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3 00:01
며칠 전 주말에 아내와 결혼한 지 29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여행사를 통해 강릉에 있는 정동심곡 바다 부채길을 다녀왔다. 사실 필자는 그런 길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곳을 가는 내내 아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동진서 심곡항까지 과거 군사지역으로 통제됐던 지역인데 최근 그곳을 개방하면서 그 구간에 산책할 수 있는 길을 놓았고 그야말로 바다와 혼연일체 될 수 있는 멋진 장소라고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당연히 구미가 당겼고 오랜만에 아내와 호젓하게 손잡고 바다를 끼고 데이트도 하며 아내가 좋아하는 사진도 원 없이 찍어줘야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지니고 정동진에 도착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카메라를 챙기고 아내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저만치 펼쳐진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부푼 마음으로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육두문자와 함께 아내의 손을 놔야했다. 본격적으로 산책로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길이 이어졌는데, 반대편 쪽, 즉 심곡항 쪽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어느 지점은 두 사람은 고사하고 남성 기준으로 한 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격이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가 지난 9월, 필자와 아내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생후 2개월 된 강아지를 분양받아왔다. 바로 사진에 등장하는 강아지, ‘비숑’과 ‘시바’의 믹스 견으로 이름은 ‘둥둥’이다. 둥둥의 등장에 필자나 아내는 적잖이 당황해했다.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일에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의 뒤늦은 간청으로 인해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부부가 걱정했던 부분은 시도 때도 없이 싸대는 똥과 오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물론 딸아이의 노력이 있었지만 2주 정도 지나자 대소변을 스스로 가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베란다 하수구에다 볼 일을 보고는 했으니 그처럼 다행스러운 일은 없다 생각했다. 한동안 순조롭게 동거가 지속되던 어느 날부터 둥둥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집안에 사람만 없으면 온 집안을 휘젓고 눈에 띄는 대로 이빨로 갉아대더니 급기야 집안의 대문(출입문) 기둥을 갉아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로 화가 하늘까지 치밀어 올랐다. 다른 건 차치하고 집안의 중심을 건드리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
먼저 언론에 실린 내용을 인용해본다.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 경선 후보의 핵심 자문그룹이었던 7인회 멤버인 새누리당 김용갑 상임고문은 “박근혜가 좋은 대통령이 될 거라고, 그러니 뽑아달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망스러운 대통령이 됐으니 그것부터 사과하고 싶다. 어디 사과할 데가 없어서 못 하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통해서나마….”』 국회서 박 대통령 탄핵안이 의결되기 전, 노정객인 김 상임고문이 술회한 내용이다. 물론 그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지만, 누구에게 사과하겠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저 막연하게 국민을 향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여하튼 김 상임고문 못지않게 박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기울였던 필자로서도 요즈음처럼 곤혹스런 때는 없다. 주변 사람들 대하기 민망할 정도다. 최근 가까운 친구 여러 명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데 그 이야기가 빠질 턱이 없다. 술잔이 여러 번 돌자 한 친구가 기어코 염장을 지르고 나섰다. “천우 때문에 박근혜 지지했었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뒤이어 박 대통령을 향한 육두문자가 이어진다. 그러자 옆에 앉은 친구가 슬그머니 내 얼굴을 흘기다 거드름 피우며 입을 연다. &ld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 핑계를 대보자. 일전에 <일요시사>를 통해 언뜻 내비쳤지만, 오래전부터 필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5‧16이 발생했던 시점부터 서거하신 지난 1979년까지 필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이 나라를 경영했던 18년 동안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아울러 그 작품을 탈고하면서 내친김에 제목도 ‘박정희를 위한 변명’으로 정했다. 그리고 최순실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한 시점에 그 원고를 가지고 여러 출판사들과 출간을 위한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까지 그 어느 출판사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물론 현 시국상황 때문이다. 박 대통령 때문에 책이 팔리겠느냐는 의미다. 속된 표현으로 박근혜 때문에 엿 된 경우다. 그러나 비단 이 현상이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인 박 전 대통령도 또 육영수 여사도 도매금으로 격하되고 있다. 이와 관련 언론에 실린 내용 그대로 인용해본다. 『제주에선 박 전 대통령 유산인 ‘5·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지난 1990년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지만씨와 박근령씨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내용 일부를 인용한다. 『누나(언니)가 최태민에게 속고 있으니 구해달라. 최태민은 순수한 우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 이번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태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 저희들에게는 힘이 없다.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각하 내외분뿐이다.』 근령, 지만씨가 오죽하면 노 대통령에게 이런 탄원서를 보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사실이 작금에 백일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설가인 필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퇴진을 고려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 한편으로 생각하면 필자가 박 대통령이라도 퇴진하지 않겠다는, 아니 퇴진할 수 없는 형국으로 전환됐다. 바로 정치꾼들의 개입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이재명 심지어 새누리당 대표를 역임했던 김무성 등의 퇴진 개입은 박 대통령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시켜 놓은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신하들의 요구가 집요했다. 하시라도 권력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되는 만큼 상보다는 보위가 우선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효는 신하들의 집요한 주청에 밀려 보위에 올라, 의자왕으로서 국상을 치렀다. 의자왕이 상을 치르고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거처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전하. 신, 윤충이옵니다.” 귀를 곧추세우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중에 근위대장인 윤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ldquo
지난 2005년 1월20일 육영수 여사 피격 관련 문서가 공개되자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이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률 보좌관으로 범인 문세광에 대한 조사에 참여했었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당시 한나라당 의원)을 상대로 전화 인터뷰를 실시한다. 당시 사회자가 김 전 실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1974년 사건 당시 문세광 조사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작업을 한 건가.” 다음은 김 전 실장의 답변이다. “당시 보좌관으로서 8‧15광복식장에서 그 사고가 나자 문세광이 정보부 수사팀에 인계돼서 왔는데, 심문을 받고도 그 다음날 8월16일 오후 5~6시경까지도 묵비하고 일체 질문에 답을 안했다. 그러니까 당시 부장께서 나에게 혹시나 하고 한번 수사팀에 합류해서 말문을 열도록 한번 심문을 해보라고 해서 문세광에게 질문하게 됐다.” 아울러 김 전 실장은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작품 <재칼의 날>로 문세광의 자백을 이끌어냈다고 덧붙였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런지 당시의 실상을 살펴보자. 사건 발생 직후 김일두 당시 서울지검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의심한 시점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다. 방송 토론회를 시청하던 중 그녀의 초점 없는 눈과 현 시점에 확실하게 확인된 유체이탈식 언행, 질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답변으로 일관했던 장면을 목격하고부터다. 이후 그녀의 언행을 관찰하면서 ‘아차’했다. 뭔가 크게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하여 한 날 그를 확인하기 위해 작심하고 박근혜 당시 후보에게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비록 박 후보가 전화를 걸어올 당시에는 ‘발신자 제한 표시’가 등장했지만, 정치판에 짧지 않은 기간 머물렀던 관계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당사자는 박 후보가 아닌 남자였다. 아마도 문고리 3인방 중 한 사람일 터인데, 여하튼 내 신분을 밝히고 박 후보를 연결시켜 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간단했다. 통화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그 당시 너무나 화가 나서 육두문자를 쏟아 부으면서 “왜 당신은 전화하면서 내 전화는 받지 않느냐. 그래 가지고 무슨 놈의 대통령을 하겠다는 게냐”라는 말을 전하라며 그녀에 대한 기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연산군 시절이다. 온갖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그곳에서 두 달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역사 기록에 대한 이해를 위해 첨언하자. 역사 기록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건이 역병과 지진 등이다. 이런 경우 대개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은, 이롭지 못한 사실들을 위장하기 위해 그리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연산군이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차치하고, 연산군이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한 이면에는 장녹수란 여인이 있었다.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연산군을 종 대하듯 하면서 자신의 형부인 김효손에게 관직을 주는 등 국정을 농단하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그 날 참형에 처해지고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다. 다음은 역시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의 경우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광해군에게도 임금의 시호를 받지 못하는 과정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여인이 있었다. 일전에 잠시 언급했던 김개똥, 즉 김개시란 여인이었다. 그녀 역시 광해군을 홀려 국정을 농단하고 인
문득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장시간 통화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모든 욕심 내려놓은 문학인의 입장에서 확고하게 부탁했었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무엇보다 ‘민족 대통합’에 힘써달라고. 그 과정에 삼국시대 당시의 상황과 현실을 대비시켜 말씀 드렸었다.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로 삼등분되었던 당시와 지금에 북한, 영남 그리고 호남으로 분열된 사례를 예로 들면서 반드시 민족통합에 비중을 두어달라고 했었다. 박 대통령은 통화를 마치면서 후일 자리를 마련하여 구체적인 조언을 듣겠다고 밝혔었다. 그를 대비하여 나름 이 나라를 위한 발전 방안을 다듬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후에 나를 부르는 일은 고사하고 전화통화 자체가 이어지지 않았다. 여하튼 필자는 박 대통령과 대화를 마치고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그를 반증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어 장편의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일요시사>를 통해 연재되고 있다.) 각설하고, 지금 이 시점 정치꾼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박 대통령의 위기 나아가 나라의 위기를 저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한 호기로 치부하면서 거국내각이니 하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조선 중기의 학자 이성령이 조선 초·중기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 <춘파일월록(春坡日月錄)>에 실려 있는 글을 요약해본다. 『광해가 탐욕스럽고 음란하였으므로 개똥이가 안팎에서 제 마음대로 하며 이이첨과 한 마음이 되어 어울렸다.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아 기강이 전연 없었으니, 대궐 안의 모든 일이 개똥이의 손에서 한결같이 결정되었다. 궁녀가 광해의 잠자리를 모시는 것도 광해가 개똥이의 허락을 얻어야 되었기 때문에 개똥이가 여러 계집에게서 뇌물을 받았는데, 그 값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광해로 하여금 동침하게 하면 광해가 감히 거스르지 못하였다. 하루는 광해가 개똥이를 데리고 잠자리에 들려 하였는데, 박씨라는 옛 상궁이 땅에 꿇어앉아 간하니 광해가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또 개똥이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을 때는 성내어 말하기를 “큰 덕을 감히 잊는단 말이오. 내 입에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임금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하니, 광해가 당황하고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광해는 임금의 시호를 받지 못한 임금, 즉 광해군을 의미하고 개똥이(介屎, 김개시)는 광해군이 시호를 받지 못하는 과정에
지난 해 여름 <일요시사> 지면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의식세계를 엿보다’라는 제하로 7회에 걸쳐 박 대통령의 문제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회에 신라의 여주 진성여왕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한 바 있다. 잠시 당시의 글을 요약해보자. 『진성여왕은 보위에 오르자 엄연히 가정과 부인이 있는 유부남 위홍을 궁으로 끌어들여 사랑을 나누며 초기에는 그런대로 국정에 의욕을 보인다. 그러나 이듬해에 위홍이 죽자 진성이 돌변한다. 위홍을 대신할 미소년 3명을 몰래 궁으로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급기야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전면에 내세우며 나라의 정사를 맡긴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또한 도처에서 반란이 발생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에 직면하자 진성여왕은 일대 용단을 내린다. <삼국사기>에 실린 그녀의 변이다.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이어 그녀는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에게 보위를 넘기며 조용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왜 당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최근 탈고한 작품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어머니께서 신발 가게에서 검정 고무신 하나를 골라 들고는 발에 맞는지 신어보라 하신다. 신발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신어서 발에 맞으면 그 신발을 사줄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발을 신지 않자 어머니의 성화가 이어졌다. 짐짓 모른 체하며 곁에 있는 하얀 고무신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시선 역시 그곳으로 향했다가 모른 체하며 다시 성화를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자 어머니께서 한마디 하신다. “그러면 깨끗하게 신어야 돼.” 어머니께서는 가격이 비싼 것보다도 쉽게 때가 타는 하얀색을 싫어하시는지 몰랐다. 여하튼 함박웃음을 보이며 “그러마”라고 답하고 하얀 고무신을 집어들었다. 얼른 구멍이 송송 뚫린 검정 고무신을 벗어버리고 하얀 고무신을 신어 보았다. 조금은 작은 듯했다. 그 고무신보다 한 치수 더 큰 신을 골라 신어보았다. 이번에는 너무 커 보인다. 두 신발을 두고 갈등에 빠질 무렵 어머니께서 또 한 말씀하신다. “금방 발이 자랄 테니 큰 신으로 고르라.” 또 생각에 잠겨든다. 큰 신발을 신으면 어머니 말씀대로 오래
최근 언론에 실린 내용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 논란과 관련 자신의 페이스북에 “새누리당이 송 전 장관 회고록을 근거로 진실을 묻고 있다”며 ‘판문점 총질을 사주한 총풍 사건’을 거론한 뒤, “당신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것이 염치다. 죽지 못해 산다는 국민들을 위한 예의다”라고 적었다.’ 상기의 내용을 빌면 박 시장은 ‘총풍 사건’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사주로 발생했다고 단정하고 있다. 동 사건은 지난 1997년 1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앞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측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당시 청와대 행정관을 비롯한 3명이 중국 베이징서 북한의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 박충을 만나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동 사건으로 3명은 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대법원서 징역 2~3년과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5년의 형이 확정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오래전 정치판을 떠난 필자가 왜 이를 문제 삼는지에 대해 논해야겠다. 이야기는 지난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51년(1775) 8월 기록이다. 『임금이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4자를 써서 내려 주고 이르기를 “신수근은 포은(정몽주)과 충의가 같다”하고 호조에 명하여 사우를 만들어 주고 그 곁에 각을 세워서 이것을 새기어 걸게 하라고 하였다.』 영조가 고려시대에 정몽주가 있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신수근이 있어 자랑스럽다고 했다. 아울러 그에게 믿음의 지존이라는 의미의 신도(信度)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런데 정몽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데 반해 신수근이란 인물은 생소하다. 그 사유는 이외로 간단한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데 반해 신수근은 표면상으로 살피면 한 개인, 그것도 조선 최고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에게 충성한 것으로 살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수근의 이면을 살피면 단순히 연산군 개인에게 충성한 게 아니었다. 하여 그 진실을 알게 된 영조가 사우를 만들어주고 또한 편액까지 하사한다. 그 사연을 살펴보자.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폐비 신씨의 오빠)이며 중종의 장인(단경왕후의 아버지)이었다. 흘낏 살피면 신수근의 처지가 참으로 곤란하리란 사실이 한 눈에 살펴진다.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
누누이 밝혔지만, 나는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박 전 대통령께서 짧지 않은 기간 이 나라를 경영하면서 그저 그런 백성에 머물 수밖에 없던 내가 인간군에 포함될 수 있었기 때문. 즉 맹자의 사상 무항산무항심(無恒産, 無恒心 :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는 말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에 따른다. 이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나열해보자. 나보다 인생 오래 사신 분들도 그러하겠지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당시 주변에 삶의 방식은 고려,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집은 수수에 진흙을 바른 초가였고, 지금은 펑펑 쓰고도 남아도는 전기는 그 실체도 알지 못했고, 연료 또한 나무가 전부였고(그런 연유로 마을서 밥을 짓는 과정에 여러 번 화재 발생했다), 수도는커녕 펌프도 없어 개울서 빨래하고 날이 밝자마자 소 몰고 논밭으로 나가 밤이 돼서야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어쩌다 계란 하나 먹으면 여러 날이 든든했고…. 그러던 삶의 방식은 박 대통령이 이 국가를 경영하면서 그야말로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초가가 기와집으로 변했고
지난 19대 국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월급은 받아가면서 일하지 않아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월급 또박또박 받아가도 좋으니 제발 일 좀 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되는데 굳이 일을 하려고 하니 해산하라는 의미라 했다. 그런데 출범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20대 국회를 바라보면 19대가 무색할 정도다. 각설하고, 대한민국 국회는 이 사회서 무용지물을 떠나 지극히 해로운 기생충으로 전락되었다. 입만 열면 헛소리고 일만 벌리면 삼천포로 빠지고 만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모르고 나아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국회의원 개개인 모두 주제 파악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역량은 그야말로 쥐꼬리만 한데 이 사회서 받는 대우는 지나칠 정도로 과도하기 때문이다. 하여 차제에 국회가 이 사회에 필요한지 진중하게 살펴보자는 이야기다. 국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입법 활동에 관해서다. 국회의원들이 가뭄에 콩 나듯 법을 만드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법 정말 그들이 고생해서 만들어낼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해당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조선 최고의 책략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조 9대 임금인 성종 때의 일이다. 명나라 사신인 정동(鄭同)이 한강변에 있는 한명회의 정자, 압구정을 구경하기 원하자 한명회가 성종에게 용봉차일(龍鳳遮日, 용과 봉의 형상을 아로새겨 만든 장막. 임금의 행차 때 쓰는 것) 치기를 청한다. 그러자 당시의 대간(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간하는 사람)들이 한명회의 무례함을 가리켜 ‘임금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있다.’하여 죄 주기를 강력하게 아뢴다. 결국 성종은 그들의 성화에 떠밀려 그저 죄 주는 시늉만, 한명회의 직첩만 회수한다. 그러나 그도 잠시 성종은 한명회의 직첩을 회수한지 두 달도 못되어 다시 복직시킨다. 성종의 조처에 대해 사간들의 반발이 없을 수 없다. 대사간(大司諫) 강자평(姜子平)과 집의(執義, 조선시대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 소속 종3품 직제) 이명숭(李命崇)이 경연이 파하자 성종에게 간곡하게 아뢴다. “두어 달도 못가서 갑자기 복직시킨 것은 악한 자를 징계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성종이 한마디 한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상임고문(이하 손학규)이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원서 문화예술계 지지자들이 주최한 ‘손학규와 함께 저녁이 있는 문화 한마당’을 찾아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여러분께서 저에게 필요한 용기를 주셨다. 그 용기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되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애써 에둘러 표현했지만 필자는 이 발언을 사실상 정계복귀 선언이라 판단한다. 또한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 손학규가 차기 대권의 주인이라 강변하면서 일찌감치 손학규의 정계복귀를 시사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김대중 노벨 평화상 기념관서 열린 ‘평화와 희망의 밤 콘서트’에서 만난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이하 문재인)로부터 “빨리 당에 돌아오셔서 힘을 넣어주시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에 대해 손학규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와 관련해 이야기를 풀어보자. 만약 손학규가 문재인의 제안대로 더민주에 입당하게 되면 손학규는 다시 강진으로 내려가야 한다. 왜 그런지 손학규가 더민주에 입당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더민주는 문재인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손학규가 입당할 경우 문재인 측은 국민의당과 통합 이전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경수가 쑥스럽다는 듯 싱거운 미소를 보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해.” “그러면요.” “글쎄, 속단할 수 없지만 뭔가 다른 사연이 있을 듯 싶어.” 석원이 탄 택시가 오래지 않아 동일의 예감대로 자갈치 시장에 멈추어 섰다. 동일이 경수에게 눈치를 주었다. 급히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멈추자 동일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석원 일행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수가 동일 곁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팀장님, 시간 좀 보십시오.” 시계를 들여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