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 자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넷

벼랑 끝 내몰고 비밀은 감췄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지난달 18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직원 임모 과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해킹 파문의 중심에 있던 그는 3장의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임 과장의 죽음으로부터 1달이 지났지만 풀리지 않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또 국정원은 무엇이 두려워 임 과장의 사망 경위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 드러난 4가지 핵심 의혹을 중심으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임 과장의 유골이 안치된 곳은 경기도 용인시 '평온의 숲'이다. 평온의 숲에서 자동차로 15분 남짓한 거리에는 임 과장이 숨진 고라지골이 있다. 앞서 소방당국이 밝힌 임 과장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화산리 산77번지다. 마을 주민들은 화산리 산77번지 일대를 일컬어 고라지골이라고 부른다.

임 과장은 지난 7월18일(토요일) 오전 6시30분께 빨간색 마티즈 차량을 끌고 고라지골에 도착했다. 임 과장은 이날 오후 12시2분 소방대원들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소방당국은 자체 작성한 보고서에서 "당시 망자가 전신 사후강직 상태에 있었다"고 적었다. 기후 등 여러 변수가 있지만 '전신 사후강직'이 이뤄진 점에 비춰 임 과장은 늦어도 오전 10시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의원은 "사후강직은 사망 후 5시간 내지는 6시간 내 일어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미스터리 1]
왜 119로 신고했나

용인 지역 CCTV 등으로 확인된 임 과장의 사망 전 행적은 이렇다. 사건 당일 오전 4시52분 임 과장은 자택에서 나와 마티즈 차량에 탑승했다. 오전 5시48분까지 마트 세 곳에 들러 소주와 빈 호일도시락, 숯, 번개탄 등을 구입했다. 오전 4시52분∼5시48분 동안 임 과장은 자택 인근의 낚시터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티즈 차량이 대로변 CCTV에 마지막으로 촬영된 시각은 오전 6시22분이다.

임 과장은 이날 새벽 집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출근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부인 A씨는 "출근한 남편을 찾아달라"라며 5시간 만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지난달 "임 과장의 부인이 오전 8시부터 모두 10여차례에 걸쳐 임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 119에 실종신고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경찰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바로 국정원의 개입이다.


<노컷뉴스>는 지난 7일 야권 관계자의 전언을 인용해 "국정원이 사건 당일 오전 9시께 A씨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출근하지 않았으니 119에 신고하라'고 지시했다"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임 과장의 실종 사실을 정부기관 가운데 가장 먼저 인지하고 있었다.

세부적으로 국정원 3차장은 사건 당일 오전 8시40분쯤 국장급 간부로부터 임 과장의 결근 사실을 보고 받았다. 3차장은 즉각 위치추적장치(MDM)를 작동하라고 지시했다. 또 임 과장의 휴대전화가 '용인 소재 저수지 근처'에서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고 '용인의 옆부서 직원'을 현장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실제 국정원 직원은 소방당국과 거의 비슷한 시각 현장에 도착한 것으로 파악됐다. 경우에 따라선 119대원보다 먼저 도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 과장 사망 한 달째 여전한 의혹
사건 현장 마티즈 최초 확인 가능성

A씨는 국정원과 약속한 대로 119에 신고했다. 통화시간은 오전 10시4분∼7분 사이다. A씨는 119의 권유를 받고, 파출소를 직접 방문해 신고 절차를 밟았다. 위치추적에 동의했다가 오전 10시32분 돌연 경찰 쪽 신고를 취소했다. 이후 경찰과 연락해 신고가 취소됐는지를 확인했다. 이때가 오전 11시38분이다.

반면 신고를 접수한 관할 소방서는 오전 10시25분 출동 준비를 마쳤다. 소방당국은 임 과장의 휴대전화 GPS 위치추적을 통해 '화산리 34번지'라는 데이터를 확보했다. 출동한 대원들은 오전 10시32분 상황실과의 무전 교신에서 “화산리 34번지로 출동하라”라는 통보를 받았다. 화산리 34번지는 임 과장이 숨진 화산리 산77번지와 도로상으로 130여m가 떨어진 곳이다. 119대원들은 오전 10시40분쯤 화산리 34번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산중턱에서 머뭇댔다. 상황실에서는 "인근 저수지를 수색하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앞서 A씨는 10시30분∼40분 사이 소방당국과의 통화에서 "남편이 화산리 인근 저수지에서 낚시를 자주하니 (그곳을) 찾아달라"라고 말했다. 대원들은 현장에서 약 2km가량 떨어진 요덕저수지와 맹골낚시터(화산저수지)를 차례로 수색했다.

[미스터리 2]
왜 수색 방해했나


요덕저수지와 화산저수지는 사건 현장으로부터 약 5분 거리(차량 기준)에 있는 낚시터다. 요덕저수지와 화산저수지, 화산리 34번지로 갈리는 삼거리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버스정류장 삼거리는 지도상 각 거점 수색이 용이한 요충지로 확인된다. 119대원들은 이 삼거리에서 어느 쪽을 수색할 것인지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임 과장의 '동료'인 국정원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정원 직원은 현장 대원들과 당일 오전 11시11분께 정차된 구급차량 앞에서 3∼4분간 대화를 나눴다. 누가 먼저 대화를 요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는 대화가 이뤄진 경위에 대해 국정원 측에 답변을 요구한 상황이다.

단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통화 녹취록이 존재한다. 녹취록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은 '동료 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왔다'라며 현장대원과 접촉했다. 이어 '낚시'와 관련한 특정 정보를 대원들에게 흘렸다. 이들은 11시15분께 삼거리에서 헤어졌다. 대원들이 향한 곳은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맹골낚시터였다.

같은 시각 국정원 직원은 따로 활동했다. 그의 행적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있다. 일각에선 국정원 직원이 소방대원들로 몰래 임 과장을 찾으려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당시 대원들은 차량이 발견되기 전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국정원 직원과 통화했다. 지난 10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조송래 국민안전처 중앙소방본부장은 "수색을 하다보면 동료나 가족과 함께 요구조자를 찾을 일이 생긴다"라며 "(그가) 국정원 직원인지 몰랐다"라고 해명했다.

또 한편에선 이미 현장을 장악한 국정원 직원이 다른 직원을 도피시키기 위해 시간을 번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출동한 대원은 오전 11시35분께 상황실로부터 "관계자한테 물어보세요" "'위치추적 관계자'가 같이 없어요?"라는 질문을 연달아 받았다. '위치추적 관계자'는 흔히 쓰이는 표현이 아니다.

그러자 무전을 받은 현장대원은 "없어. 그 사람들, 차 가지고 가서 그 사람도 나름대로 찾아준다고"라고 답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은 국정원 직원들의 조직적인 수색 가능성을 암시한다.

[미스터리 3]
왜 수사하지 않았나

부인 A씨는 오전 11시15분 119에 2차 위치추적을 요청했다. A씨가 위치추적을 재요청한 시점은 국정원 직원이 소방대원들과 헤어진 시점과 맞물린다. 오전 11시28분 소방당국은 위치추적을 통해 임 과장의 휴대전화가 화산리 산77번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보다 2분 빠른 11시26분에는 소방대원들이 사고를 의심하고 112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 A씨는 경찰이 출동 준비를 하자 신고를 취소해 달라고 재촉했다. 오전 11시51분에는 앞선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위치추적을 요구했다. 이 시각 소방대원들은 상황실의 전화를 받고 도라지골에 진입한 상태였다. 상황실은 화산리 산77번지 뒤편인 시궁산 정상을 수색하라고 했다가 '관계자(국정원 직원)와 연락해 도라지골로 가라'며 수색 위치를 조정했다.

당일 오전 11시42분께 맹골낚시터에서 출발한 펌프차는 삼거리를 거쳐 화산리 34번지 쪽으로 향했다. 오전 11시49분에는 구급차량이 같은 장소를 통과했다. 소방대원들은 화산리 34번지에서 U자로 구부러진 길을 지나 화산리 산77번지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마티즈 차량을 발견하고 국정원 직원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취했다. 확인된 통화 시간은 오전 11시54분~55분 사이다.

인근에 있던 국정원 직원은 오전 11시54분께 삼거리에서 화산리 34번지 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같은 날 오후 12시2분께 현장을 접수한 국정원 직원은 임 과장의 시신을 먼저 체크했다. 이때부터 소방대원들은 상황실과의 무전 연락을 중단했다.

산중턱에 있던 5명의 대원은 오전 12시12분 구급차량으로 내려와 약 4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국정원 직원의 모습은 구급차량 블랙박스에 포착되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은 현장에 홀로 남아 있었고, 누구의 방해도 없이 시신에 손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국정원 측은 현장 오염과 관련한 의혹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119대원들은 국정원 직원과 만난 다음에야 경찰에 사건 소식을 알렸다. 경찰이 사건을 인계받은 시각은 7월18일 오후 12시50분이다. 소방당국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차량보조석과 뒷좌석에선 번개탄이 꺼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3월 '간첩 증거 조작' 사건에 연루된 권모 과장은 차량 문을 잠그고 같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마티즈 차량의 문은 권 과장의 산타페와 달리 잠겨 있지 않았다. 충분히 의심 가는 부분이지만 경찰은 문의 개폐와 관련한 의혹을 수사하지 않았다.

경찰·소방서 입막고 증거인멸 의혹
'그날' 감찰실서 무슨 대화 오갔나?

또 경찰은 임 과장의 사망 장소를 '마티즈 뒷좌석'이라고 기재했다가 국회 보고 과정에선 앞좌석으로 정정했다. 경찰은 출동 대원들의 단순 실수라고 떠넘겼지만 소방당국조차 시신의 위치를 별도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차량에서 발견된 17개의 쪽지문에 대해서도 "누구 것인지 판정할 수 없었다"라고 답했다.

경찰 신고 과정에서 이상 징후를 보인 A씨의 통화기록은 조사 대상에서 배제됐다. 경찰은 "단순 자살 사건이고, 유족 측이 수사를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임 과장의 '동료'인 국정원 직원의 행적은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임 과장이 쓰고 나간 것으로 전해진 뿔테 안경은 유실됐다. 안경의 행방은 지금껏 오리무중이다. '임 과장의 매부'를 자처한 사람은 증거인 마티즈 차량을 7월19일 폐차했다. 폐차를 대행한 업체는 국정원의 오랜 협력사로 알려졌다.


[미스터리 4]
왜 그는 자살했나

출동으로부터 1시간10여분 만에 소방당국은 실종자를 찾았다. 일반 실종사건과 비교하면 신속한 사건 처리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국정원과 공모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현장에 있던 구급차량 블랙박스는 오후 12시30분부터 촬영이 중지됐다. 전원이 꺼졌기 때문이다. 블랙박스가 다시 켜진 시각은 오후 12시58분이다. 28분 동안 국정원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구급차량은 블랙박스가 켜짐과 동시에 사건 현장을 이탈했다.

A씨는 오후 12시30분이 돼서야 소방관으로부터 마티즈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고 신고자임에도 국정원은 물론 경찰보다 늦은 시각에 결과를 통보받은 것이다. 임 과장은 생전 A씨를 향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임 과장은 아내, 두 딸과 함께 신앙생활에 애착을 드러냈다고 한다.

임 과장의 자살 당시  주위 사람들은 집사인 임 과장이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배경을 궁금해 했다. 현재 설득력 있는 원인으로는 내부 감찰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감찰 당시 국정원과 임 과장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또 어떤 '지시'가 있었는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무원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은 파면 등을 이유로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다. 국정원은 강압적인 감찰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지난 3일 <한겨레21>은 '정말 다 짊어지려 그 길을 선택했을까?'라는 기사에서 "임 과장이 올 7월 초 한 목사로부터 마티즈 차량을 구입했다"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때만 해도 마티즈 차량은 '죽음의 도구'가 아니었다. 대전에 살던 임 과장은 출퇴근용으로 구입한 차량을 몰고 가족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7월13일 국정원 해킹 파문이 일면서 한 가장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의 죽음 전 마지막 5일. 임 과장은 자신의 상관들에게 '우려하실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동료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가족들에겐 "사랑해"라고 인사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야 할 만큼 '우려스런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영면을 취하고 있는 고인은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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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