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각지대' 대형마트 주차장 점검해보니…

‘어두컴컴’ 목숨 걸고 장보러 갈판

[일요시사 사회2팀] 유시혁 기자 = 최근 발생한 ‘트렁크 살인사건’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이 여성들의 범죄 사각지대로 지목됐다. <일요시사>에서는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강력범죄 사례를 살펴보고 예방법을 알아봤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트렁크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김일곤(48)씨를 검거했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는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에 들어가 강아지용 안락사약을 구매하려 했다.

수의사와 간호사가 “개를 안락사 시키듯이 죽여달라”는 김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잭나이프로 위협하기도 했다. 수의사와 간호사가 진료소 뒤쪽으로 이어지는 미용실로 몸을 피한 후 경찰에 신고하자 김씨는 도주했다. 수의사의 신고로 출동한 성수지구대 소속 경찰이 김씨를 추적, 동물병원에서 1km 떨어진 성동세무서 건너편 인도에서 김씨를 검거했다.

CCTV 부족 
어두운 조명

앞서 지난 11일, 성동구 홍익동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SUV 차량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차량의 트렁크에서 주모(35)씨의 시신이 발견됐고, 이미 시신은 불에 타 그을린 상태였다. 시신 감식 결과, 목과 복부 부위가 심하게 훼손돼 있었으며, 흉기에 목 부위가 찔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사건 발생 지역의 CCTV를 추적한 결과, 사건 발생 이틀 전인 지난 9일 주씨가 충남 아산시의 한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김씨에게 납치 살해된 정황을 밝혀냈다.

수사 과정에서 김씨가 전과 22범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지난달 24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30대 여성을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차량만 절도한 후 의정부의 한 주택가에 차량을 버린 채 도주한 점도 확인됐다.


경찰은 김씨가 경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 선불폰과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해 수사에 난항을 겪게 되자 지난 14일부로 현상금 1000만원을 걸고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김씨 자취가 좁혀지지 않자 경찰은 지난 16일 수사전담팀을 수사본부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경찰은 김씨가 주씨의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했다는 점을 추가 조사하고 살인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30대녀 트렁크 살인사건 김일곤 검거
아산 마트 지하주차장서 납치·살해

‘트렁크 살인사건’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 지하주차장이 여성의 강력범죄 사각지대로 지목됐으나 이전에도 수차례에 걸쳐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2007년 9월16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한 대형마트 주차장에서도 현모(28)씨의 시신이 승용차 트렁크에서 발견됐다. 당시 현씨의 시신은 노란색 원피스를 찢어 만든 매듭으로 목이 감긴 채 나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해 성폭행 당한 흔적이 없는 점을 확인했다.

분당경찰서는 현씨 차량이 주차된 장소에 CCTV가 설치되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었으나 사건 발생 6일 만에 용의자 김모(26)씨를 PC방에서 붙잡았다. 당시 피의자 김씨는 금품을 빼앗을 목적으로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중 고급차량에 탑승한 현씨를 발견, 12만원을 뺏은 후 현씨를 목 졸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 5월5일, 부천시 원미구의 한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백화점 직원 김모(43)씨가 절도차량에 납치돼 성폭행 당한 후 목이 졸린 채 살해됐다. 시신은 벽돌에 매달려 충남 천안의 청룡저수지에 유기됐다. 당시 피의자는 공군 이모(29) 대위로 밝혀졌으며 성폭행 및 강도 살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군 헌병대에 이첩됐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살인 이외의 강력범죄(절도·폭행·성범죄·강도)도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대형마트에서 2012년 2902건, 2013년 3194건, 백화점에서 2012년 1618건, 2013년 2605건의 강력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2년간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1만319건의 강력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범죄 유형별 발생건수를 살펴보면 대형마트에서 절도 5749건, 폭행 311건, 성범죄(성폭행·성추행 등) 26건, 강도 10건이 발생했으며, 백화점에서도 절도 3902건, 폭행 302건, 성범죄 17건, 강도 2건으로 조사됐다.

이화승(회사원·36)씨는 “맞벌이 가정의 여성은 퇴근 후 늦은 시간에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구입할 일이 많다”며 “트렁크살인사건이 아니었다면 범죄위험을 생각지 못한 채 나 역시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덧붙여 “마트나 백화점은 유동인구가 많다하더라도 차량 내에서 갑작스럽게 범죄가 일어나면 쉽게 알아채기 힘들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근 검거된 강력범죄범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7일, 서울시 마포구의 한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자동차에 탑승한 여성을 납치하려 했던 김(39)씨가 경찰에 붙잡혀 구속됐다. 지난 7월에는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외제차 여성 운전자를 노린 범인이 범행 발생 5일 만에 검거됐다.

으슥한 주차장 
시설개선 시급

지난 6월에도 인천 남동구의 한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여성이 자동차에 타는 순간 뒷좌석에 타 흉기로 위협한 남성이 블랙박스에 포착돼 경찰에 붙잡혔다. 이외에도 경기도의 한 대형마트 지하주차장에서 7살 유치원생이 2013년 7월16일에 유괴되기도 해 여성뿐만 아니라 아동에게도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이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지하주차장의 강력범죄 발생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여성전용주차장 확대, 보안요원 배치, CCTV 추가 설치, 조명등 개선 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국 각지 지방자치단체는 2008년 이후 ‘주차장 설치 및 관리조례 - 여성전용주차장 주차구획 설치기준’을 마련해 여성전용주차장 설치를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주차장법, 주차장법시행령, 주차장법시행규칙에는 기재되지 않아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차장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시 ‘주차장 설치 및 관리조례’를 살펴보면 ‘30대 이상인 노상·노외·부설 주차장에는 총 주차대수의 10% 이상을 여성전용주차장을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에 여성전용주차장이 마련돼 있긴 하나, 전체 주차대수의 10%에 미치지 못하거나 부합 위치에 마련디지 않다는 지적이다. 또한 소규모마트 및 지역 백화점의 경우 여성전용주차장이 마련되지 않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주차 전용층을 운영하는 대형마트도 있다.

 

‘위험천만’ 여자 혼자 가기 무섭다
유사한 강력범죄 잇달아 ‘초긴장’

 

지역자치단체 조례에 언급된 여성전용주차장의 부합 위치는 ▲사각이 없는 밝은 위치 ▲주차장 출입구 또는 주차관리원(주차부스)과 근접해 접근성 및 이동성ㆍ안전성이 확보되는 장소 ▲CCTV감시가 용이하고 통행이 빈번한 위치 ▲차량출입구 또는 주차관리원이나 승강기에서 장애인 주차구획 다음으로 근접한 곳이다.

국토해양부는 지난 2013년 1월 ‘건축물 범죄예방설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지하주차장에 일정간격의 비상벨을 설치토록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범죄 예방용 비상벨이나 비상전화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는 규정은 마련돼 있지 않다.

한 대형마트 주차관리자는 “비상벨 있더라도 흉기 위협으로 구조요청을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안전요원 배치가 시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법적 규정이 하루빨리 마련돼 여성들이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에서 자유롭게 쇼핑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지하주차장에 안전요원이 배치된 대형마트와 백화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주차관리소 상주직원 및 주말동안 배치되는 차량유도 안내직원을 통해 관리되고 있어 보안관리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대형마트 주차관리자는 “경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인력비를 아끼고 있는 시점에 보안요원을 곳곳에 배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며 “일부 업체가 외주업체를 통해 발렛파킹 요원을 운용하고 있긴 하나, 이들은 안전요원이 아니기 때문에 흉악범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덧붙여 “보안요원이 배치되려면 업체 측에서 검토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라며 “정부의 대책마련 없이는 개선되지 않는 곳도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지하주차장의 조명등의 개선도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는 조명등이 격등제(1칸 건너 1개)나 격격등제(2칸 건너 1개)로 운영되고 있다. 일부 업체에서는 센서등을 통해 사람이 지날 때만 불이 켜지도록 하고 있다. 범죄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의 건물 지하주차장에는 범죄 예방을 위해 LED 조명이 설치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진영(미용사·30)씨는 “서비스직 근무자들은 퇴근시간이 일반 회사원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이라 한적한 지하주차장에 들어설 때마다 공포를 느끼곤 한다”며 “마트나 백화점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CCTV 사각지대가 없어야 할 것이며 조명부터 환하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전용 확대
보안요원 배치

지난 3월17일, 충남 논산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발생한 남고생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의 경우 사건 발생 현장에 설치된 CCTV 3대가 모두 고장난 제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범죄 예방 및 사건기록, 범죄용의자 검거에 활용되는 방범용 CCTV에 대한 추가 설치 및 화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는 방범용 CCTV 한 대당 화질 개선비 200여만원, 추가 설치비 1500만원으로 대책 마련이 쉽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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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