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경수가 쑥스럽다는 듯 싱거운 미소를 보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해.”
“그러면요.”
“글쎄, 속단할 수 없지만 뭔가 다른 사연이 있을 듯 싶어.”
석원이 탄 택시가 오래지 않아 동일의 예감대로 자갈치 시장에 멈추어 섰다.
동일이 경수에게 눈치를 주었다.
급히 주차할 곳을 찾아 차를 멈추자 동일이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석원 일행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경수가 동일 곁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팀장님, 시간 좀 보십시오.”
시계를 들여다보자 세 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올라가는 교통편은 어떻게 되는가?”
“비행기는 여덟 시 삼십 분까지 시간대 별로 있고 고속버스는 다섯 시에 막차가 출발합니다.”
잠시 시계를 들여다보던 동일이 앞을 바라보았다.
시장을 배회하던 석원 일행이 한 횟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동일이 그 집이 훤히 바라보이는 장소를 찾아 자리 잡았다.
그리고는 이내 경수에게 손짓을 보냈다. 경수가 석원이 들어간 횟집에 들러 잠시 이곳저곳을 배회하다 돌아왔다.
“빠져나갈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년 놈이 다정하게 자리 잡고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경수와 함께 간단하게 회를 시켜 먹으면서 석원 일행이 나오기를 노심초사 기다렸다.
그러나 다섯 시가 육박해도 그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동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하고 석원이 있는 횟집으로 이동했다.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석원이 계산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던 터였다.
“잠시 뒤를 따라보세.”
두 사람의 얼굴 그리고 주변 정황을 둘러보고 천천히 그 둘의 뒤를 따랐다.
한여름 대낮에 마신 술로 얼굴이 붉게 물든 두 년 놈의 행보가 훤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이외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석원이 중심가가 아닌 바닷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서울행 고속버스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아울러 올라가는 비행기 좌석은 예약하지 않았다.
더 이상 여유 가질 시간이 없음을 판단한 동일이 한적한 곳에 이르자 경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세.”
동일이 짤막하게 답하자 경수가 신속하게 움직여 다정하게 팔짱 끼고 걷는 두 사람의 뒤에 자리 잡았다.
“고타로!”
동시에 두 사람 앞에 다가선 동일이 선글라스를 벗고 나직하게 석원을 불렀다.
순간 석원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었다.
“잠깐 보게나!”
짤막하게 말을 끝내고 천천히 앞서 나갔다.
석원이 동일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나이, 일전에 만경봉호에서 마주쳤던 소름끼치는 모습을 띤 경수의 출현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본능적으로 여인의 손을 풀고 엉거주춤 동일의 뒤를 따랐다.
“따라와!”
석원이 동일의 뒤를 따르자 여인 역시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넋이 나갔는지 어물거리다가는 흐느적거리며 경수의 뒤를 따랐다.
“내일 거사는 포기하는 건가!”
싸늘한 표정 그리고 쇳소리가 묻어나오는 동일의 목소리 아울러 거사 포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지 석원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게…그게 아닙니다.”
“그게 뭔가!”
“거사 포기는 절대로…아닙니다.”
동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적한 곳을 찾아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는데 때가 때인지라 여기저기 행락객들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결정하게!”
“무엇을 말인지요?”
거사 하루전…자갈치 시장서 조우
무거운 마음으로 상경…암살 강요
“내일 거사를 진행할 건지 아니면 일본으로 돌아갈 건지!”
동일이 싸늘한 시선을 주며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할 것입니다.”
그 상태서 어느새 창백하게 변해버린 석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보였다. 동일이 다시 손을 꺼냈다.
“따라와!”
“저, 함께 온…”
동일의 싸늘한 표정에 더 이상 말이 흘러나오지 못했다.
그저 잠시 여인이 있던 방향을 주시했다가는 이내 체념한 듯 동일의 뒤를 따랐다.
주차시켜 놓은 곳에 이르자 이미 경수가 도착해 있었다.
동일이 석원에게 승용차에 타라 지시했다.
석원이 경수의 모습을 다시 살피더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는지 동일이 지시한 대로 엉거주춤 승용차 뒤 왼쪽에 자리 잡았다.
“무슨 사연이었나?”
동일이 담배를 꺼내 물고 한쪽으로 이동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뭔데?”
“저 놈이 조만간에 일본으로 보내준다고 하기에 돈도 받지 않고 몸까지 고스란히 바치며 선선히 따라나섰다 합니다.”
“뭐라, 일본으로!”
“일본에서 몸 팔면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그렇다면 결국 바닷가에서 그 짓거리 하려고 내려왔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동일이 시선을 차로 주었다. 석원이 동일의 시선을 받자 슬그머니 고개 숙였다.
“여인은?”
“죽어서도 함구하라 했습니다.”
“하기야 그 일을 제 입으로 발설 못하겠지.”
동일이 일곱 시 반에 석원의 방을 찾았다.
석원이 어제 일이 있어 그런지 일찌감치 일어나 외출차비를 마친 상태였다.
석원에게 권총과 실탄을 건네고 이어 강철로부터 받은 초청장을 전하면서 다시 여러 사항에 대해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정각 여덟 시에 호텔 룸을 나서도록 했다.
석원의 모습이 멀어지자 룸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지러웠다.
급하게 자신의 룸으로 돌아가 상자를 들고 다시 석원의 방을 찾았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물건들을 한데 모아 준비해간 상자에 집어넣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어 그동안 문석원과 관련한 여러 집기들을 정리하여 여행용 가방에 넣자 경수가 가지고 룸을 벗어났다.
문이 닫히자 동일이 갑자기 뒤바뀐 방을 둘러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난 저녁 무렵 승용차로 부산에서 출발하여 한 번도 쉬지 않고 서울로 이동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경수를 보내고 석원의 룸에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동일이 권총을 꺼내 실탄을 장전하고 석원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살핀 석원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잿빛으로 변해갔다.
“나카소네 상, 아니 지도원 동…”
동일이 싸늘한 표정으로 주시하자 순간 무릎을 꿇었다.
“제발…”
동일이 석원의 이마에 권총을 가져다 댔다.
석원이 마치 자신의 이마에 닿은 총구를 피하기 위함인지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상체를 숙였다.
“고개 들어!”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동일이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석원은 그 상태서 상체만 움찔거릴 뿐 고개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개 들라 하지 않았는가!”
순간적으로 쇳소리가 함께 묻어나왔다.
석원이 마지못해 고개 들어 동일을 바라보았다.
석원의 얼굴에 눈물인지 콧물인지 분간 못할 이물질이 가득 배어 있었다.
“영웅이 되겠는가 아니면 조국과 가족의 파렴치한으로 남겠는가!”
“당연히…조국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석원이 다시 고개 숙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