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최순실 게이트> ③검찰이 풀어야 할 난제

  • 신승훈 기자 shs@ilyosisa.co.kr
  • 등록 2016.11.08 09:09:12
  • 호수 10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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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국민이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일요시사 정치팀] 신승훈 기자 = ‘최순실 게이트’의 공이 드디어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성역 없는 수사를 공언하면서 대통령을 수사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땅에 떨어진 검찰 신뢰는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일요시사>는 비선실세 의혹 규명의 칼을 쥔 검찰의 대국민 숙제를 살펴봤다.

검찰은 청와대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를 지난달 31일, 긴급체포했다. 검찰은 “최씨가 각종 혐의에 대해 부인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며 “이미 국외로 도피한 사실이 있는 데다 도망의 우려가 있어 긴급체포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씨가 극도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표출하는 등 예기치 못한 문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최대한 약하게
봐주기 속셈?

체포된 최순실씨에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사기미수 등이다. 검찰 수사 지휘부는 이날 영장 청구 직전까지 적용 혐의를 놓고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진다.

검찰은 최순실씨가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해 16개 대기업으로부터 774억원을 강제 모금하고, K스포츠재단을 통해 45억원을 출연한 롯데그룹을 압박 70억원을 추가로 받아낸 혐의를 집중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또 최씨의 개인회사인 ‘더블루K’가 연구용역 수행이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K스포츠재단에 7억원의 용역을 제안한 점을 들어 사기미수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 관계자는 “직권남용은 수사 실무에선 가장 나중에 고려하는 죄목”이라며 “현재로써는 구속영장을 받기 위해 직권남용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겠지만, 수사가 초기인 만큼 앞으로 혐의가 바뀌거나 추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최순실씨와 함께 재단 출연금을 강제 모금했다는 의혹을 받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비서관도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해 지난 2일 긴급체포했다. 수사본부는 “주요 혐의에 대해 범행을 부인하고, 출석 전 핵심 참고인들에게 허위 진술을 요구했다”며 체포 사유를 밝혔다.

또 “최순실씨에 구속영장이 청구된 점을 고려할 때 정범인 피의자를 체포하지 않을 경우 증거 인멸의 우려가 높다”고 설명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안종범 게이트’로 축소하는 일종의 꼬리자르기가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본격 수사 착수…석연찮은 온정 수사
‘의문의 31시간’ 검이 비상구 터줬나

검찰은 최씨가 안 전 수석에게 직권남용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관행적으로 직권남용은 교사범이 아닌 공모공동정범을 적용하기 때문에 ‘직권남용 공범’이라는 혐의로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다. 이 과정서 안 전 수석이 “미르·K스포츠재단 일은 대통령의 지시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박 대통령 수사가 불가피해 보였다.

하지만 최씨의 구속영장 청구 혐의에는 박 대통령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다. 문제는 이렇게 흘러갈 경우 박 대통령에게는 아무런 혐의도 적용할 수 없게 돼 자연스럽게 꼬리자르기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씨가 검찰에 출두하기 전까지 검찰은 수사를 차일피일 미뤄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지난 9월29일 시민단체가 최순실 의혹을 검찰에 고발하고 각종 의혹과 관련 증거가 나오는 상황에서조차 검찰은 수사속도를 내지 않았다. 재단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과 자금 추적조차 없었다.


지난달 20일 박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불법행위가 있으면 엄정 처벌하라”는 발언이 나온 후에야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검찰이 청와대의 ‘명’만 기다린 셈이다. 결국 최씨가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충분히 벌어줬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게다가 지난달 31일 귀국한 최씨는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이유로 하루 동안 검찰 출석을 미뤘다. 귀국부터 출석까지 31시간 동안 최씨는 은행을 방문해 현금을 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출두를 앞둔 31시간 동안 최씨는 관련자들과 말을 맞추고 증거인멸을 시도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최씨가 자유롭게 현금을 출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검찰이 최씨의 계좌를 압수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의혹의 중심인 최씨는 배제한 채 차인택씨의 법인 및 계좌만 압수수색했다.

야당은 최씨를 31시간 동안 풀어준 검찰을 비판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지난 1일 “31시간은 어떤 말을 맞추고 증거인멸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며 “검찰은 최순실씨가 31시간 동안 어디서 누구와 왜 무엇을 했는지 철저히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두고두고 검찰 수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수석대변인은 “검찰의 석연치 않은 온정을 보며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 최씨가 저지른 국정농단의 전모를 밝혀낼 수 있을지 국민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며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은 의혹들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빙산의 일각이다. 검찰수사는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고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공항서 안잡고…
청 수사하나?

검찰이 최씨과 안 전 수석을 체포하면서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과연 성역 없는 수사를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법조계에서도 "최씨의 국정농단을 수사한다는 검찰이 아직도 주변만 맴돌고 있다”는 불만이 나온다.

최씨의 국정문건 유출 부분에 해당하는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혐의를 적용치 않은 부분도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문건유출과 관련한 최씨의 혐의 일부를 시인하고 대국민 사과를 한 상태인 만큼 공무상 비밀누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검찰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최씨에 대한 공무상 비밀누설죄 적용이 대통령 수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검찰이 미적대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씨에게 공무상 비밀누설죄를 특정할 경우 박 대통령 등 청와대 관계자들의 범죄 혐의가 특정되기 때문이다.

공무상 비밀누설죄는 ‘공무원이나 공무원이었던 사람‘이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최씨가 직접 혐의 당사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안 전 수석 등의 공무기밀 누설 행위에 최씨가 공조했다는 점이 밝혀지면 공범 혹은 교사범 등으로 규율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검찰이 이번 의혹 최정점에 있는 박 대통령을 겨눌 수 있을 지의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상황이다. 앞서 검찰은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거부하자 이틀간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청와대는 지난달 30일 검찰이 다시 압수수색을 하자 7상자 분량의 자료를 임의제출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지난달 31일 “지난달 30일 청와대로부터 상자 7개 분량의 압수물을 임의 제출받았다”며 “향후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임의제출 방식으로 더 건네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특검으로 갔다간…
청와대 조사 딜레마

이 자료에는 미르·K스포츠재단 관련 서류와 최순실씨 관련 자료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민변은 박근혜정부의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에 청와대 압수수색 재개를 촉구했다.

민변은 지난 1일 성명을 통해 “청와대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것은 국민적 공분에 맞서 증거를 인멸하고 진실을 감추려는 추악한 시도의 일환”이라며 “형사소송법 취지와 문언에 합당하게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을 재개할 것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민변은 청와대가 형사소송법 제110조와 111조를 방패삼아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것은 진실 은폐라는 시각이다.

검찰이 최씨와 안 전 수석을 수사 중인 만큼 정치권에선 검찰의 대통령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지난 3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서 “국민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선 박 대통령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하고 검찰수사를 받는 것이 선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대변인도 “박 대통령까지 포함하는 성역 없는 특검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서도 비박계 중진들을 중심으로 박 대통령에 직접 수사 수용을 요청하고 있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모든 진실을 국민 앞에 그대로 밝히고 사죄드리고, 특검이든 검찰이든 모든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자청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국민이 원한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의 청와대 수사를 촉구하는 분위기에 대해 청와대 한 관계자는 “검찰수사 상황을 보고 그때 가서 생각할 것”이라며 조사에 응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동안 ‘대통령은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던 김현웅 법무부장관도 “수사진행에 따라 박 대통령 수사 필요성을 건의하겠다”고 말해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 수사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검찰의 의지와 법해석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다만 현직 대통령의 재직중 형사상 불소추 특권을 규정한 헌법 제84조에 의거, 수사가 가능한 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또 현직 대통령을 수사한 전례 등 종합적 검토도 불가피하다.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어느 선까지 수사를 해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검찰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 신뢰
회복 방법은?

검찰이 본격적으로 비선실세 의혹에 들어갔지만 특검을 구성치 않은 검찰이 독립적으로 수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했다.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는 일반적으로 특수부에 배당하는데, 이는 이번 사건을 형사부가 맡을 경우 수사 의지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행보다.

검찰이 특수부 체제로 ‘얼마나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가 숙제다. 일각에선 성역 없는 수사만이 ‘봐주기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특수부가 독립적으로 수사해 검찰총장에게 수사결과만을 보고토록 해 외압 없는 수사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같이 검찰 수사와는 별도로 야3당이 특검을 주장하고 있어 검찰의 입장은 다소 난처해진 상황이다.

야3당 원내대표들은 지난 1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해 국회 국정조사와 특검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들은 여야 합의로 추천한 특별검사 후보 1명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별도 특검’을 요구했다.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여야가 추천한 특검 후보 2명 중 대통령이 1명을 임명하는 ‘상설특검’으로는 의혹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원내대변인은 “짜맞추기와 은폐 부분들에 대한 국민적 의혹이 상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별법에 의한 별도 특검만이 국민적 요구에 화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며 정부와 검찰을 동시에 압박했다.

이 같은 야권의 압박에 검찰은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이 계속해서 특검 카드를 고수할 경우 20명에 달하는 참고인 소환과 더불어 특수부 설치까지 한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 고위 관계자는 “무조건 특검으로 간다고 해서 더 나은 수사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며 “수사 능력은 검찰이 더 나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검이 도입되면 ‘봐주기 수사’ ‘정권 거수기’라는 비판 외에 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여론이 커질 가능성도 점쳐져 검찰이 난데없는 개혁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다. 법조계서도 최순실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신뢰를 잃어버린 검찰의 ‘마지막 기회’라며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전직 검찰 관계자는 “처음부터 특수부에 맡겨서 했어야지 형사부에 보냈다가 지금 와서 인원을 늘리고 하면 누가 검찰을 신뢰하겠나”라며 “요즘은 검찰이 100점짜리 수사를 해도 신뢰를 안 하는 판인데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꼬리 자르기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그는 “검찰이 최순실 개인 비리로 이 문제를 잘라버리면 검찰은 문 닫아야 된다”며 “재단 설립에 연루된 청와대 관계자가 있을 수 있고, 연설문과 관련해서도 있을 수 있다. 청와대도 사활을 걸겠지만 검찰이 거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기회
“마음 비워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한 방송서 “최재경 민정수석 아래서 검찰이 최순실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는 질문에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마음을 비우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검사들이 쥔 칼자루는 법을 우습게 알고 제멋대로 날뛰는 놈들을 죽이라고 국민이 빌려준 것”이라며 “마지막 기회다. 최순실 사건을 제대로 하라”고 당부했다.
 

<shs@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더민주가 본 검찰개혁은?

더민주 추미애 대표는 지난달 14일 국회서 “정치검찰의 타락을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다”며 “민주당을 가볍게 보지 말라. 검찰을 근본적으로 재수술할 때”라고 검찰개혁에 운을 띄웠다.

실제로 더민주는 고위공직자와 그 가족의 범죄행위에 대한 수사를 관장하기 위해 독립기구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두는 내용의 공수처법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독점주의를 일부 제한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더민주 백혜련 의원은 “공수처 법안이 가장 중요한데 여러 현안에 묻혀 있었는데 이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며 “국회에 검찰 개혁 특위를 강력하게 띄워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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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