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태일 기자 = 얼마 전 정부의 양곡창고를 관리하는 창고주가 정부의 눈을 피해 수십억원어치의 쌀을 빼돌리다 법의 철퇴를 맞았다. 상당 기간에 걸쳐 범행이 저질러졌지만 관리감독 기관인 지자체는 알아채지 못했다. 경찰이 본격 수사에 나선 가운데 양곡 보관창고의 관리 소홀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지난 5월20일 경북 예천군 풍양면 낙상리의 한 정부 양곡 창고서 양곡 수천t이 없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달 1일 경북도는 각 시·군 보고자료를 바탕으로 ‘실 재고’가 유지되고 있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군량미가 포함된 정부 양곡 관리엔 허점이 많았다.
“눈대중으로 조사”
예천군의 양곡 관리 공무원 박모(52·6급)씨는 지난 5월 창고주 김모(46)씨가 관리하는 정부 양곡 3000여t 중 절반 이상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냈다. 박씨는 창고 입구부터 9m 높이로 양곡 포대가 쌓인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창고주에게 ‘창고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통로를 확보해 달라’고 세 차례 통보했다.
하지만 김씨는 “내가 관리하는 정부 양곡을 다 조사하려면 크레인, 지게차 등 장비를 빌리는 비용과 인건비 등으로 큰돈이 든다”며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공무원 박씨는 정부 예산으로 장비를 동원해 조사에 나섰고 800kg들이 2240여포대(1792t)가 없어졌음을 확인했다.
김씨가 관리하는 다른 두 창고에서도 정부 양곡 수백t이 비어 있었다. 시가로는 쌀이 총 26억원어치 사라진 상태였다. 예천군은 경찰에 김씨를 고발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2014년부터 정부 양곡을 빼돌리고 있었다. 자기가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정부 양곡을 도정(搗精)해 서울·대구 등 대도시 소매상들에게 현금을 받고 팔았다. 그가 훔친 양곡 중엔 군수용(군량미) 쌀도 포함돼있었다.
김씨는 대를 이어 양곡 창고(8개)를 관리하며 매월 정부에서 2500만원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정부 양곡 불법 반출 시점을 기준으로 관리 감독했던 예천군과 관계 공무원에 대한 경찰 수사가 불가피해 졌다.
특히 경찰은 김씨가 몰래 반출한 정부양곡이 하루아침에 반출키 어려운 엄청난 양이란 점을 감안해 언제부터 어디로,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김씨의 범행이 장기간 조직적인데다 빼돌린 정부양곡의 규모로 미뤄 조력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김씨는 건설업 등 사업에 잇따라 실패하면서 자금난을 겪었고 카지노 도박에도 손을 대 가산을 탕진했다고 전해졌다. 김씨는 정부 양곡 외에 지역 농민들이 맡겼던 쌀 8억원어치도 횡령했다. 그는 구속 상태에서 1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경북도는 지난 5월22일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정부 관리 양곡 보관 창고 특별 점검’ 공문을 받아 도내 23개 시·군과 농협 등 양곡 관련 기관에 발송했다.
경북도의 23개 시·군이 관리 중인 정부 양곡은 5월 말 기준 41만여t이다. 보관 창고는 678곳(개인 334, 농협 344곳). 도는 작년에 정부 양곡 보관료로 창고주들에게 142억원을 지급했다. 정부 양곡은 기초생활수급자 등이 받는 복지용, 학교 급식용, 쌀 가공 제품용 등으로 쓰인다. 군인들 급식용, 전시(戰時)를 대비해 비축하는 군량미도 정부 양곡이다.
공무원 1명이 수십만톤 담당…모르는 게 당연
쌀값 오르면 팔고 내리면 채워 시세차익 남겨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쌀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광역자치단체에 1명, 각 기초자치단체에도 1명뿐이다. 상주시는 정부 양곡 창고 숫자(124개)가 안동시(30개)의 4배 이상이지만 양곡 담당 공무원은 다른 지자체처럼 1명에 불과했다.
정부 양곡 재고 조사 기간이 짧다는 점도 문제다. 정부 양곡 창고가 50개 이상이면 8일, 90개 이상이면 10일 이내에 조사를 끝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해 연 2회(3월 말, 10월 말) 정기 조사만 하기도 버겁다. 수시 점검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실정이다.
경북 지역의 한 양곡 담당 공무원은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양곡 포대가 가득 쌓인 창고가 많아 정확한 양을 계산하기 어렵다. 대개 눈대중으로 한다”고 말했다.
정부 양곡을 다루는 일부 업자는 쌀 가격이 올라가면 양곡을 내다 팔고 가격이 내려가면 사들여 창고를 다시 채우는 식으로 장사해 시세 차익을 남긴다고 한다. 창고가 비어 있을 때 재고 조사가 시작되면 다른 지역 업주에게 쌀 포대를 빌려오거나 빈 공간을 가구나 팔레트(포대를 받치는 플라스틱 판) 등으로 채운 다음 주위를 양곡 포대로 둘러치는 창고주도 있다고 한다.
이런 눈속임을 공무원이 적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자체가 정부 양곡 창고에 CCTV를 설치해 통제·관리하면 창고주의 불법행위를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재 경북도의 정부 양곡 창고 678개 중 CCTV가 설치된 곳은 83곳뿐이다. 그나마 행정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경북도서 정부 양곡을 관리하는 한 업자는 “정부 양곡 입·출고, 품질 유지, 도난 책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창고주가 진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양곡을 빼돌릴 수 있다”면서 “정부가 전체 양곡의 보관 상태를 실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정기 재고조사를 상시 재고조사로 바꾸고 창고마다 꽉 찬 정부 양곡 숫자 파악을 위한 적재방법과 CCTV 설치, 창고 주 의무 보험 가입 등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다.
또 무조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적재보다 넘쳐나는 정부 양곡에 대한 유통방안을 마련하고 창고보관 관리에 정부 양곡 마크를 확인할 수 있게 적재하고 이동이 원활하게 창고 공간 확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창고 주마다 맺은 연대보증을 개인 보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번 사건을 통해 농민들의 피해도 잇따랐다. 연대 보증인 6명은 수억원(4명 4억9000만원, 2명 3억2000만원상당)을 물게 됐다.
현재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예천지소의 도움으로 김씨에게 ‘물품 대금 청구소송’을 진행했으나 창고 주 소유의 정미소 부동산 등이 이미 상주법원에서 경매 진행 중이어서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농민들의 피해 보상이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창고주가 개인 사업에 따른 경영난과 각종 부채로 이미 창고주의 소유 재산은 우선 채권자들의 근저당과 세금을 지급하고 나면 농민들에게 돌아갈 배당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책 마련 시급
피해를 본 한 농민은 “창고주가 사업을 무리해 선친이 물려준 많은 재산을 다 날렸다”며 “우리 같은 농민들은 1년 농사만 바라보고 사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평생을 서로 믿고 거래한 곳인데 그나마 법원서 결과가 좋아 조금이라도 피해액을 돌려받을지 모르겠다”며 한숨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