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관왕 등극 위업 달성,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기록 천식 앓던 약골 소년에서 수영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마린보이 박태환이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남자 수영에서 3관왕을 달성하는 쾌거를 누렸다. 세차게 물속을 가르던 그의 모습은 ‘물 만난 고기’라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로마세계선수권 대회에서의 부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베이징올림픽 당시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모습이다. 마린보이에서 이제 ‘마린가이’로 우리 곁에 돌아온 박태환. 그의 진화에 주목해봤다. 마린보이 박태환이 지난 14일 광저우 아오티 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남자 자유형 200m 결선에서 아시아 신기록인 1분44초80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지난 16일 열린 자유형 400m에서도 자신의 최고 기록을 갱신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 세운 당시 아시아 신기록(3분41초 86)을 0.33초 줄였고, 지난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열린 팬퍼시픽(범태평양)선수권대회 때 기록한 올해 이 부문 세계 1위 기록(3분44초73)도 갈아치웠다. ‘최고’ 되기까지 숱
최초 대기업을 덮치는 듯 했던 사정 바람이 돌연 진로를 바꿔 정치권에 불어 닥쳤다. 난데없는 급습에 정치권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검찰과 일전을 불사할 기세다. 이례적으로 여야가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이들이 치켜든 총부리가 향한 곳은 바로 김준규 검찰총장. 태풍의 핵에 서있는 그의 신상을 파헤쳐 봤다. 검찰 내에서 최고 ‘국제통’ ‘기획통’으로 꼽혀 검찰 급습에 정치권 ‘발끈’…탄핵론까지 제기 서울서부지검의 한화·태광그룹 수사, 대검 중수부의 C&그룹 비리수사로 이어져온 사정 바람이 갈수록 세력을 키워가는 가운데 이번엔 정치권 한복판에 불어 닥쳤다. 그 태풍의 핵에는 김준규 검찰총장이 있다. 사정 바람 정치권 급습 그는 검찰 내에서 최고의 ‘국제통’ ‘기획통’으로 꼽힌다. 김 총장이 국제통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1994년 주미대사관 법무협력관, 1998년 법무부 국제법무과장을 지내면서부터다. 이때 외교관 경험과 국제적 감각을 갖췄으며, 영어 구사력면에서 검찰 내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았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대학시절 이명박 대통령 만나 40년 끈끈한 우정 대선 전까지 이 대통령의 숨은 조력자로 맹활약 ‘박연차 게이트’에서 최근의 대우조선해양 로비 의혹까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래 각종 게이트와 의혹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바로 그다. 천 회장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일요시사>가 파헤쳐봤다.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절친(절친한 친구)’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산 출신인 천 회장은 이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 동기다. 재학 당시 농촌 봉사활동 동아리 한농회 회장을 지내며 당시 상과대 학생회장이던 이 대통령과 처음 만났고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이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시위 등에 함께 참여하며 끈끈한 연을 맺었고 40여년간 친분을 이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천 회장은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을 지낼 때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기도 했다. 대선 전까지는 천 회장은 이 대통령의 숨은 조력자였다. 이 대통령의 싱크탱크였던 국제전략연구원(GSI) 이사로 활동하며 매달 후원금을 냈다. 이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엔 본격적으로 뛰어들
한때 한 기업의 정점에서 검찰의 타깃으로 전락하게 된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과 임병석 C&그룹 회장. 성격부터 태생까지 닮은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 말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검찰의 칼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된 두 사람을 <일요시사>가 전격 비교해봤다. 이회장, 은둔형…임 회장, 꼼꼼하고 치밀 태생 좋은 이 회장…자수성가형 임 회장 태광그룹과 C&그룹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사건의 중심에 서있는 두 그룹의 회장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이들의 성격부터 인생의 굴곡 고비고비를 낱낱이 들여다봤다. #성격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은둔형 오너’로 불린다. 그는 평소 남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 동기 중에서도 그를 뚜렷이 기억하거나 활발히 교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조용한 성격답게 술도 잘 마시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 일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들 중에도 이 회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회장은 전경련 회의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공식석상에 얼
부안군, 새만금사업 중심도시로 성장 노력 대형숙박시설 확충·관광 인프라 구축 나서 민선 4기인 지난 2008년 12월19일 군수에 당선된 이후 2년 반의 임기동안 군민화합을 군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군민의 역량을 한데 모아 그동안 침체되었던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김호수 군수를 만나 앞으로 조성될 군정방향을 들어봤다. <편집자 주> - 지난 임기 동안의 성과와 앞으로 역점을 두고 추진할 사업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새만금 1호방조제 도로높임 공사착공, 새만금 전시관 확대신축 착공, 새만금게이트웨이 관광단지 착공, 국도30호선 확포장공사 조기 완공 사업비 확보 등 기반시설 조성과, 전국 최초의 신재생에너지단지 조성과 제2농공단지 조성, 재래시장 현대화사업 등 산업기반조성과 청자전시관 건립, 대명리조트 개장, 모항가족호텔 및 농협변산연수원 유치, 고사포 펜션단지조성, 변산 마실길 조성 등의 관광인프라를 구축하였고, 누에타운 완공, 전북잠업시험지 이전 착공, 참뽕연구소 착공, 곰소젓갈발효식품센터 건립, 부안수산물종합유통센터 착공, 특화작목발굴 등 농어업의 특화 육성과 판매를 위한 유통구조 개선에도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망명 직후인 1998년 12월 호적에 올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빈소에서 상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양딸’ 김숙향(68)씨는 누구일까. 황 전 비서의 별세 이후 김씨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지만 그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다. 북한 관련 단체 관계자들조차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김씨는 황 전 비서가 망명했던 지난 1997년 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황 전 비서의 친서를 수차례 전달한 중개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의 한 언론은 김씨에 대해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가 1996년 8월 북한 금강산 개발 문제로 자신과 접촉하던 한국의 전직 대학교수인 여성 실업가”라고 소개했다. 또 “이 여성에게 처음으로 한국 망명 의사를 타진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김씨는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72)의 여동생으로, 모 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1980년대 금강산 관광 및 개발을 추진해 온 김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베이징에 머물면서 김덕홍 씨와 인연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황 전 비서와 인연이 시작된 것은
지난 10일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가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그의 삶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오롯이 담고 있다. 북한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황 전 비서. 어째서 그는 모든 영화를 뒤로한 채 남한땅으로 넘어와 북한 민주화를 목 놓아 울부짖었을까. <일요시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황 전 비서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불과 40세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발탁 김일성종합대서 김정일 주체사상 개인강사로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는 1923년 1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에 강제징용 돼 강원도 삼척탄광에서 노역하던 그는 해방 이후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46년 11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교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당에 가입해야한다는 동료 교사들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1948년, 6개월 과정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상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회고록을 통해 그는 “야간대학생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뒤떨어진 공부를 메우기 위해 잠도 안자고 매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49년
지난 3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민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됐다. 지난 2008년 18대 총선 패배 후 돌입했던 2년간의 칩거생활을 깨고 정계로 복귀한지 불과 2개월만의 일이다.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손 대표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손학규, 대체 그는 누구인가. <일요시사>가 구석구석 들여다봤다. 노동자들 권익 위해 노동 운동 뛰어들어 인하대·서강대서 제자들 사랑받는 정치학 교수로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이었으며 모친 역시 한때 교직에 몸을 담았다. 부친은 손 대표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차량전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이때부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모친은 자식들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새벽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농사를 지었다. 저녁에는 나무를 하러 나갔다. 안타까움에 주변에서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했지만 그의 모친은 “내 남편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돌아가셨으니 이제 7남매 기르는 것은 내 일”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대입 후 운동권 징역살이 1년 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어 북한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결정남에 따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 위원장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이다. 그는 27살의 젊은 나이로 사실상 북한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그에 대해선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북한 공식 매체에 실명이 등장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사진도 어린 시절 스위스 유학 때의 것이 전부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어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일요시사>는 김정은을 둘러싼 비밀의 장막을 벗겨봤다. 김 위원장 성격, 외모 빼닮아 어릴 적부터 총애 저택에 음악단원 상주시키며 호화로운 생활 즐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삼남 김정은은 평북 창성에서 태어났다. 김정은은 당초 1983년 1월8일생으로 알려졌지만 지난해 중반부터 북한 당국은 1982년생이라는 말을 은근히 퍼뜨려 왔다. 1912년생인 할아버지 김일성의 출생 100주년인 2012년에 김 위원장이 70세(1942년생)가 되고 김정은은 30세가 된다는 북한 특유의 ‘끝자리 맞추기’식 우상화 논리를 꿰맞추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항간에는 김정은이 1984년
7남매 모두 정·재계와 학계, 의료계로 진출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황식 감사원장은 광주·전남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감사원장은 1948년 전남 장성 황룡면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인 고 김원만 씨는 장성향교의 대표인 ‘전교’를 7차례나 역임한 명망 높은 한학자였다. 모친 고 나아지씨는 김 감사원장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김 감사원장은 자신의 저서 ‘지산통신’을 통해 “생활에서 언뜻언뜻 보여주신 처신이나 말씀 한마디가 세상의 어느 위대한 선생에 못지않았던 것 같다”고 모친을 회상했다. 김 감사원장의 형제들은 정·재계와 학계, 의료계로 진출했다. 맏형 고 김광식 씨는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을 운영했다. 둘째형 김강식 씨는 농촌진흥청 차장과 한국육류수출입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셋째형 고 김흥식 씨는 장성 군수를 3차례 연임했다. 큰 누나인 김효식 씨는 교편을 잡았다. 둘째 누나는 일진그룹 허진규 회장의 부인인 김향식씨다. 셋째 누나인 김필식 씨는 동신대 총장을 맡고 있다. 김 후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새 국무총리 후보자에 김황식 감사원장을 지명했다. 건국 이래 최초의 전남 출신 총리 후보자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어 예단은 이르다. 하지만 여야 모두 김 후보자의 경륜과 도덕성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혀옴에 따라 국회 인준 가도에는 ‘청신호’가 들어온 상황이다. 이에 따라 지난 8월 정운찬 전 총리의 사퇴 이후 지속된 총리 공백사태가 마감될 지 여부에 세인들의 이목이 모이고 있다. 부동산 등기, 독일법 분야에서 국내 최고 실력자 인사청문회 무난 통과, 도덕성 흠결 적은 법관 출신 김황식 감사원장은 1948년 전라남도 장성 출생으로, 광주 제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후 독일으로 건너가 마르부르크 필립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온화, 합리적 성품 업무처리 능력 탁월 지난 1972년 제1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한 그는 광주고등법원·대법원 선임재판연구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법원행정처 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사법 분야 뿐 아니라 법원행정에서도 경험을 쌓았다. 이후 지난 2005년 대법원 대법관에 올라
이번 제주도지사 선거는 피를 말리는 ‘대역전극’이었다.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개표 중반을 넘도록 좀처럼 표차를 줄이지 못하다 읍면지역 투표함이 막판에 열리면서 0.8%포인트 차이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동안 관선, 민선 등 모두 4차례나 제주도지사를 지낸 우 지사는 이로써 다섯 번째 제주도정을 이끌게 됐다.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 하차 등 좌절 딛고 일어나 첫 역점 과제는 ‘제주해군기지 해법 제시’ 될 전망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해녀의 아들로 태어난 우근민 제주도지사. 평생을 제주도에서 살아온 토박이로, 그만큼 제주 지역정서에 밝다. 제주 토박이로 제주 정서에 밝아 우 지사는 군장교로 복무하던 1974년 합참의장 출신인 심흥선 총무처 장관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총무처 인사국장, 기획관리실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91년 처음 관선 제주지사를 지냈다. 처음 출마한 1995년 민선 초대 제주지사 선거에서는 맞수인 신구범 후보에게 밀리면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1998년, 2002년에는 잇따라 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간 우 지사는 관선·민선을 합쳐 4번 지사를 지냈
민주당 불모지로 여겨지던 강원도에서 ‘북풍’을 헤치고 도지사에 등극한 이광재 강원도지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하지만 ‘박연차 게이트’사건과 관련,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취임과 동시에 직무가 정지되는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최근 금고 이상의 형이 선고된 지방자치단체장의 직무를 확정판결 전에 정지시키는 지방자치법 조항이 헌법불합치로 판결나면서 이 지사는 직무정지 두 달 만에 공식 업무에 나서게 됐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킹메이커’ 역할 톡톡히 해 38살 나이로 청와대 3대 요직 국정상황실장에 기용 1965년 평창 산골에서 1남6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이광재 강원도지사.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전근이 잦았던 탓에 평창 초등학교와 정선 예미초등학교를 거쳐 정선 함백중학교에 입학, 평창중학교 및 원주중학교를 다니는 등 전학을 많이 다녀야 했다. 대학시절 사회운동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83년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동아리 활동과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지사는 1985년 서울대와 연세대 운동권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만든 ‘백만학도’ 편
‘시민의 정치인’이라는 애칭이 더 친숙한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민선4기 경북도지사 재임시절 특유의 근성과 추진력을 발휘하면서 경북 도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16개 시도단체장을 통틀어 75.4%라는 최고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것이 이를 뒷받침했다. 이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본인이 기록한 76.8%에 버금가는 높은 지지율이다. 이로써 김 지사는 2회 연속 ‘최고 득표율 당선자’의 주인공이 됐다. 대체 그의 인기 비결은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재임 시절 10조원의 투자유치로 ‘경제도지사’ 평가 4년 간 20조원 투자유치로 일자리 6만 개 만들 것 1942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대구사범학교,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고향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교편을 잡았던 그였지만 밤에는 야간대학생으로 변신했다. 이런 주경야독을 통해 김 지사는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 공직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됐다. 낮엔 교사
번번이 선거에서 고배를 마셔야했던 김두관 경남도지사. 그럼에도 그는 오뚝이 같은 집념을 발휘, 결국 지난 6·2지방선거에서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이에 따라 김 지사 향후 4년간 경남도민들의 살림살이를 챙기게 됐다. 그리고 취임 이후 2달여 남짓이 지난 지금, 도청직원들은 “경남도청은 지금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반응 일색이다. 김 지사가 경상남도의 무엇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그 안을 들여다봤다. 계속된 낙선에도 포기하지 않아…뿌리 깊은 근성 “경남을 세계 신에너지 산업 수도로 만들 것” 김 지사는 1959년 경남 김해에서 가난한 농민 집안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청년시절 당당한 체구에 제법 알아주던 씨름 선수로 통하던 김 지사는 남해종합고, 영주경산전문대 행정학과,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25세 되던 해인 1986년,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일하던 그는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당시 김 지사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년 만에 특별 사면·
전북도에서 모든 업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통하는 김완주 전북도지사. 1973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40년 가까이 전북도에서 근무해온 때문이다. 계장부터 지사, 군수, 시장 등 안 거친 자리가 드물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민선 4기 시절 전북도지사로서 눈부신 성과를 일궈낸 김 지사. 그가 다시 한 번 전북도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북도정마차의 선두에 섰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바람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며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그의 뒤를 쫓아가 봤다. 가난 딛고 일어나 정통 행정가 외길인생 40여년 여름휴가를 떠났다 하루 만에 가족을 두고 돌아와 김완주 전북도지사는 임실의 산촌에서 태어나 전주의 달동네에서 자랐다. 형제들 중 가장 똑똑한 자식 한 명만 겨우 공부할 수 있었던 어려운 시절, 그는 가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족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월사금을 제때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나는 서러움을 겪어야 할 정도였다. 가난을 딛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공부뿐이었다. 대학 다
민주당 박준영 전남도지사가 3선에 성공했다. 주승용 국회의원과 이석형 전 함평군수의 협공으로 난항이 예상됐던 것과 달리 주 의원과 이 전 군수가 경선에 불참함으로써 단독 민주당 후보로 결정됐다. 3선이 광주·전남지역에서 광역단체장으로선 처음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박 지사가 전남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 끝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전남을 바꿔놓겠다”는 박 지사. 대체 전남에는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까. 가난했던 어린 시절…좌절 딛고 전남도지사로 ‘우뚝’ 공보수석, 대변인 맡아 정부의 ‘입’과 ‘얼굴’ 역할해내 박준영 전남도지사는 1946년 영암 삼호면 산호리(현 삼호읍)에서 가난한 농부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목포중학교를 마쳤지만 부친이 몸져눕게 되면서 고교 진학을 미루고 부친을 대신해 직접 땅을 갈고 똥지게를 지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부친이 사망한 뒤 박 지사는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낮에는 중국집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밤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고등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했다. 주경
재선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충북도지사에 출마한 민주당 이시종 후보가 ‘선거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6·2 지방 선거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한나라당 정우택 후보를 따돌리고 ‘충북도의 수장’에 오른 것. 이에 따라 이 지사는 앞으로 4년 간 충북도의 도정을 맡아 꾸려가게 됐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우뚝 선 당당한 충북’을 자신 있게 약속한 이 지사. 그의 당찬 행보에 주목해봤다. 행정관료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도 당당히 성공 국비확보 위해 중앙무대 오가며 부지런히 발품 팔아 1947년 4월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 창동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시종 충북지사 는 ‘충북 토박이’다. 청주고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충북도 법무관으로 공무원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강원도 기획담당관, 내무부 행정관리담당관, 대통령 비서실,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등을 거친 뒤 1989년 1월부터 2년 간 충주시장으로 일했다. 공무원의 길을 걸은 지 18년 만에 ‘금의환향’한 것. 이후 이 지사는
6·2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후보가 박상돈 자유선진당 후보와 피 말리는 접전 끝에 충남도지사에 당선됐다. 득표율은 불과 2%여 차이. 안 후보가 충남의 ‘새로운 기수’를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펼친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도정 운영을 키워드로 내걸고 이제 막 항해에 나선 안희정호가 어떻게 충남도민들과 이야기를 풀어나갈 지 주목해봤다. 2002년 대선서 ‘좌희정’으로 불리며 노 정권 창출 보고에서 ‘토론’중심 회의로…‘대화와 소통’ 적용 사람이 행복한 장기적 인프라 구축…‘사람 유치’ “의제 놓고 소통하면 반드시 좋은 방안 나올 것”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1964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고교 입학 5개월 만에 5·18 광주민주화항쟁에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끌려가 중퇴했다. 검정고시로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트위터, 시민들과의 소통의 장으로 활용 통일민주당 김덕룡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
울산광역시장을 두고 치러진 선거판은 박맹우 후보의 독무대였다. ‘역동의 산업수도 푸른 울산’ 기치의 민선 3·4기를 이끈 무난한 행정과 ‘친환경 산업수도 울산’ 이미지를 끌어올린 정확한 판단력과 추진력, 그리고 도덕성과 신뢰감이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민선 5기 ‘울산광역시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만큼 기대치 또한 크다. 이에 따라 8년 간 검증된 박 시장이 시정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에 시민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재임시절 산업수도로 울산 재도약 발판 마련 세계 3대 인명사전 ‘마르퀴즈 후즈 후’ 등재 ‘강고집’이라는 별칭이 더 친숙한 박맹우 울산광역시장은 1951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경남고와 국민대를 졸업한 그는 81년 행정고시에 합격, 이듬해 경상남도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년 간 중앙 및 지방 행정을 두루 익히며 행정전문가의 면모를 갖춰갔다. 97년 경남도 울산광역시준비단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울산시 기획실장, 내무국장, 건설교통국장, 울산 동구청장 권한대행 등을 역임한 박 시장은 고향인 울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