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3 00:01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여수 순천 10·19 사건’ 이른바 여순사건을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 학자로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도 역으로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피해자를 몰아붙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과정서 욕설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 특히 역사학자는 과거 일어난 사건을 연구하고 기록해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는 사명감을 원동력 삼아 나아간다. 역사학자의 연구와 기록은 그 자체로 다시 역사가 된다. 산적한 연구 소재 ‘여수 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은 1948년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일부 군인이 정부의 ‘여순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생했다. 전남과 전북, 경남 일부서 이념 간 대립이 극에 달했고 이 과정서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됐다. 여순사건은 오랜 시간 수면 아래 묻혀 있었다. 사건의 명칭조차 권력의 입김에 따라 멋대로 바뀌었다. 희생자는 불명예를 씻지 못했고 그 유족은 70년 넘는 시간 동안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그러다 더 늦기 전에 여순사건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 결과 20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매년 10월이면 전남 여수와 순천에 슬픔이 내려앉는다. 지금껏 아무도 희생자와 그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70여년, 세대가 두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부가 손을 내밀었다. 지난 19일은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74주년 되는 날이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인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순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으킨 반란을 정부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군대서 촉발 여수·순천 등 전남과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무력 충돌‧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오랜 시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에 대한 요구가 있어왔지만 정부는 큰 움직임이 없었다. ‘74년 눈물, 우리가 닦아줘야 합니다’. 지난 19일 전남 광양시에서 여순사건 74주기 합동추념식이 정부 주최로 열렸다. 여순사건 추념식이 정부 주도로 진행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추념식에는 정부 대표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김영록 전남지사, 여수·순천·광양·고흥·구례·보성 등 전남 6개 시·군 단체장과 부단체장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숨죽이고 있던 73년이었다. 한을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헤아릴 수 없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여순사건 희생자들에게 한줄기 빛이 드리웠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된 것.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여수‧순천사건(이하 여순사건)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불린다.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시 신월동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일부 군인 2000여명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에 반대하면서 촉발됐다. 하루 만에 순천까지 장악한 군인들은 구례·곡성·남원, 벌교·보성·화순, 광양·하동 방면으로 진격했다. 현대사 비극 이승만정부는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은 여수와 순천 등 군인들이 진격했던 대부분 지역을 탈환한 뒤 이적행위자를 색출하고 보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맞아죽거나 총살당했다. 당시 희생자 수는 1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전라남도에서 총 3차례에 걸쳐 피해 조사를 진행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마지막 조사 시점인 1949년 10월25일 기준으로 1만1131명이 사망했다. 여순사건의 직·간접적인 원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