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2 17:47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비담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나라와 고구려 간 전쟁이 임박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상황을 주시한 연후에 백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면 굴러 들어온 땅을 내팽개치자는 말이오!” 뒤질세라 염종이 목소리를 높이며 가세했다. “그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선덕여왕이 침착하게 말을 꺼내자 유신이 춘추와 비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섰다. “전하, 두 가지 이유에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 이야기다. 계유정난이란 비합법적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육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생경제에 치중한다. 그 방편으로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와 세자빈(조기 사망한 큰아들, 의경세자의 부인인 인수대비)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한다. 세조 사후 정희왕후는 세조의 유업을 이어 각도에 잠실을 설치하고 고리대업을 정리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주력한다. 그리고 세조는 우리 역사에서 아버지 세종(世宗)에 버금가는, 아니 오히려 세종을 능가하는 세조(世祖)란 시호를 받는다. 이 대목서 잠시 조와 종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자. 조선 중기까지 조와 종에는 차이가 있었다. 새로운 권력을 세운 태조 이성계 그리고 임진왜란서 나라를 구한 선조 등 국가에 공이 있는 임금에겐 조(祖)를 그리고 덕이 있는 임금에겐 종(宗)을 사용했다. 그런데 조선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조와 종에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조며 정조, 순조 등이 조의 시호를 받은 게다. 여하튼 수양대군 세조는 계유정난이라는 무지막지한 난을 통해 권력을 잡았지만 그 계유정난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단순히 정난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고려조 후반에 발생한 공민왕 시해사건 당시 일이다. 동 사건과 연좌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형 당하는 과정에 사건 주범 중 한 사람의 동생으로 아홉 살 된 남자 어린이(해당 문중에 폐를 끼칠 우려가 있어 실명은 생략한다)가 죽임을 당한다. 대역죄에 연루된 죄인의 아비와 남자 형제들에 대해 사형에 처하라는 왕명이 있었지만, 그 어린이는 그 순간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대역죄 연좌의 법률에 따르면 16세 이상 남자만 사형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남자 어린이의 경우 16세가 되는 해에 형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린이는 단지 “왕명을 어기지 않겠다”며 기꺼이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진다. 채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남겨진 7년을 포기하고 자살과 조금도 진배없는 죽음을 선택했다. 이를 살피면 <일요시사>를 통해 언급했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문뜩 떠오른다.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사형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아테네 법률을 지키며 잘 살아왔는데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 않는가”라며 선선히 독배를 받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자신에 대한 최면과 다른 여인들이 전혀 효과를 보이지 않자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독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며 그녀를 잊으려했다. 그러나 술의 양이 더할수록 그녀의 모습은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무당을 불러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운명 지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생과 사를 초월하고 있었고 여하한 방식으로도 그녀를 지울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다시 그녀에게 함몰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를 잊기보다는 그녀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
기우(杞憂)는 기인지우(杞人之憂)의 준말로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기(杞)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면 자신의 몸이 의지할 데가 없을까 걱정해 침식을 전폐하고 근심했었다고 한 데서 유래된 말로 쓸데없는 공연한 근심을 지칭한다.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국회 인준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행태가 기나라 사람의 근심과 조금도 오차 없이 일치하고 있다. 왜 그런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대독한 내용을 들어보자. “3권 분립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법부 수장을 상대로 하는 인준절차에 예우와 품위가 지켜지는 것도 중요하다. 인준 권한을 가진 국회가 사정을 두루 살펴 사법부 수장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문 대통령의 발표 내용을 액면 그대로 살피면 대법원장 공백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명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암시하고 있다. 흡사 협박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근심이 기우라는 말이다. 왜 그런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서 답을 찾아보자. 지난해 12월9일 국회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당일 헌법재판소에 접수했다. 이어 헌재는 지난 3월10일 탄핵심판사건 선고기일을 열고 재판관 8명 전원일
지난 2007년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신사임당이 채택됐을 때 참으로 아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시·서·화에 능했음은 인정하지만 다른 이유, 우리 역사에서 현모양처의 대명사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그녀의 다른 아들은 제쳐두고 이율곡과 그녀의 남편만을 놓고 살펴보자. 신사임당은 율곡의 나이 15세인 1551년에 사망한다. 율곡은 시묘를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생활을 하다 1555년 하산해 유학에 몰두한다. 이어 1558년 봄 안동의 도산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 해 겨울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한다. 이러한 정황과 그녀의 현달하지 못한 다른 세 아들들을 살펴본다면 신사임당이 현모의 대명사였다는 말은 성립되기 곤란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양처였을까. 필자는 그녀가 양처가 아니라 그녀의 예술적 끼를 받아준 그녀의 남편 이원수가 오히려 양부(良夫)라 표현함이 옳다 생각한다. 그를 위해 신사임당이 생존했던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예술적 재능으로 신사임당 못지않았던 허난설헌과 우리가 기꺼이 조선조 천재 여류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옥봉의 삶을 실례로 들어보겠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예술적 끼를
최근 북한은 대륙간탄도로켓(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시험 측정 결과 총폭발 위력, 분열 대 융합 위력비를 비롯한 핵 전투부의 위력 지표, 2단열 핵무기로서의 질적 수준을 반영하는 모든 물리적 지표들이 설계값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다만 군 당국과 전문가들은 핵실험의 폭발위력만 놓고 본다면 완전한 수소탄 실험에 못 미쳤을 수도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발표 내용이 사실이라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수소탄의 경우 원자폭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그 위력이 강력하고, 만에 하나 그 폭탄이 한반도 어느 곳에서라도 터지게 된다면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절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왜 북한은 남한과 국제 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꾸 외통수로 나가느냐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에 대해 북한 지도부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또는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는 등 여러 이유를 들지만 필자는 우선적으로 남한의 대북 정책 때문에 그리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왜 그런지 우리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법체계를 지켜야 한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여 그 사연을 살펴본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률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 그의 친구들이 감옥을 방문해 돈으로 간수를 매수할 테니 그 틈을 이용해 도망치라고 설득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내가 지금까지 아테네 법률을 지키며 잘 살아왔는데 나에게 불리해졌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 않는가”라며 탈출을 거절한다. 후일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자신의 책 <법철학(法哲學)>서 실정법주의를 주장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며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고 썼다. 즉 ‘악법도 법이다’란 말은 순순히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이른 말로 이후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것으로 와전된 게다. 이제 시선을 현실로 돌려보자.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이 보위에 앉아있던 시절에 일화다. 당시 과거 제도에 따르면 시험관들이 급제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세 사람의 답안을 임금에게 보이고, 임금이 그들의 답안을 검토해 그 중에서 장원을 뽑도록 돼있었다. 그 과정서 발생했던 에피소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영춘추관사 하륜(河崙)·지춘추관사 정탁(鄭擢)·예조 판서 설미수(?眉壽)에게 명하여 독권(讀卷, 답안을 읽고 검토함)하게 하였다. 하륜 등이 대책(對策, 과거시험의 한 과목 또는 그때 작성하는 문장) 3통을 골라서 대언인 탁신(卓愼)에게 주어서 바치면서 “장원(壯元)은 신 등이 가히 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하니 임금이 “세 시권(試券)의 잘 되고 못 된 등급은 어떠한가?”하자 탁신이 대답했다. “두 시권은 서로 비슷하고 하나의 시권은 조금 아래입니다.” 임금이 “내가 집는 것이 장원(壯元)이다”하고 두 시권을 바치도록 하여 능숙한 솜씨로 그 하나를 잡으니 바로 정인지(鄭麟趾)였다.』 당시 과거제도는 문과와 무과에 한해 초시(初試)·
필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그러니까 1960년 대 중후반에 일이다. 당시 점심시간 무렵 수업이 파하면 어린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학교 근처에 있는 야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가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앞서 야산으로 향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북한서 바람을 이용해 남으로 날려 보낸 삐라(전단)를 줍기 위해서였다. 지금이야 우리가 북한보다 경제사정이 훨씬 월등하지만, 당시에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전면전을 전개하지 못한 데에는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때문이었는데, 대신 북한은 남한을 상대로 심리전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지속적으로 전단을 날려 보냈다. 그런 연유로 정부에선 전단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드러냈고 개인이 전단을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해야 했다. 혹시라도 민간인이 전단을 소지하고 있다 적발되면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곤 했다. 그런 상황서 어린이들이 주린 배를 채우기에 앞서 전단을 줍기 위해 야산으로 향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전단을 5장 정도 주워 경찰서에 가져다주면 월간 잡지인 <어깨동무> 한 권을 줬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2년(1430) 8월10일 기록으로 집현전서 세종에게 아뢴 기록 중 일부다. 『공법(貢法)은 그 시행에 앞서 먼저 상·중·하 등으로 전지의 등급을 나누지 않으면 기름진 땅을 점유한 자는 쌀알이 지천하게 굴러도 적게 거두고, 척박한 땅을 가진 자는 거름을 제대로 주고도 세금마저 부족하건만 반드시 이를 채워 받을 것이니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이오니 먼저 3등의 등급부터 바로 잡도록 하소서.』 공법은 조선 초기에 개혁된 새로운 전세제도로 답험손실법(고려 말 조선 초에 농사 작황의 현지조사에 의한 답험법과 작황 등급에 의한 손실법을 병용한 수세법)의 폐단을 제거하고 당시 토지생산력의 발전에 상응하는 객관적 기준에 의거한 수조제(收租制)를 수립함으로써 소농민들의 경영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게 주요 골자다. 여하튼 집현전의 상소를 받아든 세종은 그 선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정교하게 실행에 옮겨나간다. 그를 시행하는 과정에 위로는 고관부터 아래로는 농민까지 전국적으로 17만여명에게 문의하는 성의를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 공법을
문재인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 중에서 군과 관련 발표 내용을 살피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군 병력을 62만명서 50만명 수준으로 줄이며 군복무 기간을 현재 육군 기준으로 21개월을 18개월로 단축하고, 현역 감축 및 복무 기간 단축을 보완하기 위해 예비 전력을 강화하겠다는 게 주요 골자다. 노무현정부서 발표했던 국방개혁의 연장선상인 이 안을 살피면 한마디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첫째, 병력 감축에 대해서다. 무기와 감시 장비를 첨단화하고 병력을 정예화해 국방력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과연 이게 실효성이 있을까. 삼척동자가 살펴도 이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 군사작전서 병력의 숫자를 결정짓는 주요 변수는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전장(戰場)의 환경이기 때문이다. 하늘과 바다 혹은 사막과 들판 같이 탁 트인 공간에선 첨단 장비로 인력을 대체할 수 있다. 그런데 주로 산과 계곡으로 형성된 대한민국 지형서, 더군다나 땅굴 파는 데 두더지 저리가라 할 정도로 탁월한 이북을 상대로 첨단 장비를 운운하는 꼴이 정말로 가소롭다. 두 번째는 군복무 기간 단축에 대해서다. 이를 위한 변이다. 그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 밝히고 넘어가자. 이른바 우리 역사 최고가의 화대에 대해서다. 물론 화대는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지고 그 대가로 주는 돈을 의미한다. 화대는 시대별로 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형성되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윤락촌서의 가격이 20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음성적이지만 약 20만원 정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그저 서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이고 여러 해 전 모 기업의 총수가 화대로 아파트 한 채를 주었다고 인구에 회자된 일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성관계에 대한 화대인지 모르지만 서민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다. 이제 우리 역사에서 최고로 문란했던 고려 28대 충혜왕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충헤왕이 환관으로부터 외숙인 홍융(洪戎)의 처가 절색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남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항상 안방에 가두어두고 저만 보았을 정도였다. 아버지인 충숙왕의 부인들까지 강간한 충혜왕이 그냥 넘어갈리 없다. 바로 그날 밤 외숙의 집을 방문하고는 기어코 외숙모를 취하고 공식적으로 화대를 지불한다. 고려사절요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채백(綵帛) 10필(匹),
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잔을 든 연개소문이 우렁찬 소리로 외치자 일제히 잔을 들었다. “불행하게도 일부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이 고구려 혼을 좀 먹어 부득불 일을 도모했었다. 나 연개소문은 고구려 사람이다. 이제 나 연개소문은 오직 우리 고구려의 혼을 지키는 일에만 신명을 바칠 것이다. 또한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도 고구려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는 별개가 아닌 한 몸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팔과 다리나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자, 이 술을 당나
남평 문씨인 문재인 대통령이 최고 권력기관 중 하나인 검찰총장에 역시 남평 문씨인 문무일 부산고검장을 지명했다. 하여 문 후보자가 총장에 임명된다면 대한민국은 명실공히 ‘남평 문’ 문중이 권력을 독점하는 형국이 전개될 전망이다. 각설하고, 문 후보자에 대해 도하 모든 언론서 ‘지존파’ ‘땅콩 회항’ ‘성완종 리스트’ 사건 등을 수사 지휘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을 살피면 그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언론이 지목한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먼저 한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경악케 했던 지존파 사건에 대해서다. 동 사건은 지존파 일당에게 납치됐던 한 여성이 극적으로 탈출해 서울의 한 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고 그럴 게재가 아니었던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그런데 문 후보자가 검사로서 동 사건을 수사 지휘했다니 참으로 유구무언이다. 언론을 통해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때마침 실제 동 사건을 수사했던 한 형사가 불만의 소리를 내놓는다. “지존파 검사라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지존파는 우리가 제보 받아 수
398년(태조 7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또는 정도전의 난) 직전에 일이다. 정안대군 이방원이 정당문학(政堂文學,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관하던 문하부의 정2품관)인 남재에게 송악(개성)으로 가서 자신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사를 대신 지내줄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아들인 이방원이 제를 지내야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재에게 그를 부탁한 일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방원은 황당하게도 남재로 하여금 그 일을 수행하도록 했을까. 그는 바로 남재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세자인 이방석의 왕위 승계 문제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이방원을 축으로 하는 두 세력 사이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정도전과 함께 이방석 지지의 핵심 축이었던 남은이 바로 남재의 동생이었고 남재의 또 다른 동생인 남지 역시 정도전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 남재는 자신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연좌의 죄를 면하지 못할 처지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이방원이 거사 바로 직전에 고육지책, 일종에 계책을 낸 게다. 자신이 획책하고 있는 거사에서 남재를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말이다. 이방원의 계획대로 왕자의 난이 마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서 한국당의 모 의원은 도 후보자가 ‘2004년 도 후보자의 평양 방문기’서 “‘서울이 유혹, 타락, 탐욕이 뒤섞인 빛이라면 평양은 담백한 자존심으로 서 있는 승복(僧服)의 빛’이라고 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도 후보자는 “(평양은) 전깃불이 안 들어와 죽음의 도시 같았다는 뜻”이라고 답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먼저 그의 ‘평양 방문기’서 평양을 언급한 부분을 세분해 살펴보자. ‘담백한’은 ‘차분하고 평온하다’ 혹은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존심을 거론할 때 달라붙는 수식어는 ‘강하다’와 ‘약하다’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담백한 자존심이라니. 여하튼 이에 대한 논의는 접어 두고 다음 문구인 ‘서 있는 승복의 빛’
광해는 물론 광해군을 지칭한다. 일전에도 언급했었지만 광해가 아직도 임금의 시호를 받지 못하고 군에 머물러 있는 부분에 대해 그저 아리송하기만 하다. 비록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인조 임금이 군으로 격하시켰다고 하지만, 그 후 왕들은 광해를 임금으로 회복시켜줘야 했다. 아울러 필자가 광해라면 임금의 시호를 받지 못하느니 차라리 왕자의 신분인 군이 아닌 광해로 불리기를 원할 터다. 이와 관련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역사에서 그 악명을 떨쳤던 로마의 네로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네로 황제’라 칭하고 있다. 네로에 비한다면 광해의 행적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광해를 왕이 아닌 군으로 지칭하는 일은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 광해가 임금으로 군림했던 당시 있었던 일 하나 소개하자.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2년(1620) 3월28일에 실려 있는 기록으로 비변사에서 강홍립에 대해 치죄를 요청하자 광해가 대답한 내용이다. “강홍립이 노적(여진족, 후금)의 실정만을 진달했을 뿐이지 무슨 나라를 판 일이 있는가. 진달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누가 이 논의를 주장했는가? 나라를 도모하는 훌륭한 계책을 일률적으로만 논의할 수
먼저 한시 한편 감상해보자. 고려 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작품인 ‘송인(送人)’이다.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비 갠 뒤 긴 제방에 풀빛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니 슬픈 노래 울리네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 해마다 이별의 눈물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정지상은 서경(평양) 출신으로 정치인이자 천재 문학가였다. 그는 고려조 인종 시절 묘청과 함께 수도를 개경(개성)서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세력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묘청과 함께 수도 이전을 위해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 국호는 大爲, 년호는 天開)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에 패해 참살된다. 이 시는 정지상이 자신의 고향인 서경의 대동강 유역에 있던 남포(浦, 고려시대 전국의 주요 해변과 강가에 위치해 수로교통의 요충지로 이용되었던 촌락)서 소중한 사람을 보내면서 회한을 풀어낸 시다. 아울러 더 이상 대동강 너머, 즉 개경으로 소중한 사람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이제 시선을 현실로 돌려보자. 문재인 대통
지난 17대 대선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된 직후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이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분을 도와 사회 공헌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심각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된다. 오래지 않아 그분의 고민을 알게 되는데 그 사연이 참으로 황당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국무총리직을 제안 받아 받아들일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분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세밀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분이 지니고 있는 역량이라면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충분히 일익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결론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의외의 결론을 내놓았다. 그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겠다고. 그 사연이 참으로 아쉬웠다. 인사청문회 과정서 혹시라도 드러날 지도 모를 불미스러웠던 일들에 대한 경계 차원에서였다. 그 일로 자신의 인척과 지인들이 입을 수도 있을 마음의 상처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총리직을 고사하게 된다. 필자 입장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외견상 드러난 그분의 이력을 살피면 그다지 커다란 흠결도 보이지 않았고 또 이명박정부의 성공을 위해 그분의 역할이 중대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