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검수완박 이후 수사권을 놓고 벌이는 검경의 힘겨루기가 점입가경이다. 수사권을 뺏긴 검찰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라도 경찰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택했다. 지난해 ‘인하대 성폭력 추락사’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살인죄 혐의 적용을 망설인 반면, 검찰은 결단을 내렸다. 이들의 승패는 끝까지 지켜봐야 안다. 앞서 검찰이 ‘계곡 살인사건’에서 비슷한 전략을 펼치다 망신살만 뻗친 전례가 있어서다.
지난달 19일 인천지검은 ‘인하대 성폭력 추락사’ 사건의 가해자 A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해 8월9일 A씨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준강간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후 지난해 9월13일 1차 공판이 열린 지 3개월 만에 1심 재판 절차가 마무리 수순에 들어섰다.
국민적 공분
엇갈린 판단
검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해 7월15일 새벽 인천시 미추홀구 인하대 캠퍼스 내 건물에서 또래 여학생 B씨를 성폭행하려다 추락시켜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B씨가 건물 2층과 3층 사이 복도 창문에서 추락하자, B씨를 구조하는 대신 증거인멸을 시도한 뒤 달아났다. A씨는 자취방에 머무르다 당일 오후 경찰에 체포됐다.
사건 정황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적 공분은 엄청났다. 경찰의 수사 진척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될 정도였다. 성난 여론은 엄벌을 원했고, 관심은 자연스레 경찰의 혐의 적용으로 쏠렸다. 수사 초반부터 살인죄 적용 가능성이 언급됐다.
범행 당시 상황을 놓고 봤을 때 A씨가 B씨를 고의로 밀어 추락시켰을 개연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설령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더라도, 추락 이후 구조나 신고 없이 현장을 이탈한 점 등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범행 나흘 만인 지난해 7월19일 KBS <용감한 라이브>에 출연해 “(건물에서)떨어지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119에 신고하지 않고 구조도 하지 않았다”며 “최소한 미필적 고의 또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까지 갈 수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경찰은 관련 물증을 확보하는 대로 죄명을 살인으로 변경할 방침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경찰은 A씨를 강간치사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이후 A씨 진술을 통해 파악된 사실관계에 따라 구속영장 신청 때는 준강간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하지만 경찰은 끝내 A씨에게 살인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A씨의 고의성을 입증할만한 명백한 물증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통상적으로 살인죄를 적용하려면 살인 장면이 직접적으로 확인돼야 한다.
실제로 사건 현장을 직접 비추는 CCTV가 없었고, A씨가 찍은 동영상에는 소리만 녹음됐던 데다 A씨는 계속 고의성을 부인해왔다. 사정당국 입장으로선 살인죄 혐의 적용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정당국이 무리하게 혐의를 적용하더라도, 법원에서 이를 ‘치사’로 뒤집는 경우도 종종 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준강간치사 혐의로도 중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점 또한 경찰의 판단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관련 법상 (준)강간치사는 10년 이상의 징역부터 무기징역까지, (준)강간살인은 무기징역부터 사형까지 형벌에 처할 수 있다.
‘치사냐 살인이냐’ 같은 사건 정반대 판단
검, 보강 후 살인죄 적용…무기징역 구형
판례상 (준)강간치사는 통상 11~14년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죄질에 따라 형량은 달라질 수 있다. 준강간치사 혐의에서 죄질의 불량함을 최대한 강조한다면, 무기징역 선고를 이끌어낼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사형 선고·집행 가능성이 희박한 우리나라의 사법체계를 감안할 때, 준강간치사 혐의로도 준강간살인에 준하는 형량을 받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경찰이 무리한 혐의 적용 대신 이 같은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게 법조계 일각의 관측이다. 혐의 입증 안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처벌 수위까지 함께 고려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찰은 A씨를 검찰에 준강간치사 혐의로 송치하면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를 추가했다. 일명 ‘불법 촬영’ 혐의다.
관건은 동영상에 피해자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과연 혐의 입증이 가능할 것인지 여러 의견이 오갔던 바 있다. 하지만 경찰은 내부 법률 검토 끝에 혐의 추가를 결정했다. 이는 A씨의 죄질이 불량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풀이됐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경찰과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인천지검은 A씨를 강간 등 살인 혐의로 기소하는 한편, 불법 촬영 혐의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A씨의 휴대전화를 디지털 포렌식해 분석했지만, A씨의 B씨 신체 촬영 의도를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송치 이후
혐의 변경
혐의는 일부 인정되지만 증명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반면 검찰은 핵심 혐의에 관해선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검찰은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직후부터 2주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전담수사팀을 꾸려 보강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검찰은 A씨에게 부작위를 넘어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작위’란 법이 금지한 행위를 직접 행한 것을 의미한다. 즉 검찰은 A씨가 추락한 B씨를 방치해 B씨가 사망에 이른 것이라고 본 게 아니다. 대신 A씨가 직접 위력을 발휘해 B씨를 추락시켰고, 추락 자체가 B씨의 직접적 사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이 같은 검찰 판단에는 법의학 감정 결과가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8월 검찰은 법의학자인 이정빈 가천대 의과대학 석좌교수와 함께 사건 현장을 조사했다. 당시 이 교수는 “B씨가 외력에 의해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의 소견을 남겼다.
이들은 창문 높이·벽의 두께·피해자의 손 등에서 단서를 찾았다. 창문의 높이와 벽의 두께를 합치면 약 130㎝에 달한다. B씨의 신장을 고려했을 때, 스스로 창문 밖을 향하려면 바깥쪽에 손을 짚어 몸을 끌어올렸어야 한다. 하지만 벽면과 B씨 손 중 어디에서도 ‘짚은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B씨의 복부 상단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창문틀에 눌린 듯한 자국이 발견된 것과는 상반된 결과다.
이 교수는 “외벽 페인트가 산화하면서 묻어나는 물질이 피해자의 손에서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미뤄 피해자의 팔이 창문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상태에서 배가 오래 눌려 있다가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B씨의 혈중알코올농도가 사고가 벌어지고 수 시간 뒤에 혈액을 공급받은 뒤 측정됐음에도 0.19%에 달한 점을 눈여겨봤다. 추락 당시에는 농도가 더욱 높았을 것이고, B씨가 스스로 떨어지기는 어려운 상태였을 것이란 게 이 교수 소견이다.
검찰도 B씨의 추락 장면이 직접 찍힌 CCTV 영상은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A씨가 복도 창문을 여는 순간은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맞다”
힘겨루기
A씨는 B씨 추락 직후 수십초 간 곁에 머무르다 도주했다. 검찰은 이 교수에게 ‘A씨가 구호·신고에 나섰다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겠느냐’고도 문의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추락 직후 이미 뇌를 비롯한 장기들에 다발성 손상이 진행됐다고 판단했다. 구호 여부와 무관하게 B씨를 추락시킨 행위 자체가 사망을 초래했다는 의미다.
결국 검찰은 이를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 대신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 적용을 단행했다. 재판부는 지난달 12일 검찰 요청에 따라 현장검증을 벌였다.
형사 처리 과정만 놓고 본다면, 이 사건의 진행 양상은 지난해 벌어진 ‘계곡 살인’사건과 유사하다. 공교롭게도 두 사건은 모두 인천지검으로 향했다. 인천지검은 이 사건들에서 경찰 판단을 넘어선 혐의 적용을 감행했다. 보강수사 과정에서 혐의를 뒷받침할만한 추가 증거를 대거 입수했기 때문이다.
인천지검은 계곡 살인사건 수사 당시 이은해와 조현수가 피해자를 살해하기 위해 수차례 공모·시도했던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검찰 수사 내용에 따르면 이은해와 조현수는 피해자를 가평 계곡에서 빠뜨리기 이전에 낚시터 익사, 복어 독 독살 등을 계획·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인천지검은 이 같은 내용을 이들의 혐의에 추가했다. 동시에 이들의 혐의를 작위에 의한(직접) 살인으로 변경했다.
당초 경찰은 이들에게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통상적으로 작위에 의한 살인이 부작위에 의한 것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는다.
인천지검은 직접 찾아낸 증거를 통해 이들의 ‘고의성’을 피력했다. 또 가평 범행 역시 ‘정신적 지배(가스라이팅)에 의한 극단적 선택’이므로, 직접 살인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검찰은 혐의 확대에서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이 사례를 이용해 당시 한창 논란이었던 ‘검수완박’법 제정을 반대하는 입장문을 냈다. 당시 인천지검은 입장문에서 “검수완박 상태였다면 경찰에서 확보한 증거만으로 계곡 살인사건 피의자들을 기소해 무죄판결을 받았거나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이 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해당 사건 보강수사 과정에서 혐의를 확대(변경)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찾아낸 게 검수완박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경 의견 넘어선 기소
‘계곡 사건’ 판박이?
하지만 검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체면을 구겼다. 재판부가 “혐의 인정이 어렵다”며 이례적으로 공소장 변경을 직접 요구하면서다. 결국 검찰은 공소장에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추가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이은해의 직접 살인 혐의에 무죄를,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결과적으로는 당초 경찰이 적용한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가 받아들여진 셈이다. 검찰은 직접 살인 혐의가 무죄판결을 받은 점에 반발해 항소했다.
‘전례’가 있는 만큼, 인천지검이 이번 재판에서 성과를 내 이를 검수완박 ‘여론전’에 활용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성과를 낸다면 검수완박법의 타당성을 비판할 때 쓰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는 검찰의 망신살 뻗치기가 재현될 경우, 혐의 확대의 저의 자체가 의심받을 수 있다는 지점이다. 자칫하면 ‘검찰이 경찰 수사의 한계를 지적할 요량으로 과도한 차별성 부각에 골몰한다’는 식의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검찰이 끝까지 A씨의 진술 번복을 이끌지 못한 점이 변수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물론 검찰이 작위에 의한 살인을 입증할만한 주변 정황을 상당수 확보한 건 사실이다. 다만 범행 장면이 찍힌 CCTV 등 ‘스모킹건’이라 불릴만한 증거가 없는 것도 일리 있는 지적 중 하나다.
이 때문에 A씨의 관련 자백 확보가 더욱 관건으로 꼽혔다.
A씨는 지난해 11월부터 구형 직전까지 18차례 반성문을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하면서도 시종일관 고의성을 부인해왔다. A씨 측은 막판까지 ‘살인 대신 준강간치상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A씨가 알리바이를 조작한 여러 정황을 포착·지적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했다. 이를테면 검찰은 A씨가 경찰 최초 조사 때 “B씨를 직접 추락시켰다”며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한 진술 기록을 근거 삼아 ‘A씨 행위에 고의성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A씨는 이후 조사부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검수완박
공격 근거?
1심 판결은 오는 19일로 선고될 예정이다. 검찰 구형대로 무기징역이 선고되면, A씨는 역대 최연소 무기수가 된다. 또 선고 결과에 따라 검경 둘 중 하나는 자존심을 구길 공산이 크다. 살인죄가 인정되면 경찰의 부실한 수사력이, 인정되지 않으면 검찰의 무리한 기소가 입길에 오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