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신하들의 요구가 집요했다.
하시라도 권력의 공백이 있어서는 안 되는 만큼 상보다는 보위가 우선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효는 신하들의 집요한 주청에 밀려 보위에 올라, 의자왕으로서 국상을 치렀다.
의자왕이 상을 치르고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거처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전하. 신, 윤충이옵니다.”
귀를 곧추세우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중에 근위대장인 윤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좌평 흥수가 알현을 청하였사옵니다.”
흥수, 천문지리 뿐만 아니라 전술에도 능통한데다 과묵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며 따르는 인물이었다.
선왕인 무왕의 책사로서 수차례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들라 이르게.”
문이 열리며 윤충이 흥수와 함께 들어왔다.
“신 흥수, 전하를 뵈옵니다.”
“선왕의 상을 치르느라 수고 많았네. 어서 자리하게나.”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런데, 혼자 왔는가?”
“성충 장군은 혹여 군사들이 방심할까 보아 궁궐 근처의 부대들을 시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울러 소신 혼자 전하께 아뢰라 말씀 주셨습니다.”
“고마운지고.”
가볍게 탄식하던 의자왕이 시선을 윤충에게 주었다.
“장군도 자리하지 않겠는가?”
“아니옵니다, 전하. 소장도 궁궐 곳곳을 둘러보도록 하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윤충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충신들이로고. 그러면 그리하도록 하고, 나가는 길에 술상을 들이라 전하게. 아울러 일을 마치고 장군도 함께 자리하도록 하게나.”
밖으로 나서는 윤충을 살피다 흥수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하, 괜찮으시겠사옵니까?”
“오히려 몸이 피곤할 때는 한잔 술에 의지해봄도 이로울 듯하네.”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듯 흥수가 시선을 의자왕의 얼굴에 주었다.
피곤한 기운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전하, 피곤하시면 다음에 날을 잡으심이 이롭지 않으시겠는지요.”
“한시도 마음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아니 될 일이야.”
“하오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이, 우리 백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보도록 하세나.”
말을 마친 의자왕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장 시급한 일은 조정의 체제 정비, 즉 모든 힘이 전하께 집중되도록 해야 하옵니다.”
“짐의 권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리오만?”
“당연하옵니다. 그리고 권력 강화를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지휘계통이 중요한데, 전하께 조금이라도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은 모두 제거함이 바람직하옵니다.”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새기고는 가볍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힘들고 괴로우시겠으나 선왕의 계비인 사택비와 그 일족을 내치셔야 하옵니다.”
“다음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흥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백제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야 하옵니다.”
“그 이야기는?”
“그동안 백제는 백성을 소홀히 하여 민심이 따로 노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하여 시급하게 이 부분을 해소하여 백제의 모든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야 하옵니다.”
선왕 말기에 행해졌던 여러 폐단에 대해 돌려 이야기하고 있었다.
선왕이었던 무왕은 보위에 앉은 시점에 정열적으로 국사에 매진하였건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수시로 토목공사를 일으키며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또한 밖으로는 신라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자주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도를 넘어섰었다.
보위에 오른 의자왕…백제 중흥 도모
관산성 전투 복수계획…사택비 처리는?
“그 방법이 무엇인가?”
“외람되게도 전쟁이옵니다.”
“전쟁!”
“물론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또 그를 통해 백성들의 사기를 드높이며 결국 백제의 중흥을 도모해야 합니다.”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전하께서는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 전투에서 당한 일에 대한 복수를 천명하시면 될 것입니다.”
“관산성 전투라.”
의자왕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관산성 전투, 554년 진흥왕 시절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찌르고 백제의 성왕을 죽인 전투였다.
“복수 부분을 떠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 바로 전쟁이옵니다.”
의자왕이 전쟁을 되뇌며 잠시 생각에 빠진 순간 궁녀들에 의해 주안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상이 정리되자 의자왕이 상 앞에 자리 잡았다.
“군사도 어서 자리하도록 하게.”
흥수가 멈칫하다가 마지 못한다는 듯이 자리 잡자 의자왕이 궁녀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궁녀들이 두 사람의 잔을 채우자 의자왕이 흥수에게 잔 들 것을 종용하고 단번에 잔을 비워냈다.
그를 살피며 흥수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공손하게 잔을 비워냈다.
“고구려와 왜국은?”
“당연히 우방으로 삼아야 하옵니다.”
“그러면 당나라는?”
“당나라는 지금처럼 변수로 활용하심이 가당하옵니다.”
“변수라 함은.”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여 당나라를 상대로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할 일입니다.”
“신라가 철석같이 매달려 있는데 그게 가능한가?”
“신라 역시 길게 본다면 저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흥수가 궁녀들에게 시선을 주자 궁녀들이 다시 빈 잔들을 채웠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거라.”
잔이 채워지는 모습을 살피던 의자왕이 은근한 목소리로 하명하자 궁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물렸다.
“그런데, 군사.”
의자왕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떨렸다.
“말씀 주십시오, 전하.”
“사택비와 관련한 이야기일세.”
의자왕이 중간에 말을 멈추고 잔을 만지작거리다 흥수에게 마시라는 눈짓을 주고는 단번에 비워냈다.
그 모습을 살피던 흥수 역시 조심스럽게 잔을 비워냈다.
“군사, 충과 효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가?”
“충이라 하시면?”
“물론 짐의 입장에서는 백제를 향한 마음을 지칭하네.”
“전하, 어리석은 소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말씀 주십시오.”
의자왕이 답에 앞서 술병을 잡자 흥수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고개 숙였다.
“전하, 소신이 따르겠사옵니다.”
“아니야, 짐이 따를 일이야. 선왕이셨던 아바마마의 충신에게 그리고 짐을 보필하여줄 군사에게 당연히 짐이 따라주어야지.”
의자왕이 흥수의 잔을 채우고 손수 자신의 잔을 채웠다.
“선왕께서 승하하시기 전에 사택비, 그리고 그 일족과 관련하여말씀을 주셨었네.”
“선왕께서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