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신임 헌법재판관 정계선·조한창

빨리 도는 탄핵 시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정계선 전 남부지법원장과 조한창 변호사가 헌법재판관 업무에 돌입했다. 아직 9인 체제가 완성되진 않았으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심리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두 사람은 각각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추천한 인물이다.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무리 없이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조한창·정계선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면서 헌법재판소 ‘8인 체제’가 됐다. 헌법재판소법의 ‘7인 이상 심리’ 규정을 충족하게 된 헌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최우선으로 처리할 방침이다. 특히 최선임인 문형배·이미선 재판관 등이 퇴임하는 오는 4월18일 이전에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8인 체제
결판낸다

지난 2017년 3월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건은 8인 체제로 선고됐다. 당시 헌재는 “8인의 재판관으로 재판부가 구성되더라도 탄핵 심판을 심리하고 결정하는 데 헌법과 법률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8인 체제를 갖춘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심리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조·정 재판관은 지난 2일 헌재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한 뒤 이 사건을 심리 중인 전원재판부에 합류하고, 예정된 재판관 회의에 참여했다.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을 논의하는 재판관 회의는 매주 1회씩 열리는데, 재판관이 충원된 만큼 주 2회 이상으로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헌재 관계자는 “할 일이 워낙 많아 신임 재판관들도 곧바로 업무에 착수할 것이다. 심리가 빨라질 수 있다”고 했다. 헌재는 이달 중순 정식 변론기일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오는 4월 중 윤 대통령 파면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문·이 재판관이 오는 4월18일 임기 만료로 퇴임하면 재판관 충원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기에 그전에 선고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접수 63일 만에,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은 91일 만에 선고된 것을 고려하면 2~3월에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재판관들도 대부분 “신속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새로 합류하는 조 재판관은 후보자 시절, 탄핵 심판 기간에 대해 “신속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있다”면서도 “당사자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고 충실하게 심리하는 것이 요구돼, 적정한 심리 기간을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탄핵 심판 선고 시기의 가장 큰 변수는 윤 대통령의 적극적인 변론 태도다. 윤 대통령은 노·박 전 대통령과 달리 공개 변론기일에 직접 출석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적으로 다투려는 의지가 크기 때문에 증인 수십명을 신청하고, 송달 절차 등을 문제 삼으면 심판이 지연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앞서 윤 대통령 측이 탄핵이 소추된 직후 관련 서류를 수령하지 않자 헌재는 우편으로 보내고 송달된 것으로 간주해 처리했다.

조·정 재판관은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 심판 등 다른 탄핵 사건 9건에도 투입된다. 헌재에 역대 가장 많은 탄핵 사건(10건)이 몰려있어, 헌재소장 권한대행을 제외한 기존 재판관 5명은 1인당 1~4건씩 탄핵심판 주심을 맡고 있다.

박근혜 탄핵 때처럼…걸림돌 제거
윤 심리 속도 4월 이전 결론 목표


최근 접수된 탄핵 사건 주심을 새 재판관들에게 재배당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재판관들의 사건 처리 부담을 나누고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심리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으로 풀이된다.

조 재판관은 서울 상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9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18기. 육군 법무관을 거쳐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서 법복을 입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해 상고심 보조 경험이 있고, 사법연수원 교수로도 활동했다. 평택지원장과 두 차례 수석부장으로 발탁돼 사법행정 경험도 있다.

조 재판관은 양승태 사법 농단 연루 의혹을 받았다. 사법 농단은 2011년 9월~2017년 9월 당시 법원행정처가 정부의 관심 사건 재판에 개입하거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는 등 사법부와 판사의 독립을 침해한 여러 갈래의 사건을 일컫는다.

그는 2015년 5월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로 일하던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직 상실 무효’ 행정소송과 관련해 ‘각하(소송을 제기할 요건을 갖추지 못해 사건을 종결하는 것)는 부적절하다’는, 일종의 재판 가이드라인이 담긴 문건을 법원행정처 인사로부터 전달받았다.

조 재판관은 문건을 파쇄하면서도 담당 부장판사에게 ‘각하에 대해 법리적으로 검토하는 게 어떻겠냐’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조 재판관에 대해 “헌법 질서 수호가 긴요한 시점서 재판 개입 등에 협력한 반헌법적 이력이 있는 그가 헌법재판관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24일 인사청문회서 이 주제는 깊이 있게 논의되지 않았다. 국민의힘이 추천한 조 재판관의 인사청문회까지 불참한 탓에 청문회는 좌석 절반이 빈 상태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야당 단독으로 진행한 청문회서 첫 질의자로 나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민병덕 의원은 사법 농단 의혹부터 꺼내들었다.

조 재판관은 해명을 하려다 “깔끔하게 사과할 건 사과해야 한다”는 민 의원의 질타를 받고는 거듭 고개를 숙이며 관련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사과할 건 사과”
거듭 고개 숙여

그가 또 다른 재판 독립 침해 사건에 연루됐던 사실도 청문회서 언급됐다. 같은 당 김한규 의원은 2008~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태’를 지적했다. 신 전 대법관 재판 개입 사태는 신 전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사건을 특정 재판부에 ‘몰아주기’ 배당하고 사건 처리 방향을 제시한 사건을 말한다.

조 재판관은 당시 관련 형사사건을 집중 배당받았던 형사13단독 판사로, 재판 전제가 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의 위헌성이 논란되는 상황 속에서도 지체 없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질의에 나선 김 의원은 “왜 상당수 사건이 본인에게 배당됐다고 생각하는가?” “신 전 대법관이 특별히 부탁하면서 배당했나?” “(윗선의)어떤 부탁이나 압박도 없었는가?”라며 조 재판관을 압박했다. 조 재판관은 당시 재판 관련해 아무런 부탁도, 압박도 받지 않았다며 “제가 부당한 지시에 맞춰서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조 재판관은 윤 대통령이 ‘12·3 불법 계엄’을 명분으로 제기한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부정선거와 관련해 대법원에 여러 소송이 제기됐지만 모두 인정되지 않았다”며 “개인적으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서 충분히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조 재판관은 특히 비상계엄 선포 당시 상황을 두고 “저희가 생각하는 전쟁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며 “문헌상 나오는 ‘사변’이라는 사태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계엄 선포 사실을 알았을 때) 황당한 느낌이었다”며 “그때 상황과 나타난 자막의 내용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부합되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한덕수(전) 권한대행이 ‘야당이 특별검사 후보를 추천한 것이 위헌적’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동의하는가”라는 민주당 박희승 의원의 질문에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이행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답했다. 헌재는 2019년 “특검 후보자의 추천권을 누구에게 부여할지는 국회서 입법 재량에 따라 결정할 사항”이라고 결정했다.

조 재판관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헌재서 열린 취임식서 “우리 대한민국 헌법이 추구하는 헌법적 가치는 권력의 자의적 지배를 배격하는 법치주의를 통해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영역서 해결돼야 할 다수의 문제가 민주적 정당성을 지닌 기관들의 합의를 통해 해결되지 못한 채 사건화되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 등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며 “배려와 공감을 기본으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를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겠다”고 강조했다.

정 재판관은 1969년 8월2일 강원도(현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서 태어났다. 1987년 충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인권 변호사인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진로 변경을 결심해, 이듬해인 1988년 재수를 통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진학해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사시 수석 합격자들은 신문에 크게 인터뷰가 실리던 시절이었다. 정 재판관은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서 “법조계가 너무 정치 편향적이다. 검찰의 5·18 관련자 불기소와 미지근한 6공 비자금 문제 처리 등에서 볼 수 있듯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법대로라면 전직 대통령의 불법 행위도 당연히 사법 처리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의대·법대
동시 합격

1998년에 사법연수원을 제27기로 수료한 후, 서울지방법원(현 중앙지법)서 예비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해 서울행정법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등 여러 곳에서 일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연수를 다녀왔다.

헌법재판소에 파견돼 2년간 헌법연구관을 지냈고, 법원으로 돌아와 서울고등법원서 1년간 항소심 사건을 다루다가 2013년 지법부장으로 울산지방법원에 전보됐다. 당시 울산지법의 첫 여성 형사합의부장을 맡아 2013년 울산 계모 살인사건서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계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이후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8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전보돼, 여성으로는 최초로 공직비리 뇌물 등 부패사건 전담 재판부인 형사합의27부 재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맡았던 유명한 재판이 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이다. 검찰서 징역 20년·벌금 150억원·추징금 111억4131만7383원을 구형했고, 법원에서는 징역 15년·벌금 130억원·추징금 약 82억7000여만원을 판결했다.

판결 배경에 대해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이 전 대통령의 행위는 직무 공정성과 청렴성 훼손에 그치지 않고 공직사회 전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죄질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임 시 비트코인을 재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사기죄의 객체인 재산상 이익에 해당한다고 봐 유죄를 인정함으로써 비트코인을 재산적 가치가 있는 디지털 전자정보로서 재산범죄의 객체가 된다고 처음으로 판단한 판결을 하기도 했다.

장애인과 여성, 아동, 난민, 이주민, 소수자 등 인권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활성화하고, 법원 내·외부의 성평등 의식 확산과 제도 보완, 성범죄 사건 심리 절차 및 판단 방법의 개선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 재판관은 대법원 산하 커뮤니티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서 활동했다. 초대 회장인 오경미 대법관에 이어 2023년 후임 회장(2대)으로 뽑혔다.

2023년 3월, 4월 임기가 만료되는 이선애, 이석태 전 헌법재판관의 후임으로 유력했으나,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 이력 때문에 헌법재판관 추천위서 위원들 간 격론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판사들이 사법부 양대 최고기관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포진한 상황서, 특정 출신 독식으로 갈등 해결 기능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했다는 것이다.

결국 정 재판관은 최종 후보에 들지 못했고, 여성 법관으로는 정정미 판사가 헌법재판관 지명을 받았다.

조, 사법농단 연루 의혹 사과…합리적 평가
정, 법조계 “실력 최고…이제야 날개 달아”

2023년 7월 임기가 만료되는 조재연, 박정화 전 대법관 후임 최종 후보 8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여성 법관으로 신숙희, 박순영 판사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 임기가 끝나는 박정화 대법관이 여성이기도 하고,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의 대법관을 뽑는 인사기 때문에 사실상 신숙희, 박순영, 정계선 셋 중 하나는 대법관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 거부권 행사 논란 끝에 아무도 지명되지 못했다.

차기 대법관 또는 헌법재판관으로 유력했으나 진보 성향으로 평가받는 연구회에 몸담고 있었다는 배경으로 최근 연이어 낙마했다. 법원 안팎에선 정 재판관이 특정 정치 성향을 가진 판사로 분류되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실력 측면에선 최고의 판사”라며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모습이 강성으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재판관은 최근 취임사에서 끊임없는 소통과 도움을 언급하며 헌법재판소의 정신을 되새겼다.

정 재판관은 “우리는 지금 격랑 한가운데 떠 있다”며 “연이은 초유의 사태와 사건이 파도처럼 몰려와도 침착하게 중심을 잡고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기대어 신속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짚었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수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헌재의 사명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며 “헌재 구성원분들이 계셔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출발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받치는 지혜의 한 기둥이자 국민의 신뢰를 받는 든든한 헌법재판소의 한 구성원으로서 끊임없이 소통하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나아가는 믿음직한 동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최 대행은 및 지난달 31일 국회 추천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3명 가운데 2명(정계선·조한창)만 임명하고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최 권한대행은 마 후보자에 대해 “여야가 다시 임명에 협의해 달라”고 언급했다.

최 권한대행의 이 같은 결정을 두고 ‘반헌법적’ 행위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이날 정책조정회의서 “최 부총리는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즉각 임명하라”며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3명에 대해 선별적으로 임명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삼권분립 침해이자 위헌 행위”라고 비판했다.

무의미한
정치 성향

최 권한대행이 주장한 ‘여야 협의 요구’는 거짓 논란마저 일고 있다. 지난해 11월 여야가 국회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민주당 2명, 국민의힘 1명을 추천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국회의 헌법재판관 선출권을 침해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우 의장은 “헌법재판관 임명은 절충할 문제가 아니다”며 “국회가 선출한 3인의 헌법재판관 후보는 여야 합의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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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