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서울 성북동 빌라 사기 의혹

서민들 등친 ‘성북 중개왕’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내 집’에 대한 소시민의 열망은 남다른 데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집’이 갖는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불과 몇 년 새 부동산시장이 변화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범죄가 속출하고 있다.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검은 손’의 수법은 교묘해지고 규모도 커지는 모양새다. 

어느 정부에서든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정책 중 하나가 ‘집값 안정’이다. 부동산시장은 정부 정책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나곤 한다. 정부에서 부동산정책을 펼 때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정책에 따라 한 번 요동치기 시작한 시장은 쉽사리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 

올랐다
내렸다

‘부동산은 심리’라는 표현처럼 휩쓸리는 순간 호랑이 등에 탄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재인정부 시절 20번이 넘는 부동산정책이 실패로 이어지면서 부동산 열풍을 넘어 광풍이 한국 사회를 덮쳤다. 근로소득만으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주식, 코인 등에 투자했다. 하지만 주식과 코인 시장이 정세에 따라 널을 뛰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면서 끊임없이 ‘우상향’을 거듭하던 부동산으로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지금 이 순간 집을 사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생각에 ‘영혼까지 끌어 모아(영끌)’ 투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자산 가격이 급격하게 올라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을 가리키는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부동산이 사람 사이에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도구가 된 것이다.

윤석열정부 들어서는 대출금리가 상승하면서 집값이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은행 대출로 집을 산 영끌족은 높아진 대출금리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다주택자, 실거주 1주택자, 무주택자 등이 정부 정책에 따라 상황이 뒤바뀌었다. 호랑이 등에 탄 사람은 내리질 못하고 호랑이 등에 올라타려던 사람은 걸음을 멈추는 형국이다. 

문제는 부동산시장의 급격한 변화가 다양한 부작용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G빌라를 둘러싸고 ‘분양사기’ 의혹이 불거졌다. G빌라는 2021년 12월 지상 5층, 16세대 규모로 지어진 도시형 생활주택이다. 2층부터 5층까지 각 층별로 4세대가 입주할 수 있다.

건축업자 홍씨가 직접 분양한 2세대를 제외한 14세대 가운데 6세대의 매수인이 분양을 중개한 공인중개사와 건물을 시공한 건축업자, 건물의 소유권을 가진 건물주 등을 고소했다.

A씨 등 2명은 지난해 5월 공인중개사 김모씨를 사기죄로 처벌해달라며 서울 성북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지난달에는 B씨 등 4명이 김씨와 건축업자 홍모씨, 건물주 김모씨 등을 사기죄와 배임죄의 공동정범으로 고소했다. 특히 공인중개사 김씨는 공인중개사법 위반을 추가했다. 

매매대금 공인중개사 계좌로
믿었는데 소유권 이전 안 돼

<일요시사>가 입수한 두 건의 고소장은 고소 주체, 피고소 주체, 범죄 혐의 등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에선 큰 차이가 없었다. 돈을 냈지만 내 집 마련에는 실패했다는 것. 즉 계약금, 중도금 등 돈은 치렀지만 집의 소유권을 이전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과정에서 매수인의 돈은 매도인이 아닌 공인중개사와 건축업자의 계좌로 들어갔다. 

A씨에 따르면 공인중개사 김씨는 “매매대금을 자신에게 입금하면 건물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소유권을 가진 건물주 김씨로부터 건물 매매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공인중개사 김씨는 성북구에서만 30년 가까이 중개업을 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A씨는 공인중개사 김씨의 말을 믿고 건물 매매대금 4억4000만원 중 1억2000만원을 기존 수분양자에게, 1억원을 김씨에게 직접 송금했다. 남은 2억2000만원은 A씨가 소유권을 취득한 뒤 전세를 놓고 그 전세금으로 지급하겠다는 차용증을 작성했다. A씨는 매매대금 4억4000만원을 다 치렀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난해 4월까지 완료해주겠다고 했던 소유권 이전은 10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에 건물주 김씨가 G빌라를 담보로 매매대금을 상회하는 대출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A씨는 소유권을 이전받는다 해도 근저당이 잔뜩 설정된 이른바 ‘깡통 건물’을 갖게 되는 셈이다. 

14세대 중
6세대 고소

B씨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렀지만 소유권을 이전받지 못했다. 이들도 건물주 김씨가 아닌 공인중개사 김씨와 건축업자 홍씨에게 매매대금을 넣었다. B씨 등은 “분양계약을 진행할 당시 매도인(건물주 김씨)이 1차로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아 토지에 근저당권을 설정하고 준공 후 건물을 담보로 2차 대출을 받아 토지상의 PF 대출금을 상환해 근저당을 말소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2차 대출금은 매수인의 잔금(세입자로부터 받을 전세금)과 동일한 금액으로 하고 그 원금은 건축업자 홍씨가 책임지고 상환하며 이자 역시 홍씨가 부담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절차대로 매도인이 매수인으로부터 잔금(전세금)을 받아 근저당권을 말소한 후 소유권 이전을 했으면 됐다는 것. 

문제가 된 부분은 건물을 담보로 한 2차 대출금이다. G빌라 토지에는 경기남부수협을 근저당권자로 하는 39억2400만원(채권최고액), 공인중개사 김씨가 설정한 10억원의 근저당권과 또 다른 인물이 설정한 6억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있었다.

해당 근저당권은 지난해 3월30일 한 번에 해지되는데 G빌라 건물을 담보로 2차 대출금을 받아 변제한 것이다. 

현재 G빌라 등기부등본상에는 도림신협과 든솔신협이 공동근저당권자로 설정돼있다. 각각 채권최고액은 24억9600만원, 24억원 등 48억9600만원에 이른다. 고소인은 건물주 김씨 등이 잔금 이상의 대출금을 받아 세대별 부담이 최고액 기준으로 3억5000만원에 육박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서 전세 세입자를 구할 수 없게 됐다는 것. 

이 과정에서 건물주 김씨는 물론 건축업자 홍씨, 공인중개사 김씨 등이 고소인의 동의 없이 필요 이상의 대출을 받고 공동근저당권을 설정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공인중개사 김씨의 경우 공인중개사로서 분양 계약 당시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는 점을 들어 공인중개사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동의 없이
설명 없이

공인중개사법 제25조(중개대상물의 확인·설명)에 따르면 공인중개사는 중개가 완성되기 전 ▲해당 중개대상물의 상태·입지 및 권리관계 ▲법령의 규정에 의한 거래 또는 이용제한 사항 ▲그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 등에 대해 중개의뢰인에게 성실·정확하게 설명하고 토지대장 등본 또는 부동산 종합증명서, 등기사항증명서 등 설명의 근거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고소인은 피고소인이 G빌라뿐만 아니라 성북구 여러 지역에 신축 건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건축업자 홍씨가 건물주 김씨를 앞세워 대출을 일으키게 한 뒤 건물을 세우고 공인중개사 김씨는 여기에 투자를 하고 중개 및 분양업무를 맡고 있다는 주장이다. 

B씨 등은 “공인중개사 김씨는 단순히 중개업무만 한 게 아니고 여러 개의 분양사업 전반에 금전적으로 투자 등의 관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공인중개사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G빌라 토지 매입 당시 10억원 이상의 돈을, 또 다른 건물 건축 과정에도 돈을 투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G빌라 건축 과정에서 돈을 투자했는데 이를 다 돌려받지 못해 매매대금으로 처리하기로 매도인(건물주 김씨)과 얘기가 된 상태였다. 계약서에도 특약사항에 이 같은 내용을 넣었고 그대로 이행한 것인데 고소가 들어와 억울하다. 공인중개사는 모두 근거를 남겨야 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매수인에게 매매대금을 직접 받은 것은 건물주 김씨, 건축업자 홍씨 등과의 채무를 변제하는 과정이었다는 주장이다.


대출금, 잔금보다 많아
깡통 건물에 경매 위기

G빌라 분양계약서에 따르면 특약사항3에 공인중개사 김씨의 계좌가 기재돼있고 ‘채권자로서 채권금액을 회수하는 것임(토지에 근저당 10억원이 설정됨)’이라는 문구가 있다. 

하지만 고소인은 별도 특약사항을 언급했다. 별도 특약사항3에 따르면 ‘통대출(2차 대출) 후 은행 채무에 대해서는 채무자 홍○○님이 책임지고 이자부담은 물론 상환 말소해야 한다. 늦어도 전세 잔금시까지는 상환 말소해 수분양자와 전세 입주자에게 피해가 없도록 한다’는 문구가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공인중개사 김씨가 주장하는 채무관계는 김씨와 건축업자 홍씨 혹은 건물주 김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해당 채무관계가 제3자인 매수인으로부터 대금을 지급받을 근거는 될 수 없다”며 “공인중개사 김씨는 건물주 김씨의 대리인으로 대금을 수령하는 것이라 했고 매수인은 공인중개사 김씨가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이행하리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 싸움에서는 매수인이 공인중개사·건축업자·건물주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신협에서 일으킨 2차 대출금 이자를 납부하지 않으면서 경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 심지어 건물주 김씨는 현재 세금 체납 상태다. 최초 고소를 진행한 A씨 등은 가처분 금지 설정을 해둔 상황이지만 경매는 해당 사항이 없다.

여기에 경찰 수사는 더딘 상태다. 이 사건은 성북경찰서 경제범죄수사팀에서 수사 중이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최초 고소 이후 9개월째 감감무소식이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공인중개사 김씨는 1차례 조사를 받고 자료를 제출한 뒤 이후 조사를 받지 않았다. 수사 상황을 묻기 위해 성북경찰서에 연락을 취했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한 법조인은 “공인중개사는 중개업무를 잘하면 되는데 김씨는 준시행업자 역할까지 하려 했다. 아쉬움이 남는 대목은 피해를 본 세대끼리 처음부터 공동 대응을 했더라면 경찰 수사가 이렇게 지지부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경찰 수사가 늦어질수록 없는 쪽이 더 피해를 보는 구조다. 빠른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사 9개월째
사건 뭉개나?

고소인도 “경찰이 9개월 동안 사건을 뭉개고 있는 동안 어딘가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양산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피고소인에 대한 압수수색·구속수사·출국금지가 필요하다”며 “최근 변호사가 수사 지연에 대해 항의하자 그제야 조금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jsj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건축업자-건물주-공인중개사 3각 관계?

동업자서 원수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 G빌라를 둘러싼 고소전은 매수인과 건축업자·건물주·공인중개사 사이에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건물주 김모씨가 공인중개사 김모씨를 상대로 고소를 진행한 것. 건물주 김씨는 지난해 5월 매수인에게 보낸 내용증명에서 “공인중개사 김씨의 횡령, 사문서 위조 증거가 있어 고소·고발 중에 있다”고 기재했다. 

공인중개사 김씨 역시 건물주 김씨로부터의 피소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바지사장’이라고 주장했다. 건축업자 홍모씨가 실질적 건물 소유주고 건물주 김씨는 그가 내세운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면서 홍씨가 건물주 김씨 같은 바지사장을 여럿 두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중개사 “건물주는 바지 사장”

건물주 김씨는 건축 관련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게 공인중개사 김씨가 내세운 근거다. 일부 매수인도 건물주 김씨가 바지사장일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실제 건물주 김씨를 만난 매수인은 “말도 어눌하고 늘 누군가와 같이 다닌다”고 설명했다. 

건축업자 홍씨는 “누군가의 잘잘못에 대해 언급할 생각 없다”고 한 뒤 나중에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끊었다. 건물주 김씨는 기자가 신분을 밝히자 바로 전화를 끊은 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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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단독] ‘김미영 팀장’ 동반 탈옥 비쿠탄 마약왕 풀스토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김미영 팀장’으로 불린 보이스피싱 총책 박모씨와 함께 필리핀 구치소서 탈옥한 조직원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서 처음 만난 이들은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조직을 꾸렸다. ‘비쿠탄 마약왕’으로 알려진 송모씨는 2022년 수원서 필로폰을 소지한 채 붙잡힌 김모씨의 상선이라는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 8일 본지가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를 최초 보도한 이후, 외교부 측은 루카스 베르사민 필리핀 대통령비서실장에게 “탈옥한 이들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달라”는 공적 서한을 전달했다. 현재 박씨에 대한 검거 작전은 필리핀 이민청 도피사범추적팀과 필리핀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전담 경찰 부서)가 협력하고 있다. 새벽 탈출 어디로 갔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약 2년 전 비쿠탄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은 지난해 11월 필리핀 나가시(市) 카마린스 수르 주 구치소로 이감됐다. 3명 모두 불법 고용과 인신매매 혐의 등으로 기소되면서다. 복수의 제보자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1일에서 2일 새벽 사이 미리 준비한 오토바이와 차량을 이용해 탈옥했다. 필리핀 교정 당국은 지난 2일, 인원 점검 때 박씨 일당이 탈옥한 것을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카마린스 수르 구치소에 대해 현지 제보자는 “담장이 낮고, 보초도 허술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에 탈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라며 “그들은 비쿠탄 교도소보다 허술하다는 점을 노리고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들어 이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탈옥한 일당이 도피하는 동안에도 보이스피싱과 마약 유통을 결합한 신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2012년부터 필리핀 현지에 콜센터를 차린 보이스피싱 1세대다. ‘김미영 팀장’이라고 소개하며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금융기관을 사칭해 개인정보를 빼냈다. 박씨가 보이스피싱으로 가로챈 금액만 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8년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서 근무하다가 수뢰 혐의로 해임된 경찰 출신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충격을 안겼다. 경찰 근무 당시 접했던 범죄 수법을 토대로 ‘김미영 팀장’ 사기 수법을 고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10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을 운영해 온 박씨는 2021년 10월6일 마닐라 인근서 붙잡혔다. 당시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 ‘박씨가 마닐라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대부분 중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이들에 맞서 중무장했다. 붙잡힌 박씨는 “필리핀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국내 송환을 피하고 상대적으로 보안이 취약한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되기 위한 노림수였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일요시사>와 통화서 “(박씨는)비쿠탄 내에서 식사를 판매하는 아저씨로 통했다”며 “박씨가 송씨, 신씨와 어울리면서부터 교도소 내에 마트를 인수해 장사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증언했다. 보이스피싱과 결합한 마약 유통 대포폰으로 텔레그램 마약방 개설 비쿠탄 교도소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죄수들이 직접 돈을 벌거나 영치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 죄수들은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조직을 꾸려 보이스피싱, 대포폰, 마약 유통 사업을 할 수밖에 없다. 최근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 신씨가 비쿠탄 교도소 내에서 동업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박씨와 함께 탈옥한 송씨와 신씨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도 쏟아졌다. 제보자에 따르면, 신씨는 타인 명의로 개통한 유심칩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신씨는 불법 유심칩 1개당 한국 돈 약 25만원을 받고 팔았다. 신씨에게 산 대포 유심칩으로 신분을 철저히 숨길 수 있게 된 송씨는 텔레그램으로 마약 전달책을 모집하고 유통하는 이른바 ‘마약방’을 개설했다. 평소 신씨가 재테크 사기, 주식 및 코인 리딩방 등을 운영해오면서 모은 수천명의 회원들은 송씨가 운영하는 마약방으로 초대됐다고 한다. 송씨는 채팅방서 ‘두목’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또 박씨는 신씨의 도움을 받아 수억원가량을 비트코인으로 환전한 것으로 파악됐다. 비쿠탄 교도소 출신 제보자는 “마약과 거리가 멀었던 박씨가 송씨와 안면을 트면서 보이스피싱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 사업을 함께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송씨가 필리핀 파사이 등에 있는 마약 공급책을 통해 한 달에 5kg 정도의 필로폰 유통을 지시했다”며 “송씨는 비쿠탄서 만난 중국 마피아로부터 싸게 구입한 필로폰 등을 드라퍼(전달책)에게 전달해 한국으로 수출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송씨가 드라퍼에게 준 배달료는 한화 약 1000만원가량으로 전해진다. “한국 싫어” 가짜 범죄 다수의 전달책이 송씨의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정황은 곳곳서 드러났다. 송씨가 고용한 운반책은 2022년 1월25일, 수원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하다가 붙잡힌 김모씨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당시 수원중부경찰서는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30대 남성 김씨를 긴급체포했다. 김씨는 이날 오전 8시7분께 장안구 영화동의 한 모텔서 필로폰을 소지했다. 앞서 ‘한 남성이 모텔서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했다. 경찰은 모텔 안에서 필로폰이 포장된 비닐백 30개를 발견하고 이를 압수 조치했다. 또 김씨를 상대로 진행한 마약 간이 검사서 양성반응을 확인했다. 경찰조사에서 김씨는 투약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텔레그램으로 필로폰 거래를 지시한 ‘orjinal8282’가 상선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orjinal8282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가 김씨에게 “수원으로 가서 모텔을 잡고 기다려라”며 “사탕(엑스터시) 50, 어름(필로폰) 50 좀 있다가 드랍해서 갖고 있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송씨와 비쿠탄 교도소서 함께 지냈던 제보자는 “orjinal8282는 송씨의 아이디”라며 “김씨가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던 마약방 회원들은 송씨가 김씨의 고용주(상선)이었다고 적었다”며 텔레그램 채팅방 사진을 전했다. 송씨가 넘긴 마약을 유통하려고 한 사람은 또 있었다. 지난해 1월23일, 충남 서산서 아내를 살해하고 저수지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강주천이다. 그는 한국 경찰의 공조 요청으로 필리핀서 검거됐으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강주천은 지난해 6월 비쿠탄 수용소서 탈옥했다가 8일 만에 체포됐다. 탈옥 후 체포 당시 1kg의 필로폰을 소지하고 있었다. 강주천은 도피 자금을 벌기 위해 송씨의 지시를 받아 필로폰 배달을 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밥 먹듯… 탈옥 시도 비쿠탄 관계자들은 이른바 ‘마약왕 전세계’ 박왕열이 큰돈을 벌자, 박씨와 송씨 일당도 마약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봤다. 지난해 중순 박왕열은 <일요시사>와 전화 통화서 “이젠 나보다 송씨가 마약왕에 가깝다”며 “한국으로 보내는 양이 내가 보낸 것보다 많다”고 말했다. 앞서 박왕열은 2016년 10월 필리핀 한 사탕수수밭서 한국인 3명을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의 범인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 <카지노>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에 구금됐다가 2017년 3월 탈옥해 두 달 만에 잡혔다. 2019년 10월에는 재판을 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던 중 재차 도주해 2020년 10월 다시 검거됐다. 박왕열은 이 기간에 마약왕 전세계로 거듭났다. 국내 마약 유통·판매 총책이었던 ‘바티칸 킹덤’ 이모씨에게 수억 원대의 마약을 공급했다. 이는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등에게 팔렸다. 박왕열의 옥중 마약 유통 의혹은 이미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4월12일, 경남경찰청 광역수사대는 A씨 등 3명을 국내 중간 판매책에게 마약류를 판매한 혐의로 구속했다고 밝혔다. 유통책 중 한 명은 2022년 12월 NBP서 박왕열을 만나 국내로 밀반입해 보관 중인 마약류를 판매키로 공모하고, 지난해 1월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이용해 특정한 장소에 마약을 놓고 사라지는 이른바 ‘던지기 수법’으로 엑스터시 100정, 필로폰 10g을 국내 중간 판매책들에게 600만원(도매가)을 받고 공급했다. 그동안 경찰은 박씨 일당 등 한국인 범죄자의 강제송환을 추진했으나 지지부진한 상태다. 박씨 일당은 필리핀서 죄를 짓고 형을 받으면 국내 송환이 지연된다는 점을 노렸기 때문이다. 경찰은 현재 박씨에게 적용된 혐의 중 인신매매는 허위로 만들어낸 범죄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수원 모텔서 잡힌 전달책 상선” 박왕열 “이젠 송씨가 마약왕” 박씨가 쓴 꼼수는 이미 필리핀 도피 사범들 사이에 만연하다. 현재 필리핀 도피 사범은 5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송환을 거부하는 범죄자들은 필리핀 현지 변호사를 통해 ‘가짜 범죄’를 만든다. 비용은 한국 돈으로 많게는 3000만원서 적게는 100만원 정도가 든다. 제보자에 따르면 “가짜 케이스를 만드는 건 흔한 일”이라며 “강간, 사기, 폭행 정도의 가짜 범죄를 만들어 재판에 출석하면서 국내 송환을 계속 미루는 것”이라고 전했다. 박씨가 국내로 송환될 경우, 최소 징역 15년서 25년 이상 집행될 수 있다. 지난해 6월 재판부는 2012년 3월부터 2016년 6월까지 중국과 필리핀서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활동하며 피해자 435명에게 26억여원을 가로챈 B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송씨의 경우, 마약을 수출입·제조·매매하거나 매매를 알선 또는 그럴 목적으로 소지·소유한 것에 대한 처벌이 가해진다. 해당 혐의가 인정되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며, 영리 목적 또는 상습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다. 필리핀 당국과 한국 정부도 탈옥범들을 추적 중인 가운데, 현지 법 적용을 고려하면 다시 붙잡히더라도 국내 송환이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필리핀서 저지른 다른 범죄의 조사와 재판이 끝나지 않아 한국으로 송환되려면 최소 6년이 걸린다. 특히, 탈옥 행위로 현지 법을 중대하게 위반한 만큼 현지서 징역형을 선고받을 가능성도 크다. 송씨와 박씨에 관한 국내 송환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서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국내로 이송하면 좋으나, 현재 수용자 이송 조약은 체결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법무부는 “송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의 이송 요청을 지속하고 있다”며 “필리핀 이민국과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법무부의 이 같은 입장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시간이 가는 동안 이송 조약조차 체결하지 못한 점은 한국 정부의 소극 행정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법무부가 보이스피싱 혐의가 아닌 마약 유통 혐의로 송환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필리핀 정부가 ‘재량’을 근거로 거절할 가능성도 있으나 법무부는 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머나먼 국내 송환 이상화 주필리핀대사는 지난 14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필리핀 외교부 차관과 법무부 차관을 만나 박씨에 대한 조속한 검거와 재발 방지 대책 등을 요구했다. 한편, 박씨 일당 외에 인질강도 혐의로 수배돼있던 한 남성도 최근 현지 교도소를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필리핀 현지 경찰이 쫓고 있는 한국 국적의 수배범만 박씨 일당을 포함해 6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수배범들은 대부분 사기 혐의로 수배가 걸려 있었다. 이 중에는 10건 이상 수배가 걸린 수배범들도 있었다. 그만큼 교정시설 보안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