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만드는’ 딥페이크 만들어 보니…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4.03.12 11:10:37
  • 호수 14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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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김정은 만나게 해줘?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의 영상이 인터넷서 떠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불법 ‘딥페이크’ 영상. 불법이니 막아야 하지만, 딥페이크 영상은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딥페이크(Deepfake)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인간 이미지 합성 기술이다. 기존의 사진이나 영상을 원본이 되는 사진이나 영상에 겹쳐서 만든다. 딥페이크 기술의 시작은 애니메이션이다. 1990년대에 사람이 말할 때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이 나왔고, 곧이어 통계적 기법을 이용한 얼굴 인식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2014년에는 AI 기술이 현실과 구별이 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좋았지만…

이때부터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의 얼굴을 이용해서 만든 가짜 이미지나 동영상이 등장했고, 딥페이크라는 이름도 이때 붙여졌다. 딥페이크는 영화나 방송계 등에서 이미 사망하거나 나이가 든 배우를 스크린에 되살리거나 초상권 보호 등을 위해 사용됐지만,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악덕 포르노다. 무엇보다 문제는 딥페이크 영상을 만드는 것이 너무 쉽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딥페이크 기반 성적 허위 영상물에 대한 시정 요구 건수는 2020년 473건, 2021년 1913건, 2022년 3574건, 지난해 1~11월에는 5996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이미 2021년 한 해 대비 건수가 213.4% 늘어난 것이다.

방심위는 연중무휴로 운영되는 모니터링서 관련 피해를 접수해 게시물 접속 차단, 작성자 계정 해지, 게시물 삭제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일요시사>는 직접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봤다. 직접 해보니 컴퓨터나 영상 전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컴퓨터만 쓸 줄 알면 가능했다.

딥페이크 영상을 만드는 방법은 스마트폰 앱과 인터넷 사이트의 두 가지로 나뉜다. 딥페이크 영상 제작 앱은 13개가 있었는데, 대부분 무료 사용이 가능했다. 다만, 무료는 영상에 워터마크(동영상 편집기를 사용했다는 표시)가 있었고 유료 사용 시 워터마크 표시가 없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앱으로 만든 딥페이크 영상은 실제처럼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중세시대 복장에 얼굴을 합성하거나, 애니메이션 영상에 얼굴을 합성하는 정도였다.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명화 모나지라의 얼굴에 다른 얼굴을 합성시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헤어스타일이 어울리는지 확인하거나, 유명 연예인의 외모를 흉내내는 수준이었다. 누가 봐도 재미로 만든 딥페이크 영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점점 늘어나는 이미지 합성 영상
처벌·규정 전무…피해자만 늘어나

장난삼아 만든 게 티가 나더라도 문제가 있다. 한 딥페이크 앱 개발자는 자신의 앱을 홍보하기 위해 “오픈 소스 AI를 활용하면 무료로 옷을 벗기는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중 한 가지 앱은 영상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정교하게 합성할 수 있었지만, 원본의 이미지가 흐려져서 합성이라는 게 티가 났다. 영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가 볼 경우 깜빡 속을 수 있을만 했다.


반면 사이트서 만드는 딥페이크 영상은 영상과 사진을 합성했을 때 사실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정도로 정교했고, 무엇보다도 영상을 만드는 것이 너무 쉬웠다.

딥페이크를 만드는 사이트는 검색만 해도 바로 나왔다. 해당 사이트는 영어로 돼있는데, 쉽게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 수 있다고 광고했다. 영상을 만들고 싶으면 사이트서 제시한 파일을 다운받아야 했다.

파일을 컴퓨터에 설치하면 사이트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이메일이나 비밀번호 등 간단한 정보만 요구됐다. 이후 로그인 시 바로 영상을 만들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변경하고 싶은 얼굴 영상인데, 이마저도 원본 영상이 아닌 유튜브 링크만 있으면 가능했다.

영상을 선택하면 하단에 바꾸려는 얼굴이 생성된다. 이후 일정 시간을 기다리면 영상이 완성된다. 해당 사이트는 유일하게 무료 사용 가능한 딥페이크 제작 사이트인데, 유료 이용 시 워터마크가 생략된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든 영상은 ‘원본 영상’을 모르면 딥페이크 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결국 딥페이크 영상은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기에 범죄에 악용된다. 딥페이크 영상이 가장 많이 악용되는 곳은 음란물 영상이다. 기존에는 유명인들만 딥페이크 범죄의 대상이 됐다면, 이제는 일반인이 자신의 모습이 들어간 음란물로 인해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20대 직장인 A씨는 지난해 직장 상사 B씨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있는 사진으로 음란물을 제작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해자인 상사 B씨가 직장 동료의 사진을 음란 영상에 합성해 PC에 보관해 두고 있다가 여자친구에게 발각된 것이다.

B씨는 A씨 뿐만 아니라 다른 직장 동료들의 사진으로도 음란물을 제작했다. B씨와 C씨가 다투는 과정서 영상이 온라인 메신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송되기까지 했다. 이를 알게 된 A씨는 B씨를 고소했지만, 수사를 진행한 경찰은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유포 목적으로 영상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게 불송치 결정의 이유였다. 2020년 6월 ‘딥페이크 처벌법(개정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이 도입됐지만 B씨의 사례처럼 타인의 사진을 이용해 딥페이크 음란물을 만들어 보관하는 행위 자체는 현실적으로 처벌하기 어렵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반포 등의 목적으로 사람 얼굴·신체·음성을 대상으로 한 영상물을 제작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영리 목적으로 제작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으로 가중처벌된다.

한 법조인은 “해당 처벌 조항은 ‘반포 등을 할 목적으로’가 범죄 성립을 위한 구성 요건이다. 따라서 개인 소지 목적의 허위 영상물 제작은 처벌 대상이 아니다. 반포 목적이 있었는지는 수사관이 입증해야 하는데 해당 사실관계에서는 그런 입증이 될 수 없는 구조로 특이한 우연적 상황에 의한 피해 사례로 보인다”고 말했다.

A씨는 “처음부터 고소하려고 증거를 모은 게 아니다 보니 증거가 별로 없어, 다시 법적인 처벌을 요청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지금도 주변 지인들 연락을 받고 아무렇지 않게 잘살고 있다”고 호소했다.


뉴스 제작
댓글 조작

딥페이크가 가장 크게 악용되는 시기가 있는데, 바로 선거철이다. 4·10 총선을 한 달 여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허위 사실 비방 AI 딥페이크 특별대응 모니터링반’을 신설하고 딥페이크 게시물에 대응하고 있지만, 딥페이크 기술을 따라가는 데 한계가 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는 “3가지 프로그램으로 딥페이크 게시물을 교차 검증하며 판별하고 있지만, 정확히 감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프로그램은 참고만 할 뿐 결국에는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기존에 알려진 가짜 이미지, 영상 방식 외에도 생성 AI로 댓글 여론조작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될 여지도 있다.

이 관계자는 “선거법상에서는 딥페이크 영상, 이미지만을 규제하고 있어 AI 댓글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심각한 사안의 경우 ‘업무방해’로 판단할 수 있어 정상적 여론 형상에 영향을 주는 AI 댓글이 발견되면 수사기관에 통보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딥페이크가 선거에 악용되는 것은 세계 각국이 공통으로 겪는 현상이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대선에선 후보자들이 상대 후보를 비방하고 자신을 띄우기 위해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는 경쟁자인 세르히오 마사 후보가 중국 공산당 지도자처럼 보이도록 AI로 생성한 포스터를 SNS에 올렸다.


반면 자신은 사랑스러운 사자처럼 묘사한 AI 생성 이미지를 올렸다.

두 후보 측이 만든 AI 콘텐츠에는 ‘AI가 제작했다’는 점을 명시했다. 사람들을 속이려 하기보다는 특정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활용한 것이다.

영상 만드는 시간은?
‘5분’이면 감쪽같이

지난해 미국 공화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당선되면 경제위기가 오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는 내용의 가상 미래를 보여주는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었다.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생성형 AI를 활용한 것이다.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 시장 선거에선 AI가 만든 노숙자 이미지를 활용해 자신이 당선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해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했다.

정반대의 상황이 한국에 있었다. 경찰이 틱톡과 페이스북 등에 올라온 46초 분량의 윤석열 대통령 영상이 딥페이크가 아닌 원본 영상 짜깁기라는 내부 결론을 내리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선거법 위반’ 등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만 과장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향신문>은 지난 5일 “경찰이 지난달 논란이 된 윤석열 대통령 ‘풍자 영상’을 자체 개발한 딥페이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부 결론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며 “해당 영상이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실제 존재하지 않은 장면을 새롭게 생성한 딥페이크라기보다는 원본 영상을 짜깁기한 수준이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지난달 서울경찰청의 의뢰로 자체 개발한 딥페이크 탐지프로그램을 사용해 해당 영상의 딥페이크 여부를 검토했다.

해당 신문은 “탐지 결과는 ‘진짜(Real)’로 나왔다. 이는 곧 영상 자체가 진짜고 AI를 이용한 딥페이크가 아니라, 실제 영상을 단순히 짜깁기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미다.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영상으로 판단되면 ‘가짜(Fake)’라는 결과가 나오게 돼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울청은 이런 결과를 담은 회신을 받은 뒤에도 해당 영상이 ‘딥페이크가 아니다’라고 밝히지 않았다”며 “‘대통령을 겨냥한 최초의 딥페이크 영상이 퍼지고 있다’는 논점이 커지던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아닌데
맞다고

신문은 “되레 지난달 26일 열린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의 정례 회견서 배석한 경찰 관계자는 관련 수사 근거를 설명하면서 공직선거법 82조의 8 ‘딥페이크 등을 이용한 선거운동 금지’ 조항을 거론했다”며 ”이 관계자는 ‘공직선거법 82조 8에 선거운동을 위해 인공지능을 이용해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딥페이크 영상 등이라고 표현돼있다’며 선거법 위반 검토 가능성을 시사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이를 두고 경찰이 윤 대통령 풍자 영상이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려다 보니 해당 영상이 딥페이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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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