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호민 기자 = 두통약 업계 부동의 1위 ‘게보린’을 팔지 않는 약국이 있다.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어서다. 일부 약국에선 같은 이유로 최소량만 구비해 놓고 직접적으로 게보린을 찾는 환자 외에는 판매하지 않는다. 게보린에 대한 일부 약국들의 소리 없는 ‘불매운동’인 셈이다.
게보린의 주요 성분 가운데 하나인 이소프로필안티피린(IPA)은 2008년부터 부작용 논란이 시작됐다. 피린계 약물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부작용을 일으킬 위험이 있어 논란이 됐다. 제기된 부작용 논란은 호흡곤란, 혈관부종, 어지럼증, 인지기능 저하, 경련, 부정맥, 심인성, 쇼크 등으로 다양했다.
권장하지 않아?
논란이 고조되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1년 게보린 제제의 안정성을 입증할 것을 제조사에 지시했다. 그 결과 지난해 6월, 식약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없다고 최종 판단을 내리고 일부 주의사항을 수정하는 선에서 시판을 유지했다.
그러나 <일요시사>가 서울 시내 10곳의 약국을 취재한 결과 약사들은 식약처의 판단에도 게보린의 안정성에 대체적으로 의문을 품고 있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보적인 입장을 밝힌 1∼2곳의 약사를 제외하고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존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이들 약사들은 “진통제가 필요할 경우 게보린보단 IPA가 함유되지 않은 다른 제품을 권한다”고 이구동성했다. 일부 약사는 안정성을 확신할 수 없어 게보린을 판매대에서 빼기도 했다.
게보린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약국의 한 약사는 “손님의 안전을 담보로 안전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게보린을 판매할 수는 없다”면서 “지난해 식약처에서 해당약품의 안전성을 확인했지만 약사들 사이에선 여전히 논란이 있어 판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약사 역시 “게보린의 경우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어 정확한 역학조사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식약처의 결과를 신뢰하기 어려워 손님에게 권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게보린 안전성에 의문을 갖고 있는 약사들은 식약처의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 다수였다.
서울 종로 지역의 한 약사는 “식약처의 결과에서 게보린의 안전성을 인증됐지만 당연히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질 줄 알았다”며 “좀 더 수긍할 수 있는 조사결과가 나와야 약사들이 신뢰하고 게보린을 판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식약처 조사결과가 부실했다는 주장은 시민단체서도 나온 바 있다. 건강한 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는 식약처 재평가의 근거로 사용된 연구보고서 결과에 대해 게보린 제제의 안전성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다고 결론 내렸다.
우선 게보린 제제의 부작용 판단 범위가 좁다는 점이다.
건약 측에 따르면 IPA와 유사한 피라졸론계 약물인 아미노피린과 설피린은 발암, 혈액질환 유발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시판이 금지됐다. IPA 또한 혈액학적 부작용 뿐만 아니라 인지기능 저하, 경련, 부정맥, 심인성 쇼크 등의 다양한 부작용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하지만 보고서는 무과립구증과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혈액학적 부작용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주요한 부작용을 검토하지 않았다.
다양한 증상의 부작용 수면위로 부상
식약처 인증에도 안전성 문제로 불신
또한 식약처가 해외서 안전을 이유로 게보린 제제가 판매금지된 점을 적극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보고서는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에서 안전 문제로 게보린 제제가 퇴출됐다는 WHO(세계보건기구) 보고서를 언급하면서도, 시판 회사에서 이를 부인한다며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각 국가 보건당국이 제출한 보고서를 근거로 작성된 WHO(세계보건기구) 자료를 믿지 않고 회사 측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건약측은 “게보린 제제의 안전성 문제를 판단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해외 상황 자료가 이처럼 흐지부지 된 것은 본 보고서의 큰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건약 측은 연구 방식에서도 한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식약처의 연구는 데이터마이닝과 생태학적 연구, 환자-대조군 연구 세 부분으로 진행됐다.
데이터마이닝은 식약처의 자발적 부작용 보고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 약물 부작용 보고 중 0.16%만이 게보린 제제 보고건이었다는 점과 한국에서의 낮은 부작용 보고율은 데이터마이닝 기법이 본질적인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건약 측은 설명했다.
생태학적 연구는 게보린 제제의 판매량과 부작용 발생률과의 상관성을 본 것이다. 그러나 해당 질병은 WHO서도 인정하듯 발병률이 매우 낮은 질환으로서 개인에서의 약물 노출 결과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건약 측 판단이다.
또한 IPA 위험 논란으로 사용량이 급감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연구 방법의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환자-대조군 연구가 진행되었던 점도 결과의 신뢰성을 낮추고 있는 부분으로 지적됐다.
식약처의 부실 재평가 논란으로 약사들 사이에서 이 같은 안전성 논란이 해결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여전히 게보린은 판매되고 있다.
한 약사는 “수십년간 판매된 게보린을 찾는 손님이 많다”며 “식약처에서 인증해준 상황에서 (게보린을)판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약사는 “게보린의 안전성 논란을 알고 있지만 번화가서 약국을 운영하려면 게보린을 판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꾸준한 모니터링
건약 측 관계자는 “일단 식약처의 발표를 인정한다”면서도 “향후 꾸준한 모니터링을 통해 게보린 제제의 안정성을 꾸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