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생은 과일과 말총을 사들였다. 과일나무는 여전히 열매를 맺었고, 말총도 여전히 장마와 바람에 자라났다. 생산이 멈춘 게 아니었는데도, 시장은 한순간에 흔들렸다. 백성은 값을 탓했고 상인은 입을 다물었으며, 물건 하나 구하기 어려워진 사람들은 장사꾼의 욕심을 저주했다.
허생은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도, 나라를 전복할 야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허생전>의 세계관을 통해 조선의 허약한 경제와 몰지각한 국가를 보여줬을 뿐이다.
단돈 1만냥에 매점매석이 시장을 장악하고 유통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후 300년이 지났다. 과일 상자는 택배 상자로 바뀌었고, 말총은 온라인 결제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시장의 심장은 여전히 유통이고, 그 심장을 쥔 것이 플랫폼 기업의 손이다.
쿠팡, 네이버, 11번가, 지마켓.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쿠팡은 ‘혁신의 얼굴’로 불린다. 새벽에 도착하는 상자, 자동화된 물류센터의 로봇 팔, 끊임없이 달리는 새벽 트럭들. 겉으로 보이는 속도는 세상을 바꾸는 듯하지만, 그 속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 팔린 상품의 대금은 내일 판매자에게 가지 않는다. 쿠팡의 공식 공지와 판매자 계약구조를 보면, 업종에 따라 30일에서 60일까지 결제 지연이 가능하다. 실제로 판매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시즌별로 45일을 넘어가는 사례가 반복된다고 한다.
예컨대 100만원의 물건이 팔리면 계좌에 100만원이 즉시 찍히는 것이 아니라 한 달 반 동안 돈이 쿠팡의 금고 안에서 돌아간다. 100개, 1000개, 10만개의 판매자가 있다면 그 현금흐름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단순한 예로, 월 5000억원 규모의 거래액 중 단 15%만 한 달 동안 회사에 묶여 있어도 750억원의 현금이 회사 내부에서 자본처럼 굴러간다. 이 돈은 소비자가 지불하지만, 판매자가 받지 못한 돈이 된다.
이 구조는 ‘운영 효율’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하지만 효율이란 이름으로 판매자의 자금흐름이 끊어지면, 그 사이 판매자는 월세를 내기도, 재고를 채우기도, 인건비를 주기도 어렵다. 누군가는 버티지만, 누군가는 버티지 못하는데 위메프는 버티지 못한 쪽이었다.
위메프는 쿠팡과 거의 똑같은 방식을 택했다. 점유율을 키우기 위해 낮은 판매수수료를 내세웠고, 대금 정산을 미뤘으며 판촉비를 공격적으로 썼다.
그러다가 결국 올해 파산했다. 법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위메프가 납품업체에 지급하지 못한 미정산 금액은 5800억~6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피해 판매자는 10만명 이상. 그중에는 자금이 묶여 폐업한 소상공인도, 빚을 내서 재고를 메운 자영업자도 있었다.
한 달 이익이 몇십만원 남짓한 소상공인에게 정산 한 번 미뤄지는 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생존의 붕괴였다.
여기서 정작 어이없는 건 사회의 반응이다. “위메프가 문제였다” “실력이 없으니 망한 거다” “시장 원리에 따라 퇴출된 것” 등 사람들은 위메프를 비난했고 언론은 부실 경영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아무도 ‘왜 같은 방식으로 돈을 굴리는 쿠팡은 혁신 기업으로 불리는지’는 묻지 않았다. 쿠팡도 판매자 대금을 붙들어두며, 판매자의 현금흐름을 기반으로 버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현금을 무이자 자금처럼 활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둘의 방식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위메프는 버티지 못했고, 쿠팡은 버텼을 뿐이다. 이 나라에서는 행위가 아니라 생존 기간이 도덕을 결정한다. 버티면 혁신, 무너지면 악덕이다. 그런 기준이라면, 앞으로도 같은 구조는 영원히 반복된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판매자의 대금을 붙잡아 만들어진 현금흐름이 근로자의 안전을 지키는 데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5년간 쿠팡 물류센터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은 여러 차례다. 2021년 10월, 쿠팡 부천센터 20대 노동자가 과로 후 집에서 숨졌다. 2021년 11월, 진천센터 노동자가 야간근무 중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2022년 3월에는 고양 물류센터에서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끼어 숨졌다. 반복되는 죽음,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는 ‘과로와 안전 미비’를 지적했지만, 회사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판매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돈이 노동자의 안전장비, 인력 확충, 휴식 공간, 의료 대응체계로 흘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악덕한 구조를 유지, 강화하는 데 쓰였다.
문제는 단순한 기업 윤리가 아니라, 착취의 재투자다. 약자를 희생시켜 만들어진 자본이 약자를 더 많이 희생시키고 소모시키는 데 다시 사용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은 돈이 흘러가는 곳은 어딜까? 쿠팡은 매년 적자를 내는 쿠팡플레이에 수천억원을 쏟아붓는다. 근로자를 과로로 내몰고 판매자에게 줄 대금을 끌어모아 쿠팡 회원들에게 광고성 유흥비를 제공하듯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를 퍼준다는 얘기다.
손흥민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초청하는 이벤트에만 해마다 700억원이 투입된다. 이런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가 죽고, 판매자가 쓰러진다면, 그것은 경영이 아니라 범죄다.
쿠팡은 ‘21세기형 3S 정책’을 기업 모델로 구현하고 있다. 노동자는 과로로 죽고, 셀러는 대금도 못 받지만, 소비자는 쿠팡이 제공하는 Shopping·Screen·Sports 중계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쿠팡의 현대판 ‘빵과 서커스’의 재해석은 매우 놀랍다. 즉각적 쾌락으로 국민을 달래는 기업, 정치마저도 무력화시키는 이 시대의 새로운 권력은 플랫폼이 됐다. 명백히 드러난 범죄조차 검사들이 나서서 무마시켜 주는 나라에서 기업이란 도대체 어떤 짓을 더 해야 범죄가 될까?
그런데도 왜 국가는 가만히 있을까? 사람들은 위메프를 욕했지만, 쿠팡에 대해서는 침묵해서일까? ‘살아남았으니 성공한 사업’이라는 결론에 우리 사회가 동의를 한 것일까? 성공한 일탈은 혁신이 되고, 실패한 일탈만 처벌된다면 이런 문화 속에서 구조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판매자는 결제 지연에 익숙해지고, 노동자는 위험을 감수하며 일하게 되고, 국가는 침묵을 합리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공은 더 많은 침묵을 요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침묵은 더 많은 피해를 낳는다. 그건 또다시 판매자에게 돌아간다. 사업자의 가면을 씌운 노동자다.
대한민국은 지금 유통의 정점에 서 있다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송, 가장 높은 전자상거래 비중, 가장 편리한 쇼핑 경험. 그러나 정점은 멈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올라야 지켜지는 자리다. 더 올라가지 못하는 순간, 정점은 한계로 바뀐다.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산은 내려올 일밖에 남지 않는다.
유통의 기술은 21세기지만, 유통의 정의는 19세기에 묶여 있다. 클릭하면 오늘 물건이 오지만, 판매자의 대금은 한 달, 두 달 뒤에 들어간다. 소비자는 편안하고 기업은 성장하지만, 그 성장의 그림자에 10만명의 위메프 피해자, 수천억원의 미정산 금액, 반복되는 노동자 사망이 있다.
그래서 <허생전>을 옛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다. 현대판 경제 기사고, 사회 비평이고, 예언서다. 불의에 침묵하는 국가, 국민의 피해를 외면하는 국가에서 다음 피해자는 이미 예정된 미래다. 지금도 누군가의 폐업이나 파산, 죽음으로 치르는 ‘악덕의 사회 비용’을 끊어낼 올바른 정치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올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