM)’ 구성에 참여했다. 잠비앙가·민다나오서 ‘뒷돈 도주’ 시도 이슬람 반군에 억류 후 풀려나 마닐라로 MILF는 2019년 9월부터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무기 반납을 시작했지만, 무장 해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전히 총기를 보유한 MILF 병력은 수천 명 이상이다. 박씨는 반군들에게 마약 및 보이스피싱으로 벌어들인 돈 수천만원을 뇌물로 전달한 이후 풀려났다. 지난 5월 초 박씨는 송씨와 헤어진 후 필리핀 루손섬 카비테주 카비테 시티로 이동했다. 지난달 말에는 카비테 시티 외곽 한 시골 마을에 자신의 현지 부인인 A씨까지 불러 정착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그간 마닐라 타기그에서도 부촌으로 꼽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에 거주했다. 현지인들은 보니파시오를 BGC 또는 글로벌 시티로 부른다. 필리핀의 청담동으로 불릴 만큼 고층 빌딩, 고급 주거지, 쇼핑 거리 등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파시오의 경우 냉장고와 에어컨 정도만 구비돼있는 콘도 한 유닛의 월세가 필리핀 돈으로 13만~15만페소(약 304만~351만원)에 달한다. 필리핀은 주차장도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차장을 포함하면 월세도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더 늘어나게 된다. 같은 도시에 위치한 원룸 형식의 콘도 월세도 5만5000페소(약 128만원)에 달한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경찰도 관련 첩보를 파악해 현지 수사당국과 공조 중이다. 아직 정확한 집 주소나 확실한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이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 넘게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 왔다. 수억 비트코인에 차명 주택 부동산 소유 현지 부인이 조력해 “지속적 현금 조달” 특히,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게 “박씨가 마닐라에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하고 있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했다. 국내 정보기관은 박씨 일당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2023년 12월과 지난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교정당국에 박씨의 탈옥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박씨가 탈옥한 것을 두고 필리핀 교정당국은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외교부와 경찰, 법무부 국제형사과 등이 일부 파견을 가 현지에서 한국 범죄자들을 관리하는데, 공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와 면담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그저 공문만 보내는 것으로는 범죄자들의 탈옥을 막을 수 없다. 당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안 잡나 박씨는 A씨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교도소의 취약점을 파악해 탈옥을 계획했다. 사전에 철저히 ‘탈옥 계획’을 구상하고 보안이 허술한 교도소에 잡혔단 뜻이다. 말레이시아로의 밀항 준비도 A씨가 현금 조달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박씨가 교도소에서부터 환전한 수억원 이상의 비트코인을 관리해 왔다. 박씨와 같은 교도소에 있었던 한 제보자는 “환전한 비트코인 외에도 A씨가 박씨의 차명 소유 자택 부동산 등 수십억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