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좋은 개살구’ 답 없는 청년 주거 막전막후

지방 살면 서울 근처도 못가나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본가가 서울(수도권)인 것도 ‘스펙’이다.” 지방 출신 청년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푸념이다. 청년 주거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학업·취업을 위해 상경한 이들의 사투가 더욱 두드러진다. ‘비빌 언덕’이 없는 이들은 소득과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나름의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지원책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낮은 실효성에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는 실정이다.

최근 몇 년간 부동산 급등세가 계속 이어지면서 집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은 점차 커졌다. 이 같은 양극화는 청년층에서 더욱 심각해졌다. 이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소득과 재산이 비교적 적은 편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내 집 마련’이 훨씬 어렵다. 청년층은 한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에 성공한 이들과 그조차도 엄두 내지 못하는 이들로 양분됐다.

무너진
영끌족

집값이 계속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지금 아니면 영영 집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사회에 만연했던 탓이다. 당시 집값 상승률에 비해 한참 낮았던 대출금리도 이 같은 풍조에 크게 기여했다. 여력이 되는 이라면 누구나 재산과 대출을 긁어모아 집을 살지 고민했고, 이 중 상당수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이 일명 ‘영끌족’이다.

집값이 고공행진을 이어갈 때만 하더라도 청년 주거 문제는 ‘영끌하지 못한 이’에게 한정된 이야기였다. 적당 선의 이자를 내면서 버티고, 여차하면 차익실현까지 가능했던 영끌족을 굳이 살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단 1~2년 만에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금리가 급등하는 사이 집값이 속절없이 내려갔다. 종전의 청년 주거 문제에 영끌족의 ‘아우성’이 합세한 모양새다. 현재 청년들은 집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통받고, 없으면 없는 대로 힘들다.


영끌족의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점차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가 지난 21일(현지시각) 이례적인 3회 연속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자이언트 스텝이란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p 인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향으로 국내 대출금리도 가파르게 추가 상승할 것이 확실시된다.

국내 기준금리는 미국의 수치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한국은행(한은)은 올해 두 차례 남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0.25%p씩 올리는 ‘베이비 스텝’을 넘어 0.5%p씩 올리는 ‘빅 스텝’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연속 빅 스텝이 이뤄진다면 주택담보대출(이하 주담대) 최고금리는 연 7%를 넘어 8% 선까지 넘볼 것으로 전망된다.

한계치에 임박한 영끌족의 빚 부담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미 금융권에선 시중은행의 주담대 최고금리가 연내 7%를 돌파할 것이란 게 중론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변동형·혼합형(고정형) 주담대 금리는 현재 연 6% 중반대까지 치고 올라왔다. 주담대 금리 설정의 준거가 되는 코픽스(COFIX·자금조달비용지수)와 은행채 5년물 금리는 각각 2.96%와 4.460%다.

특히 코픽스는 10여년 만에 최고치를 갱신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주담대 금리는 3~4%대에 머물렀다. 예컨대 3억원을 빌렸다면 이자로 월 90~100만원, 원리금까지 합쳐도 140만원 전후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리가 6% 중반대로 오른 지금은 월별 이자만 160만원을 상회한다. 향후 7~8%까지 치솟으면 이자가 175~200만원으로 상승한다.


불과 1년 사이에 이자 부담이 곱절로 불어난 셈이다.

무주택자 이어 영끌족도 위기 봉착
가파른 금리 인상에 이자 부담 한계

한은에 따르면 기준금리가 0.25%p 인상될 때 대출자들의 전체 이자 부담은 연 3조3000억원 증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 이후 기준금리를 7차례, 총 2%p 올렸다. 한은 추정대로라면 1년 만에 불어난 가계 이자 부담액은 약 27조원에 달한다.

이번 금리 인상의 최대 피해자는 2030세대 영끌족이 될 공산이 크다. 한은 자료에 따르면 20~30대 가계대출은 지난해 말 기준 475조8000억원이다. 1년 전보다 35조2000억원 늘어난 수치다. 2030세대의 취약차주 비중은 6.6%로 다른 연령층 평균(5.8%)보다 높다. 30대 차주의 소득대비대출비율(LTI)은 280%에 달한다.

전 연령대 중 가장 높다.

아울러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 국내 다중채무액은 598조9000억원으로 5년 전보다 22.1% 증가했다. 다중채무란 3개 이상의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은 경우를 가리킨다. 눈에 띄는 점은 이 기간 30대 이하의 다중채무액이 118조9600억원에서 158조1300억원으로 약 33% 급증했다는 사실이다.

영끌족의 상당수가 2030세대라는 방증이다.

영끌 열풍이 금리 인상기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대로라면 영끌족은 암울한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뿐이다. 이들은 집은 있지만 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거나, 이자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손해를 감수한 채 떨어진 가격에 집을 되팔아야 한다. 

대출금 상환 방식이 변경된 점 역시 부담을 더한다. 과거 고금리 시절 주택담보대출은 거치기간 동안 이자만 납부하다 일시에 원금을 상환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는 ‘원리금 분할상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같은 돈을 빌려도 월별 부담 금액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앞서 이창용 한은 총재는 영끌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전한 바 있다. 그는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20~30대는 한 번도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적이 없는 세대”라며 “집을 살 때 연 3%로 돈을 빌려 평생 그 수준으로 갈 것으로 생각했을 테지만 그런 가정이 변할 수 있고, 낮은 금리를 가정해 경제활동을 하면 위험이 있다는 조언을 하고 싶다”고 발언했다.

집을 장만하지 않았다고 해서 웃을 수도 없다. 무주택자들은 만성적인 주거 불안과 높은 임대료 부담에 시달린다. 집값이 내려가면서 임대료도 덩달아 하락할 기미가 보이지만, 절대적인 금액대가 워낙 높은 탓에 집값 하락을 체감하긴 어려운 형편이다.

일각에선 “되레 깡통전세(담보 대출과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를 웃도는 전세 형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가 늘어 머리만 더 아프다”는 반응도 감지된다.


정부 지원
속 빈 강정

이들이 고전을 거듭하는 배경에는 정부가 마련한 지원책의 실효성이 높지 않다는 점도 포함된다. 정부는 각종 임대주택 마련과 전용 대출제도 등을 통해 청년 무주택자를 지원한다. 지원책이 절실한 청년층 사이에서 참여도가 높아 대부분 경쟁률이 상당하다.

하지만 바늘구멍 같은 선발 과정을 뚫고도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한다. 예컨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하는 청년 및 신혼부부 전세임대 사업의 당첨자 대비 실입주율은 50%대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LH로부터 제출받은 ‘전세임대주택 당첨자 및 실입주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간 LH에서 선정한 청년 및 신혼부부 전세임대 당첨자 대비 평균 실입주율은 각각 55.5%, 53.5%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청년 전세임대는 ▲2017년 50.03% ▲2018년 60.13% ▲2019년 53.62% ▲2020년 64.60% ▲지난해 51.48%의 실입주율을 보였다. 신혼부부 전세임대는 ▲2017년 56.67%, ▲2018년 59.28% ▲2019년 68.70% ▲2020년 42.04% ▲지난해 54.28%의 실입주율로 연도별로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50%대를 맴돌았다.

LH 전세임대 제도는 일정 조건을 갖춘 청년과 신혼부부가 집을 찾아오면 LH가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맺고 싸게 재임대해주는 제도다. 입주 대상자가 직접 주택을 물색하고, LH가 해당 주택을 검토해 전세금을 지원해주는 절차를 거친다.


김 의원실은 제도에 선발된 뒤에도 대상 주택을 직접 발품을 구해 찾아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문제는 주택 물색 과정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점이다.

LH 입주자 모집 공고문에 따르면 청년 전세임대의 경우 수도권 1인 거주 시 60㎡ 이하 주택에 최대 ‘1억2000만원’의 한도로 전세보증금을 지원해준다. 하지만 수도권 전셋값이 많이 오르다 보니 해당 가격대 매물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집 사도 고민
안 사도 고민

또 주택 물색 기간 6개월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하면 대상자 선정은 무효로 돌아간다. 여러 청년이 제도에 선발되고도 기간 안에 적당한 매물을 찾지 못해서 기회를 날렸을 개연성이 높다.

계약 과정이 일반 전세보다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것도 문제다. 계약 관련 권리 분석 과정에서 정보 노출에 부담을 느끼는 임대인이 많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일반 계약보다 좋은 혜택은 없는데 외려 부담은 커지니, 임대인이 제도에 협조할 이유가 마땅찮다는 것이다.

지난해 청년 전세임대 당첨자는 2만9817명이다. 2017년 1만1078명에 비해 5년간 2배 이상 늘었다. 신혼부부 전세임대 역시 2017년 6267명에서 지난해 1만8360명으로 당첨자가 3배 가까이 늘었다. 사업 규모는 커졌어도 제도가 지닌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실입주율은 꾸준히 50%대에 정체된 실정이다.

김 의원은 “주택 물색 과정을 입주자에만 맡겨놓는 것은 청년과 신혼부부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일”이라며 “심사 절차의 효율성 제고, 세제 혜택 확대 등 임대인을 유인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출과 관련된 정부 지원책 역시 실효성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품 설계 방식과 시의성 판단이 아쉽다는 반응이다. 

일례로 안심전환대출은 변동·혼합형 금리 주담대를 장기·고정금리로 바꿔주는 상품이다. 급격한 금리 상승으로 부담을 호소하는 이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출시 이틀이 지나는 동안 반응이 미지근했다. 이 기간 누적 신청 금액은 총공급 규모의 2%에도 미치지 못했다.

각종 지원책 꺼냈지만 실효성 의문 
탁상공론 일색…탁자 밖에선 비명

지난 19일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안심전환대출 신청·접수 이틀째였던 지난 16일 기준 주택금융공사와 6개 은행에 신청된 안심전환대출은 총 5105건이다. 누적 신청 금액은 4900억원. 안심전환대출 공급 규모가 25조원인 점을 고려하면 1.96% 수준에 그친다.

대출 신청 가능한 주택 가격이 3억~4억원으로 낮은 게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 LH전세임대 제도와 마찬가지로 당초 대상에 들어갈만한 매물이 많지 않다는 지적이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일부 다세대 주택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신청 가능한 주택을 찾기 힘들다. 지방도 일부 주택에만 국한되는 가격대다. 

일각에선 금리 조건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푸념도 나온다. “상품 설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전제와 함께 “지역별 조건 등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이외에도 정부는 지난달부터 생애 최초 주택 구매자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을 80%까지 인정해주고, 이달부터는 청년층이 대출을 받을 때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에 미래 소득을 반영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금리가 크게 올라 대출 수요가 얼어붙은 이때 대출 규제 완화책을 처방했으니, 그 실효성에는 의문부호가 따르는 게 당연지사다. 

각종 지적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개선책 마련을 고심하는 눈치다. 앞서 예고했던 ‘청년 주거지원 대책’ 발표를 이달에서 다음 달로 미뤘다. 지난 14일 발족한 ‘국토교통부 청년자문단’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를 계기로 전보다 실질적인 지원책이 마련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는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청년들의 의견을 듣기 위한 자문단이 생겼으니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만들겠다는 취지”라며 “청년원가주택·임대주택·청약 관련 개선 내용을 담아 다음 달 말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탁상공론
개선되나

한덕수 국무총리 역시 지난 17일 청년의날 기념사를 통해 청년정책 보강 청사진을 제시했다. 한 총리가 제시한 9가지 정책 중 청년 주거와 관련된 사항은 ▲청년원가 주택 및 역세권 첫집 50만호 공급 등 주거 복지 강화 ▲청년주거종합대책 구체화 ▲전세사기 등 불법행위 처벌 강화 등 총 3가지였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부동산 전문가의 조언 “실거주 영끌족은 버텨라”

부동산 전문가인 이광수 미래에셋증권 수석연구위원이 “부동산 하락세 진입은 분명해 가파른 내리막에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영끌족은 구매한 집에서 거주할 수 있다면 버텨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20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부동산 하락세 양상 구간을 나눠 설명했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요즘처럼 하락기에는 일단 하락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단기적 변동이야’ ‘일시적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단계, 조정기에 접어들어 ‘하락 거래’가 많아지는데 일부 사람만 아는 두 번째 단계, 본격적으로 하락 단계에 접어들어 일종의 ‘양떼 효과’라든지 ‘손실 회피 현상’이 나타나며 물량을 대거 밀기 시작해 하락폭이 커지는 마지막 단계, 3단계로 진행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일부 사람만 움직이는 2단계 정도”라고 진단했다.

영끌족의 주택 매도에 대해선 “투자했더라도 그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으면 버텨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집이 없다면 전세라든가 월세를 내고 살아야 되는데 (투자한 집에 거주하면) 그만큼 비용이 절약되는 측면도 있고, 내 집에 인테리어도 하고 살면서 만족도는 커진다”며 “거주하면서 생기는 ‘거주의 가치’를 크게 만들어 이 시기를 잘 버텨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가파른 고금리는 1년 정도로 예측한다”며 “지금 월세도 올라가, 거주의 가치가 훨씬 커지면 그 기간은 훨씬 더 짧아진다”고 전망했다.

다만 이 위원은 “도저히 살 수 없는 조건, 즉 과도하게 전세를 껴서 갭투자했거나 과도하게 빚을 내서 도저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면 파는 게 맞다”고 단서를 달았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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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