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 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주가 다시 한번 역사의 중심이 됐다. 천년 고도가 이번엔 세계의 외교무대가 된 것이다. APEC 참가자 숫자도 미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요국 정상과 장관급 인사, 언론, 경제계 대표단 등 약 2만여명이나 된다.
지난 27일부터 시작된 APEC 정상회의 주간은 ‘경주 슈퍼위크’로 단순한 국제행사 기간이 아니다. 한미·미중·한일·한중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리는, 한반도가 다시 세계 질서의 시험대에 오르는 기간이다.
필자는 경주 APEC에서 한국 외교가 ‘처음처럼, 지금처럼, 나중처럼’의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처럼’은 외교의 근본이다. 한국 외교의 뿌리는 한미동맹, 자유무역, 그리고 다자 협력의 세 기둥 위에 서 있다. 이번 APEC의 주제 ‘연결, 혁신, 번영’은 그 뿌리를 다시 확인하는 선언과도 같다. 그래서 의장국으로서 한국은 근본적인 외교 차원에서 APEC 정상회의에 임해야 한다.
AI 협력, 인구 구조 변화 대응 등 이번 APEC 의제는 기술과 사람을 동시에 잇는 새로운 다자 질서의 모색이다. 세계가 블록화와 보호무역으로 흔들릴수록 원칙은 더 귀해진다. 외교의 ‘처음처럼’은 바로 이 원칙의 힘을 잃지 않는 자세다.
그러나 외교는 원칙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현실의 파도 위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감각, 그것이 ‘지금처럼’의 외교다.
‘지금처럼’의 외교는 감정이 아닌 기술이다. 한쪽을 택해 다른 쪽을 버리는 외교가 아니라, 모두의 신뢰를 얻으면서 스스로의 공간을 확보하는 정밀한 기술이다.
이 균형의 감각을 우리가 경주에서 보여줘야 한다.
오늘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선 관세 협상과 안보 패키지가, 30일 미중 정상회담에선 기술 패권과 공급망 전략이, 같은 날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선 역사와 미래, 경제협력의 새 단추를 꿰는 논의가 이어진다. 그리고 다음 달 1일 한중 정상회담에선 경제 복원과 안보 균형이 주제로 다뤄진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 복잡한 회전축의 중심에 서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현실주의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전략주의, 그리고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보수 외교 사이에서 한국은 동맹과 자율, 경제와 안보, 역사와 미래라는 세 개의 균형을 동시에 지켜야 한다.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관세는 무기’라고, 시진핑은 ‘협력이 곧 평화’라고, 다카이치는 ‘역사를 직시하되 미래를 보자’고 말할 것이다. 이 세 메시지 사이에서 한국이 보여줘야 할 답은 현실을 직시하되, 원칙을 잃지 않는 지금처럼의 용기다.
외교는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그래서 ‘나중처럼’의 외교가 중요하다. 오늘의 회담이 내일의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가 미래의 국익을 결정한다. 경주 APEC의 무대 이면에는 오는 2030년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AI, 반도체, 에너지 공급망, 인구 구조 변화, 이 모든 의제가 우리 미래의 생존과 직결된다.
‘나중처럼’의 외교는 당장의 손익을 넘어 10년 뒤의 세계를 설계하는 것이다. AI 협력, 디지털 무역, 인구 위기 대응은 더 이상 부차적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술과 사람, 그리고 가치의 균형 속에서 한국이 중견국 외교의 모델을 완성하는 핵심이다.
‘경주 선언’이 단순한 문서로 끝나지 않으려면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외교의 구조적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경제·기술·인구’의 세 변수를 아우르는 종합 전략, 그것이 ‘나중처럼’의 외교가 제시해야 할 의제다.
경주는 1000년 전 신라의 수도이자,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점이었다. 불국사의 석등은 과거의 빛이 아니라 미래의 상징이고, 보문호의 물결은 시대를 넘어 흐르는 외교의 상징이다. 이번 APEC이 경주에서 열린다는 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1000년의 도시’ 경주야말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외교 무대기 때문이다.
한미·미중·한일·한중 정상회담의 경주 개최는 문명과 전략, 이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상징이다. 경주가 1000년 전엔 동아시아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세계 외교의 중심이 됐다는 게 자랑스럽다.
정치에서 ‘처음처럼’은 의리의 언어지만, 외교에서 ‘지금처럼’은 전략의 언어고, ‘나중처럼’은 비전의 언어다. 의리는 관계를 지탱하고, 전략은 국가를 움직이며 비전은 역사를 만든다. 즉, 이번 경주 슈퍼위크는 한국이 ‘처음처럼·지금처럼·나중처럼’의 외교를 통해 전 세계로부터 시험받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원칙을 잃지 않되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넘어 미래를 설계하는 용기, 그것이 ‘처음처럼·지금처럼·나중처럼’의 외교다.
경주의 하늘과 땅과 자연은 1000년을 버텼다. 이제 우리의 외교도 그처럼 굳건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세계의 눈이 다시 한국을 향한 APEC 정상회의 기간에 우리가 외교적 수사가 아닌 진심 어린 행동으로 그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앞으로도 한국 외교가 ‘처음처럼’을 기반으로 ‘지금처럼’, 그리고 ‘나중처럼’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