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시간. 사람들은 해무가 잔뜩 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해를 기다리던 이들은 예정된 일출 시간이 넘어가자 하나둘씩 사라졌다. “오늘은(해를) 안 보여 주시려나 보네.” 아쉬움 섞인 한탄과 함께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어, 어!” 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짙은 안개를 뚫고 해가 삐져나왔다. “향일암으로 가주세요.” 여수EXPO역에 도착한 시간은 지난달 10일 오후 6시30분. 따뜻한 기온 때문인지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 잡은 택시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향일암으로 가는 길은 굽이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굴곡졌다. 40여분을 내달려 향일암 입구에 내렸을 때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바다와 접한 산속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금오산 향일암. 신라 선덕여왕 때인 644년 원효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현재의 관음전 자리에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금오암, 책육암, 영구암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1949년 편찬된 <여수지>에는 ‘100년 전에 지금 이곳으로 옮겨 건축하고 기해년에 이름을 향일암으로 바꿨다. 암자가 바위 끝에
[기사 전문]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70세쯤 된 노인이 장애가 있는 자녀랑... 딸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노인도 여성이었어요. 같이 사시는데 이분이 술을 많이 드셔요. 동네에서는 소문난 알코올중독자 정도 되는, 술 취하면 길바닥에 쓰러져 주무시기도 하는 그런 전력이 있는 분이신데, 어느 날 아침에 이웃 주민이 가서 보니까 집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고, 경찰에 신고가 됐어요. 근데 같이 자녀는 장애가 있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판단을 못하는 그런 사정이 있었죠. 시체가 부검실에 왔고 외표 검사를 하는데 뭔가 치골 부위와 골반 부위가 언밸런스, 뭔가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 모양을 보고 ‘이상하다, 이게 왜 이러지?’라고 절개했더니 골반골 골절이 나왔어요. 사건을 의뢰한 담당 수사관에게 “골반골이 부러질 정도라면 교통사고가 1번이다” 그랬더니 담당자가 대답하시는 말씀이 “돌아가신 분이 사시는 그 동네는 이면도로 골목길 안쪽이라 차가 다닐 수 없는 곳이다. 그러니 어디서 교통사고가 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곳”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아니라면 추락 정도가 돼야 하는데, 그러면 추락은 어떤가” 했더니 옛날 주택들이 많아서 이
[기사 전문] 진행자: 혹시 여러분은 이웃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가요? 홀로 임종을 맞은 뒤 일정 기간 후에 발견되는 죽음인 ‘고독사’. 우리나라의 고독사 사망자는 2019년 659명에서 2021년 953명으로,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즉 사회의 음지에서 일어나는 소외된 죽음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죠. 특수청소업체 ‘바이오해저드’를 운영하는 유품정리사 김새별씨가 그 현장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김새별(유품정리사): 쉰 아홉 살 드신 남성 분이 고시텔에서 이렇게 돌아가셨어요. 근데 사실 그 나이쯤 되고 그러면 직장 구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대부분 하시는 일이 청소용역 또는 경비용역. 결국은 이제 회사에서 나오게 되셔서 일이 없으니까, 고시텔에서 본인이 갖고 있는 돈으로... 최소한의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데만 집중을 하셨더라고요. 근데 제가 볼 때는 약주 이런 걸 드시지는 않았는데 굶어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아사죠. 많지는 않은데 더러 있어요. 전체적인 통계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느낄 때 40~50대 중장년층의 고독사가 한 70% 정도 되고, 20%가 청년들의 극단적 선택. 한 10%가 노인 고독사죠. 예전에는 독거노인이라 그랬잖아요. 가족이
[기사 전문] 김윤신 교수(조선대학교 법의학교실): 당장 떠오르는 게 전라남도 어느 작은 군이에요. 그 집에 아이가 하나 있는데 무슨 잘못을 해서 소년원에 갔다가 이제 출소를 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아이 밥을 먹인다고 나갔다가 들어와서 잤는데, 엄마가 그날 하필 사망하신 거예요. 경찰은 아마 (사망자가)늘 알코올에 취해 있었고, 그러니까 “술 관련해서 사망한 것 같다”며 부검을 안 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근데 그 서의 수사과장님인지 형사과장님인지 제가 잘 아는 분이셨어요. 굉장히 사건에 대한 의욕과 열의가 있는 분이셔요. 그분이 그 서에 과장으로 계시면서 크게 나무라셨어요, 젊은 형사들을. “사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살인 사건에 준하는 것으로 처리하라고 내가 그렇게 당부했는데 왜 이런 사건을 부검 안 하려고 하느냐. 당장 부검 지시 올려라”라고 해서 부검 지휘를 올렸고 법원 영장을 받아서 부검을 하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복강 내 출혈이 치명상에 이를 정도로 다량이 나오고, 출혈의 원인은 장간막 파열이었어요. 술 취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누군가가 발로 배를 밟으면 딱 찢어지는 데가 거기입니다. 이 과장님은 벌써 딱 파악을 하셔요. “두 남자 중의 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스님의 거침없는 독경과 달리 제단으로 향하는 이들의 걸음은 주춤거렸다. 국화꽃을 놓고 물 한 잔을 올리는 손길도 조심스러웠다. 재배를 올리고 돌아서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제단을 바라보는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라는 청아한 소리 너머로 나비가 날아들었다. 죽다, 숨지다, 사망하다, 운명하다, 별세하다, 서거하다, 타계하다, 작고하다, 그리고 처리되다. 무연고 사망자는 처리의 대상이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사법) 제12조는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연고 시신 등을 처리한 때에는’ ‘처리 방법 등에 관해’ ‘처리하는 경우’ 등의 표현이 눈에 띈다. 늘어나는 무연고자 사단법인 나눔과나눔은 애도할 권리와 애도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다. 서울시와 업무협약을 맺고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지원한다. 공영장례는 사체의 안치부터 염습·입관, 화장 후 봉안까지의 절차뿐 아니라 고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유족과 지인 등이 고인을 애도할 수 있도록 공공이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의식을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2018년 3월22일 서울시에서 ‘서울특별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국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적게 태어나고 많이 죽는 ‘자연 감소’ 상태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 정부는 물론 국민의 관심은 오로지 ‘탄생’에 쏠려 있다. 분기별 출산율에 한탄하고 OECD 순위를 걱정한다. 그 사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출산율과 반비례해 사망자 수는 빠르게 늘고 있다. 탄생은 국가의 영역으로 들어온 반면, 죽음은 여전히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애초에 죽음에는 차별이 있는 거지. 왜 죽음이 공평하나? 모든 죽음이 형태가 다 다르고 그 모양새가 다른데. 누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이 죽으면 평등하다’ 여기서 모티브가 된 것 같은데, 죽으면 숨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동등한 게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어요?” <강신몽 가톨릭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명예교수> 인구 감소 데드크로스 지난 9월16일 경기 일산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만난 백발의 노 법의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의문을 표했다. ‘죽음의 격차’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진심으로 궁금한 모습이었다. 평생 법의학자로 살면서 다양한 사체를 마주해온 강 명예교수에겐 ‘사람의 죽음에는 격차가 있다’는 말이 너무나 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 법의학자는 ‘죽음의 격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흔해서 격차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했을 수도 있다. 부검대 위에 올라오는 사체 자체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던 이들일 수 있으니…. 니시오 하지메 일본 효고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주임교수는 저서 <죽음의 격차>에서 “법의학 현장에 있다 보면 ‘도시의 일상 공간에서 발생하는 동사’는 결코 진기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집에서도 사람이 얼어 죽는다. 에어컨이 없는 경우 집에서 열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한다. 2020년 기준 저소득층의 에어컨 보급률은 0.18대에 불과하다. 마지막까지 외면당한다 니시오 교수는 “책 출간 제안을 받고 과거 부검 사례를 되돌아보니 지금까지 부검해온 사람이 대체로 사회적 약자의 위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니시오 교수에 따르면 효고의대 법의학교실에서 부검한 전체 사체의 약 50%가 독거자이고 약 20%가 생활보호수급자(한국의 기초생활수급자), 10%가량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신원 미상의 사체는 전체의 10%에 달했다. 그는 “이 숫자를 보는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의학을 하려는 ‘미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데 법의학에 미래가 있을까요?” “현재 법의학자는 ‘사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책임만 주어진 전문가’에 불과합니다.” 권한은 없고 처우가 부족하다. 법의학자가 입을 모아 말하는 한국 법의학계의 현실이다. 희소성으로만 따지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직업이다. 한국의 법의학자는 전국을 통틀어 70명이 채 안 된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하다. 치아로 사체의 신원을 파악하는 법치의학자는 전국에 7명, 뼈를 통해 개인을 식별하는 법인류학자는 전국에 단 3명뿐이다. 권한·처우↓ 할 사람 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법의관은 수년째 30명대에 머물러 있다. 심지어 내년에는 충원율 ‘제로(0)’다. 대한법의학회가 연구한 <법의학 전문 감정 연구 인력 인재 양성 방안 연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에서 활동 중인 법의학자 수는 63명. 국과수 30명, 국방부과학수사연구소 2명, 대학 15명, 개원의 10명, 은퇴 후 촉탁부검의 6명 등이다. 절반가량(44%)이 서울에서 근무 중이다. 제주도에는 법의학자가 1명뿐이다. 이 중 사법
포천 호국로를 달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정겨운 농촌 풍경. 풍경 속 비닐하우스에는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월세 15만원. 장판 없는 흙바닥. 지난 2020년 겨울 한파 속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사망해 여론의 관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인권은 참혹했다. 아무도 이들에게 강제로 비닐하우스에 살라고 하지 않았다. ‘고용허가제’가 그들을 비닐하우스로 향하게 했을 뿐이다. 겨울을 앞두고 어두운 농촌 풍경 속 비닐하우스에 불빛이 홀로 반짝이고 있다. 글·사진=고성준 기자 joonko1@ilyosisa.co.kr < joonko1@ilyosisa.co.kr> 죽음에도 격차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살면서 격차를 느낀다면 극복할 방법이라도 고민할 수 있겠지만, 죽음에도 격차가 있다면 망연자실할 것이다. 우리 주변엔 죽어서도 격차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무연고자’. 가족도 없고 주소·신분·직업 등을 알 수 없는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 어디선가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사람. 한 번쯤은 그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글·사진=박성원 기자 psw@ilyosisa.co.kr <psw@ilyosisa.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존엄성’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변화 요구다. 전문가에게 권한을 주자는 당연한 주장도 따른다. 20여년 동안 모두 7번 발의된 검시제도 관련 법안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미 6번을 주저앉았다. 7번째 발의자인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만났다. 2006년 11월24일 유시민 의원(열린우리당)이 대표 발의한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안’을 안건으로 ‘검시제도의 개선에 관한 공청회’가 열렸다. 당시 김희수 변호사가 법학계 측 진술인으로 나섰다. 14년 뒤인 2020년 7월16일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주최한 ‘검시관 제도 도입을 위한 토론회’에도 김희수 변호사가 좌장으로 등장했다. 억울한 죽음 같은 사람이 14년의 세월을 거슬러 같은 주제의 자리에 등장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기간 동안 관련 주제에 대한 논의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법의학 소재의 드라마 <싸인>이 방송(2011년)됐고, 2014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노숙자 오인 사건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법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20년째 제자리걸음이다. 그 사이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했다. 사실상 퇴보한 셈이다. 거듭된 희망고문은 조직 구성원의 사기를 꺾는 데 일조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제도는 사회적 비용으로 치환돼 국민에게 전가될 예정이다. 김장한 대한법의학회 회장은 “법의학이 망하나요, 국가 기능이 문제죠”라고 한탄했다. 사실 지칠 법도 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검시제도와 관련된 법안이 처음 발의됐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수습 과정에서 법의학의 중요성이 부각된 이후 시작된 ‘희망고문’이다. 20여년 가까이 지났지만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변화는 요원하고 현실은 열악해졌다. 지난 7월26일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에서 김장한 대한법의학회 회장을 만났다. 중심 못 되고 김 회장은 시종일관 ‘제도와 권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의 검시제도가 표면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법의학자가 해야 할 역할이 100이라면 현재 주어진 권한이 50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권한과 의무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 “먹고사는 문제가 정리되면 죽음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한국 법의학계를 옭아매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20여년째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제도로 들어가면 ‘주변인’에 불과한 신세다. 과학수사의 중심이라고 치켜세우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결국 ‘마이너’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 법의학계의 딜레마, 인력 충원이냐 아니면 제도 개선이냐. 죽음의 순간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에 따라 후속 절차가 달라진다. 병원에서 사망하면 대개 병사로 처리된다. 병사일 경우 의사가 사망진단서를 발급하면 곧바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 반면 변사는 절차가 복잡하다. 먼저 경찰이 개입하고 필요하면 검찰과 법원이, 더 나아가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이 등장한다. 변사 처리 허점 있다 경찰청 훈령 ‘변사사건 처리규칙’에는 변사를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죽음’이라 정의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범죄와 관련됐거나 범죄가 의심되는 사망 ▲자연재해·교통사고·안전사고·산업재해·화재·익사 등 사고상 사망 ▲극단적 선택이나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의심이 드는 사망 ▲연행·구금·신문 등 법 집행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 ▲보건·복지·요양 관련 집단 수용시설에서 발생한 사망 ▲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의학자는 ‘공식적으로’ 사체를 만나는 사람이다. 법의학자의 사명은 사체가 하는 말을 듣고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 실체적 진실과 과학적 진실. 한국 사회에서 진실은 대체로 전자에 머무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적 진실에 닿으려는 법의학자의 노력은 오랜 시간 제자리걸음이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놓지 못했다.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어 속을 태운 게 38년이다. 생의 절반을 아들의 사인 규명을 위해 살았다. 그동안 진실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가공됐다. 유일한 진실은 아버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허 일병 사건’ 아버지 허영춘씨의 이야기다. 사인 규명 국가 책무 1984년 4월2일 강원 화천군 육군 7사단에 복무하던 허 일병이 가슴에 2발, 머리에 1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허 일병의 사인을 두고 군 수사기관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진상위)의 조사 결과가 엇갈렸다. 군 수사기관은 극단적 선택, 의문사진상위는 타살로 판단했다. 법원의 판단도 엇갈렸다. 2007년 허 일병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은 타살, 서울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일할 때는 ‘우리 직원’이지만 사고가 나면 ‘남의 나라 사람’이 된다. 없으면 현장이 마비될 정도로 의존도가 높지만 막상 드러날라 치면 내쫓아 버리기 일쑤다.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이주노동자는 먼 타국 땅에서 소리도 없이 스러져 차가운 부검대 위에 오른다. 2020년 12월20일 경기도 포천의 한 농장 기숙사에서 캄보디아 여성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속헹씨가 머물던 비닐하우스 숙소는 난방이 가동되지 않아 영하 16도의 강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였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인 김달성 목사는 당시 속헹씨의 사인을 ‘동사(저체온증)’로 추정했다. 타국서 쓸쓸하게 속헹씨는 2016년 4월 비전문취업(E9) 비자로 한국에 입국해 포천의 채소농장에서 4년 넘게 일했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비전문취업 비자를 받은 이주노동자는 최장 4년10개월까지 일할 수 있다. 속헹씨는 지난해 1월 프놈펜(캄보디아의 도시)으로 출국하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 대신 부검대에 올랐다. 변사사건이 일어났을 때 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은 검사에 있다(형사소송법 제222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사망 장소·사망의 원인·사망의 종류. 한 사람의 삶이 종이 한 장으로 갈음된다. 이 종이에 적힌 내용으로 죽음 이후의 상황이 엇갈린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으로, 누군가는 부검대로. 고인의 마지막 숨이 남은 현장에는 종이 너머의 삶이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과 경찰청은 2015년 3월1일부터 2021년 3월31일까지 6년1개월 동안 서울 강서‧양천‧구로와 경기 부천 지역에서 현장검안 사업을 운영했다. 교통사고를 제외한 모든 변사사건에 법의관이 직접 출동해 검안업무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일요시사>가 총 1만279건의 현장검안 출동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했다. 남녀노소 마감한 삶 #1. 새해 첫날.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날에 누군가는 스스로 생명의 빛을 꺼뜨렸다. 2018년 1월1일 서울 구로에서 50대 남성이 화장실에서 목을 매 사망했다. 다음해 1월1일에도 집에서 목을 매 사망한 50대 남성이 발견됐다. 그는 평소 술을 마시고 자주 죽는다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2. 추석 연휴. 2015년 추석 연휴(26~28일) 동안 남성 3명이 각각 양천(70대), 강서(60대, 70대)에서 목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변고로 사망한 고인의 첫 번째 조문객이자 마지막 관찰자였다. 현장 구석구석에 짙게 눌러 붙은 죽음의 흔적으로 고인의 마지막 숨을 살폈다. 6년1개월, 2223일의 기록을 <일요시사>가 단독으로 입수했다. 한국 법의학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을 뽑을 때 ▲대구 지하철 참사(2003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노숙자 오인 사건(2014년) ▲충북 증평 사건(2016년)은 빠지지 않는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대외적으로 한국 법의학의 수준을 알렸다는 점에서, 뒤의 두 사건은 현행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손꼽힌다. 병사 관행 화 불렀다 2014년 6월12일 전남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반백골화된 변사체가 발견됐다. 사체는 육안으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상태였다. 경찰은 사체 발견 직후 무연고자로 판단, 순천 지역의 촉탁의를 통해 부검을 진행했다. 부검을 진행해도 사인이 나오지 않자 경찰은 단순 노숙자 변사사건으로 판단했다. 문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에서 사체의 대퇴부뼈와 머리카락으로 유전자 감정을 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엄마 배속에 있던 기간을 인생의 예고편이라 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본편, 죽음 이후는 후일담 정도로 여기면 될까. 영화마다 주제와 구성, 그리고 배경이 모두 다르듯 저마다의 인생은 ‘나’라는 감독이자 주연의 의도에 따라 흘러간다. 다만 결말은 똑같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지난해 31만7680명이 사망했다. 하루 평균 870명이 세상을 떠났다. 사망자 수만큼 각기 다른 죽음이 있다. 누군가는 병원에서 가족의 애도를 마지막 자장가 삼아 세상을 떠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차디찬 집에서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스러져 간다. 한참 뒤에야 발견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다른 죽음 애도의 격차 죽음의 순간을 제외하면 모든 순간 ‘차이’는 존재한다. 특히 삶의 빈부격차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빈부격차로 이어진다. 한정란 한서대 보건상담복지학과 교수는 “살아 있을 때 월급 차이가 200만원 정도였다면 사망할 때쯤엔 그 격차가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격차는 죽음 뒤에 오히려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삶의 빈부격차를 나타낼 때 ‘균등화 처분 가능 소득 5분위 배율’을 주로 사용한다. 소득 상위20%의 평균소득을 소득 하위20%의 평균
‘지령 1400호’를 맞은 <일요시사>가 지난 8월부터 4개월에 걸쳐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이번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프로젝트는 설문조사,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기록, 국과수의 2223일간 현장검안 출동기록(최초 공개),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부검률(최초 공개), 국과수 법의학부 양경무 부장 및 김장한 대한법의학회장 인터뷰, 열악한 국내 법의학계의 현실 등에 대한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빈부격차 및 소득수준에 따른 전국의 지역별 기대수명 차이, 가난한 죽음이 남긴 숙제와 이를 풀어야 할 주체, 국회 차원의 검시제도 법안의 과거와 현재, 무연고 사망 등 소외된 자들의 외로운 죽음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아래는 글 싣는 순서입니다(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기사로 이동합니다). <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①1016명에 물었다 <2022 일요시사 대기획> 법의학으로 본 죽음의 격차 ②국과수 2223일 기록 최초 공개 <2022 일요시사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법원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던져준 지 2년이 돼간다. 항소심에서는 여전히 1심처럼 5명도 되지 않는 공판 담당 검사가 10명이 넘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상대하고 있다. 검찰의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황이 뒤집힐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가습기살균제 광고기사를 심사에서 제외한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SK케미칼과 애경은 그간 일부 가습기살균제 원료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광고해왔으나 공정위는 해당 광고기사들에 대해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원들은 가습기살균제의 제조 및 판매와 관련해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됐으나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근거가 밝혀진 바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주요 임원들 전원 면죄부 그러나 지난달 말 공정거래위원회의 SK케미칼 무혐의 처분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오면서 가해기업 유죄 입증이 수월해졌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검찰은 1심에서 SK케미칼과 애경의 혐의 입증에 실패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세월호·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 활동이 지난 6월 마침표를 찍었다. 작은 성과가 있었으나 피해자와 유족의 눈높이에 맞는 결과물을 내놓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참위 가습기살균제 사건 진상규명 소위원회가 4년 가까이 조사해온 결과물을 입수한 <일요시사>는 공정거래위원회와 SK케미칼 간의 유착 의혹에 대해 알아봤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공정거래위원회가 가해기업들 중 SK케미칼에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가습기살균제 원료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과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을 만들었음에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공정위는 SK케미칼에 대해 무혐의라는 면죄부를 던져줬다. 전관 미팅에… 조사 않고 무혐의 공정위는 2011년 9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신고로 제조·판매업체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처음 조사 대상이 된 기업은 애경산업과 이마트다. 이들 기업은 CMIT·MIT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메이트, 이플러스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사업자였으나 2012년 2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