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잡는’ 로맨스 스캠꾼과 직접 대화해보니…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10.05 09:24:02
  • 호수 13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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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도 빠지는 구애의 덫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그는 UN에 소속된 의사이기도 하고, 미군일 때도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노인일 때도 있고, 집안에서 재산을 상속받을 청년이기도 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국인이 아니며 외국에 있다. 그들은 SNS를 통해 “내가 한국에 가면 2배로 돈을 갚을게. 나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니?”라고 말하며 자신의 통장을 보여준다.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은 SNS에서 이성 혹은 동성에게 호감을 산 후 다양한 수단으로 돈을 빌려 갈취하는 사기 수법으로 로맨스(romance)와 스캠(scam)의 합성어다. 이들은 주로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 계좌 추적이 어렵고, 검거된다고 해도 ‘사기죄’만 적용받아 ‘전자금융 거래법’을 적용받는 보이스피싱에 비해 양형기준도 낮다.

결국은 돈
느는 추세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상대를 믿고 돈을 준다는 게 말이 될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기가 가능한 것은 SNS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나본 적 없는 상대방의 개인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 또 인터넷으로 쉽게 상대방에게 접근할 수 있고 대화도 할 수 있다.

온갖 달콤한 말로 꼬셔 상대방을 이용한다. 직접 만날 필요가 없이 메시지만 주고받는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에 따르면 미국 내 로맨스 스캠 피해 건수는 2018년 2만1400건, 피해 금액 1억4300만달러(약 1600억원)에서 2020년 3만2800건, 피해 금액 3억400만달러(약 3356억원)로 증가했다.


2년 만에 피해 건수는 53%, 피해 금액은 137%나 급증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언택트, 비대면 확산이 로맨스 스캠의 증가 원인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국내에선 로맨스 스캠을 ‘기타 범죄’로 분류한다. 이 때문에 정확한 범죄 발생 통계가 확인되진 않는다. 하지만 사이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로맨스 스캠이 포함된 인터넷 사기 범죄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17년에는 10만7271건, 2018년 12만3677건이 발생했고, 2019년에는 15만1916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31일 개인 SNS로 메시지가 왔다. 기존에 알던 사람도 아니었고 한국인도 아니었다. 말투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부터가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 사기꾼인 것이 티가 났다. 

상대방은 “안녕, 나의 친구야. 이렇게 멋진 친구와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데이비스이고 샬롯 노스 캐롤라인 미국입니다. 당신은 누구시죠?”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상대방은 프로필로 벚꽃 사진을 설정해놨고, 아이디는 중국어였다. 어설픈 한국어는 인터넷 번역기를 사용한 느낌이었다. 데이비스는 재차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아내가 없지만 딸이 있었고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 번이나 방문했다고 자신을 설명했다.

데이비스와 딸은 한국에서 부산과 제주도를 방문했다. 아름다운 나라였고,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그는 곧 결혼과 아이의 여부를 물었고 “없다”고 답하자 “나는 혼자야. 몇 년 전에 아내를 잃었지. 그래도 나에겐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 미국에 온 적이 있니?”라고 물었다.


이런 식의 사적인 대화가 계속됐다. 곧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재촉했다. 이어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나는 정형외과 의사다. UN 의료팀과 함께 일한다. 지금 예멘에서 평화 유지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 중 부상당한 군인을 돌본다”고 말했다.

불쑥 SNS로 시작해 투자 사기로 진화
피해 늘지만 잡히지 않는 ‘기타 통계’

그는 정말 ‘연인’처럼 연락했다. 사랑한다며 꽃 사진을 보내기도 했고, 자신의 딸을 소개하기도 했다. 딸 이름은 ‘신디’로 8살이었다. 지금은 기숙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의사 생활 때문에 아이를 자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도 전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지속됐다. 그는 로맨틱한 음악 유튜브 링크를 보내며 “친애하는 나의 아내” “허니” “아이 러브 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한국에서 너를 만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정말 ‘연인’인 양 말이다. 호응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데이비스는 지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대화가 이어지자 UN 의사로 일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며 힘들다고 토로했다. 은퇴하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며, 데이비스가 있는 캠프가 공격당해 본인의 상황이 매우 위험하다고도 말했다. 

식량은 모두 약탈당했고 쉬지도 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밥은 하루에 한 끼만 먹을 수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너무 피곤하다” “안정된 생활과 아내를 가지고 싶다” “너와 동거해서 같이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는 계속해서 연락을 했다. 연락하는 빈도만 확인해도 그가 UN 소속 의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화에 시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친분이 쌓였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어느 날부터 예멘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곧 예멘에서의 근로 계약이 종료돼 한국에 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예멘 정부와 UN이 자신을 이라크에서 근무시키려고 회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이라크로 갈 생각도 없고, 한국으로 무조건 갈 거라고 밝혔다. 이 계획을 바꾸려면 한국행 비행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UN 의사
달달 메시지

도와줄 수 없다고 하자 “제발 도와줘. 내가 한국에 가면 꼭 돌려 주겠다. UN 의사가 한국으로 오려면 한국에 있는 지인이나 배우자가 수수료를 지불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계속 돈이 없다고 하자 이내 연락이 끊겼다.

이것이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이다. SNS로 연인처럼 대화를 이어가다가 돈을 요구한다. 본인은 특수한 직업이라는 것을 계속 어필했다. 로맨스 스캠의 사기꾼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군인 등 특수직종 사람들이었다.


기혼자가 로맨스 스캠 사기에 걸리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 7월27일 A씨는 SNS을 통해 알게 된 외국인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외국인은 원유 배달을 하는 사람으로, A씨에게 항상 다정하게 대화했다. 

외국인은 A씨에게 “원유 대금이 모자란다. 내 은행 사이트를 알려줄 테니, 나 대신 내 통장에 3만달러 돈을 받고 이체해달라”고 부탁했다. A씨는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에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계좌에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을 물어본 A씨에게 외국인은 “송금 수수료로 500만원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돈이 필요한 것에 부담을 느끼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계속 연락이 왔고, 다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외국인은 이번에 방법을 바꿨다. 아들이 있는데 몸이 아파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00만원을 빌려주면 한국에 올 때 두 배로 갚겠다고도 했다. 통장도 보여줬다. 통장에는 35억원이 있었다. 그 뒤로 외국인은 ▲배 고장 수리비 ▲변호사 비용 ▲구조 비용 등 계속 돈을 요구했다. 벌금이 있다며 벌금도 요구했다.

A씨는 모든 돈을 주고 나서야 이것이 로맨스 스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피해 금액은 7000만원. 경찰에 신고했지만 피해 금액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이혼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고 있다. 

전형적 방법
그래도 속아 


A씨는 “빌려준 돈은 모두 대출받은 돈이다. 한국에 오면 두 배로 갚아주겠다는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또한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게 무섭다. 처음에는 죽을까 생각도 했다. 남편에게는 말하고 이혼하자고 해야 하는 게 아닌지…”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로맨스 스캠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이번에는 SNS로 신뢰를 쌓은 후 ‘수익률이 좋은 가상자산 투자를 함께하고 싶다’고 제안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상대방이 의심하지 않도록 처음 몇 번은 수익을 발생시켜 주고 약간의 손실도 나도록 위장한다. 이렇게 상대방은 로맨스 스캠 사기라는 것을 감쪽같이 속는다.

B씨는 SNS로 말레이시아 사람 C씨와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C씨는 곧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어봤고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카카오톡으로 넘어간 후 C씨는 자신을 블록체인 전문가라고 밝히며 “블록체인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다. 어플을 다운로드해 암호화폐를 산 뒤, 다른 코인 주소로 옮겨 어플을 통해 선물거래를 하는게 아니라 다른 해외사이트로 암호화폐를 옮기고 거기서 수익을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수익이 났다. B씨는 다시 “코인 충전 이벤트가 있다. 5만 암호화폐를 충전하면 8500 암호화폐를 주는 행사”라고 설명했다.

당장 돈이 없었다. 하지만 B씨는 C씨의 조언으로 수익을 얻은 적이 있기 때문에 C씨를 신뢰하고 있었다. B씨는 돈을 빌려서 코인 충전 이벤트에 참여했다. 하지만 5만 암호화폐 조건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조건이 안 되니 신용에 문제가 생겼다고 출금 거부를 해버렸다. 계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만 암호화폐를 더 내야 한다고 했다. 그제야 B씨는 C씨가 사기꾼인 것을 알게 됐다.

“한국 가려면 한국인이 수수료 내줘야”
“사기당해도 이혼당할까 혼자 속앓이”

돈을 찾아야 했던 B씨는 C씨에게 “너를 경찰서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C씨는 “너가 몸캠을 찍어서 나에게 보내주면 나머지 묶여있는 암호화폐를 해결해주겠다”고 답했다. 이를 거절하자 C씨와의 연락은 끊겼다. B씨의 피해 금액은 1650만원이다.

지난해에는 로맨스 스캠 투자 사기로 큰 돈을 날린 사례도 있었다. 자영업을 해온 D씨는 지난해 5월 글로벌 상장지수펀드(ETF) 브랜드인 ‘아이 쉐어즈(iShares)’를 사칭한 신생 암호화폐 거래소에 3억5000만원을 투자했다. 

지인 소개로 접속한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만난 홍콩 시민운동가가 추천한 거래소였다. 그는 텔레그램에서 투자자에게 특정 코인 종목의 매수·매도 정보를 흘렸다. D씨는 실제로 ‘승률 100%’라는 그의 지시대로 코인을 사고팔았고 매일 평균 10% 수익을 올렸다.

단체방에는 수익 인증 사진이 올라왔다. 100만원으로 시작한 C씨의 투자금은 350배로 늘어났다. D씨는 이내 텔레그램 단체방을 맹목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국을 맞이한 건 불과 두 달이 지난 후였다. 두 달이 지나자 거래소는 출금도 거부한 채 잠적했다.

당시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져 D씨는 자신의 가게를 정리했고, 돈은 공중분해됐다. D씨는 “경찰에 신고하러 갔지만 잡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투자 텔레그램 방은 D씨를 비롯해 70명 이상의 피해자로부터 최소 48억여원을 편취했다. 가짜 코인 거래소였고, 로맨스 스캠 사기를 벌였던 조직이 만든 것이었다.

모바일 채팅 앱에서 만난 중국인에게 2억5000만원을 사기당한 E씨도 있다. E씨가 사기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피해액이 바이낸스와 후오비 글로벌로 빠져나갔다.

E씨의 사건을 접수한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이들 거래소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해외 거래소라 한국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활용해 거래소에 등록된 신원 정보 협조를 요구한 것이다. 아이쉐어즈 사칭 사기로 코인 셜록에 접수된 국내 피해자들의 신고 건수는 77건에 이른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 규모가 훨씬 클 것으로 전망된다.

날뛰어도
잡기 어려워

하진규 법률사무소 파운더스 변호사는 “로맨스 스캠이 대부분 해외 앱과 대포통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범을 잡기는 어렵다”며 “인스타그램처럼 유명한 앱을 사용해도 가짜 계정인 탓에 본범을 잡는 것은 보이스피싱과 마찬가지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현금 인출책이나 대포통장 계좌주들은 사기 방조 혐의나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처벌할 순 있다”고 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경찰청-인터폴 로맨스 스캠 합동단속

경찰청은 지난 7월부터 10월 말까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와 함께 경제범죄 3차 합동단속을 추진한다고 지난 7월4일 밝혔다.

한국 경찰은 보이스피싱 등 초국경 경제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3월 인터폴에 3년간 17억원을 펀딩했고 매년 합동단속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두 차례 합동단속으로 경찰청에 관련 범죄자 86명을 송환했으며, 범죄 수익 23억원을 동결했다.

이번 합동단속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아시아 11개국, 유럽 8개국, 아프리카 4개국, 미주 2개국 등 총 25개국이 참여한다.

단속 대상 범죄는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투자사기 ▲몸캠피싱 ▲자금세탁 등이다. 참가국들은 사건정보와 수법을 공유하고, 해외거점 콜센터를 합동단속한다.

또 주요 피의자를 합동단속하고 강제송환하며, 범죄 수익을 동결·환수하게 된다.

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 및 각국 인터폴 등과 협업해 보이스피싱 등 주요 경제범죄 피의자를 검거하고 범죄자금을 동결하는 등 단속성과를 최대화하겠다”고 밝혔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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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