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 ‘총선 캠프화’ 논란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20.02.03 11:26:26
  • 호수 12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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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또…위인설관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대통령 직속 위원회가 ‘총선용 직함’을 대거 살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앞서 해당 위원회는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의 중심에 있는 송철호 울산시장의 공약을 설계해줬다는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위원회 사무실은 최근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이야기다.
 

▲ 청와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현판식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이하 균형발전위)는 지역발전의 효율적 추진을 위한 관련 중요 정책에 대해 자문하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다. 국가균형발전 특별법 제22조(균형발전위의 설치)를 보면 국가균형발전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관련 중요 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도록 대통령 소속으로 균형발전위를 둔다고 명시한다. 지난 2003년에 출범한 균형발전위는 정부서울청사에 위치해 있다.

압수수색
자료 확보

총선을 앞두고 균형발전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시작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이다. 검찰은 지난달 29일 해당 의혹의 주요 피의자인 청와대 출신 인사 등 전현직 공무원 13명을 전격 기소했다. 지난 6·13지방선거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송철호 울산시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와 여권, 울산 지역 경찰과 공무원 등이 집단적으로 동원됐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공소 사실은 크게 세 가지로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청와대 하명수사 ▲송 시장의 당내 경쟁자 제거, 그리고 ▲송 시장의 공약 지원이다.

검찰은 균형발전위가 송철호 울산시장의 공약 설계에 관여한 정황을 포착하고 움직였다. 지난달 9일 검찰은 균형발전위 사무실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송 시장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공공병원 설립 등에 균형발전위가 관여했는지가 핵심이다. 검찰은 2018년 지방선거 당시 고문단 활동 내역과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고 전했다.


지난달 10일에는 청와대 자치발전비서관실 압수수색을 시도했지만, 청와대의 거부로 자료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자치발전비서관실은 균형발전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검찰은 장환석 전 균형발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을 지난달 29일 기소했다.

송 시장과 그의 핵심 측근인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은 2017년 10월 장 전 행정관을 만나 ‘산재모병원’ 예비타당성(이하 예타) 조사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산재모병원 유치는 청와대로부터 하명 수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김기현 전 울산시장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다. 반면 송 시장은 산재모병원 유치 공약에 대응해 ‘공공병원 유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검찰, 송철호 공약 설계 기소
공공병원 예타 면제 개입했나? 

김 전 시장이 건립에 공을 들였던 산재모병원은 지난 2018년 5월28일 예타에서 탈락됐다. 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마감된 직후였다. 반면 송 시장의 공공병원 유치 공약은 ‘산재전문 공공병원’으로 이름이 변경된 후 지난해 1월 예타를 면제받았다. 송 시장의 다른 공약인 외곽순환고속도로 사업도 예타서 면제됐다.

검찰은 산재모병원의 예타 탈락과 공공병원의 예타 면제 과정에 균형발전위가 개입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예타 면제 등에 관여한 공무원들이 있는지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김 전 시장은 자신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예타 탈락 결과를 선거 직전까지 미뤘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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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검찰은 송 부시장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그의 업무수첩을 입수한 바 있다. 해당 업무수첩에는 “산재모병원이 좌초되면 좋다”는 등 송 시장 측의 계획이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시장은 “예타 조사 결과 발표 7개월 전에 ‘좌초’로 미리 의견을 조율했다는 게 명확히 드러난다”고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는 6·13지방선거를 7개월여 앞둔 지난 2017년 11월 송 시장을 균형발전위 고문으로 위촉했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곽상도 의원실이 입수한 2017년 위촉된 균형발전위 고문단 명단에는 송 시장 외에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해찬 대표, 김두관 의원,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 11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가 균형발전위로부터 정식 위촉장을 받은 것은 2017년 12월이었다.


핵심 공약
지원했나?

검찰이 입수한 송 부시장의 2017년 10월17일자 업무수첩에는 송 시장이 장관급 직함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메모가 적혀 있다고 한다. 송 시장은 당시 변호사 신분이었다. 업무수첩 날짜를 기준으로 약 40여일 뒤 송 시장은 균형발전위 고문으로 위촉된 것이다. 

균형발전위는 송 시장이 고문이 되고 약 한 달 뒤 근거 규정을 만들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때문에 보수 야권은 청와대와 민주당이 송 시장을 울산시장에 당선시킬 목적으로 고문단을 구성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위인설관(필요도 없는데 사람을 임명하기 위해 직책이나 벼슬을 만드는 것)’으로 지방선거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균형발전위는 관련 의혹에 대해 부인했다. 근거 규정을 뒤늦게 만들었다는 의혹과 관련해 균형발전위 측은 “지난 2017년 11월27일 간담회를 통해 정책방향을 논의할 고문단을 구성하기로 하고, 송 시장을 포함한 고문단의 역할과 향후 절차에 대해 논의했다”며 “송 시장 등의 고문단 위촉장 발부는 같은 해 12월18일 고문단 근거규정 마련 이후인 12월26일에 이뤄졌다”고 반박했다.

송 시장은 균형발전위 고문단 첫 회의에 참석해 “울산의 균형발전을 위해 특단의 역할을 할 것”이라며 “국립병원, 외곽순환도로를 설립하기 위해 고문단의 의견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국립병원과 외곽순환도로 역시 송 시장의 공약이다. 만약 균형발전위 핵심 관계자들이 송 시장 공약 설계에 대해 서로 논의했다면, 이는 공직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 검찰의 시각이다.

11→350
조직 확대

검찰은 송 시장을 관련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송 시장은 이 같은 검찰의 결정에 “정치적 목적을 가진 왜곡·짜맞추기 수사, 무리한 기소에 분노한다”며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나에 대한 혐의는 전면 부인한다”며 “황운하 전 울산경찰청장에게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 비위 수사를 청탁했고, 산재모병원 건립 사업의 예타 발표를 (청와대 행정관에게)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검찰의 혐의 내용은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억울해했다.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균형발전위는 지난해 10월, 기존 11명이었던 ‘국민소통특별위원’을 350여명으로 늘렸다. 이들 중 일부는 4·15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야권은 균형발전위가 총선을 목전에 두고 사실상 ‘총선용 직함’을 대거 나눠줬다고 의심한다. 특별위원 중 야당 측 인사가 한 명도 없는 점도 총선용 직함에 무게를 싣는다는 주장이다.
 

조직이 확대될 당시 균형발전위원장은 송재호 전 위원장이었다. 그는 제주 지역 총선 출마를 위해 지난달 21일 사퇴했다. 당시 그는 ‘사임의 변’을 통해 “국가균형발전 완성을 위한 정부와 지방의 가교가 되고자 한다”며 출마를 공식화했다. 지역 정가에선 송 전 위원장이 4선인 민주당 강창일 의원의 불출마로 무주공산이 된 제주갑에 전략공천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사퇴 과정서도 논란이 있었다. 송 전 위원장은 지난달 21일 사퇴했는데 이는 총선 출마자 공직 사퇴시한인 지난달 16일을 넘긴 시점이다.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의 경우 선거 90일 전 사퇴를 규정하고 있다. 

맞춤형 특혜직 제공 의혹
선거 앞두고 조직 확대


그러나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는 송 전 위원장이 이 조항의 대상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 위촉위원 등은 선거 90일 전 사퇴해야 하는 공직자로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선관위의 유권해석에도 송 전 위원장이 ‘현직 프리미엄’을 활용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송 전 위원장의 출격이 예상되는 제주갑 예비후보의 불만이 높다. 이곳에 출마하는 한국당 김영진 예비후보는 송 전 위원장의 사과를 촉구하는 성명을 지난달 29일 발표했다. 그는 “균형발전위가 총선 캠프로 변질됐다”며 “송 전 위원장이 자신의 정계 진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한 것이고, 이에 대한 대가로 전략공천을 획득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어 “송 전 위원장을 비롯한 균형발전위의 이 같은 태도에 강력히 경고를 보낸다”며 “청와대의 안락한 그늘에 숨은 채 여론의 동향을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떳떳하게 양지로 나와 제주도민과 유권자에게 무릎 꿇고 사죄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내부에선 송 전 위원장에 대한 전략공천설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

민주당 박희수 예비후보는 “지역 정서와 지역주민의 결정 권한을 무시하고 중앙서 일방적으로 특정인을 지정해 지역의 후보로 내세운다면, 지난 지방선거서의 패배를 재현할 수밖에 없으며, 제주도 국회의원 선거 전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당 문윤택 예비후보도 “선거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도민들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며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과정’으로 후보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공정한 경선을 촉구했다.


위원장 출마
지역 시끌

검찰은 지난달 29일 송 시장과 송 부시장, 황 전 청장,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 등 13명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또 한병도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장 전 선임행정관, 문 모 전 민정비서관실 행정관 등 김 전 시장 주변 수사와 송 시장 선거공약 논의에 참여한 혐의가 있는 청와대 인사들도 대거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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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