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새해 들어 구직자들의 꿈과 희망을 담보로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열정페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열정페이 관행을 근절하겠다며 나섰다. 그런데 정작 정치권도 열정페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일요시사>가 정치권에 횡행하고 있는 열정페이 관행을 살펴봤다.
“우리는 근로계약서도 없다. 최저임금은커녕 고정적인 급여 한 푼도 없다. 당선 되면 한 자리 챙겨준다는 약속만 믿고 일하는 거다. 그런데 막상 당선된 뒤엔 모른 척하는 정치인들도 부지기수다.”
악질 정치인
‘열정페이’란 열정과 급여(pay)를 합친 말로 일부 업계에서 일을 가르쳐주거나 추후 정규직 채용을 미끼로 무급에 가까운 저임금 노동을 시켜온 관행을 비꼰 신조어다. 새해 들어 구직자들의 꿈과 희망을 담보로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열정페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열정페이 관행을 근절하겠다며 나섰다.
그런데 정작 정치권의 노동 실태를 들여다보면 정치권도 열정페이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선거철이 되면 정치권 주변에서 열정페이 노동자들을 너무나 손쉽게 만나볼 수 있다. 선거캠프에서 유급 선거사무원을 고용할 수 있지만 선관위가 허용하는 유급 선거사무원 수는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선거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자원봉사자 제도를 이용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일부 유명 정치인을 제외하고 선거캠프에 해당 후보를 정말 자발적으로 돕겠다며 찾아오는 자원봉사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 실리적인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고 자원봉사자로 등록한다”고 귀띔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이런 자원봉사제도를 악용해 열정페이 노동자들을 대거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낙선한 정치인이나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하려는 정치인들을 보좌하는 보좌진들도 대부분 열정페이 관행의 희생양이 된다. 모 정치인의 보좌진이었던 한 인사는 “해당 정치인이 낙선한 후 ‘이제 나는 너희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다’고 아예 못을 박더라. 생계는 알아서 해결하고 다음 선거 때까지 나를 도우면 당선 후에 꼭 한자리 챙겨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정치판의 근로계약서다. 최저임금은커녕 돈 한 푼 못 받고 투잡 뛰며 정치인을 보좌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물론 낙선한 후에도 자신의 보좌진들을 알뜰살뜰 챙기려는 정치인들도 많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 편법과 탈법이 동원된다. 애초부터 돈이 많은 자산가들이야 사재를 털어 보좌진들의 임금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보기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비록 낙선했더라도 해당 지역의 지역위원장이나 당협위원장을 맡을 정도의 거물급 인사라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돈 한 푼 안주고 부려먹기 태반
당선되면 낙하산 인사 악순환
지역위원장이나 당협위원장들에게는 따로 급여가 지급되지 않지만 지역위원장이 되면 해당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자신의 사람들을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유급 사무원으로 채용되면 당에서 급여가 나온다. 경력에 따라 받는 급여는 다르지만 보통 200만원 이상의 급여는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진 정치인의 경우에는 낙선 후 평소 친하게 지냈던 기업에 보좌진의 취업을 부탁해 급여를 대납하게 하는 수법도 자주 이용한다. 해당 기업에서 급여를 받으면서도 해당 기업의 업무는 보지 않고 정치인 보좌역할만 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뇌물로도 볼 수 있다.
낙선한 후에도 비밀리에 기업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자신과 보좌진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낙선 정치인의 경우 기업들에게 직접 후원금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기업이 당에 후원금을 내면 당에서 후원금을 해당 정치인에게 지원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지역 초선의원이나 비례대표 의원에게 자신의 보좌진 채용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고, 여당 출신 유력 정치인들은 자신의 보좌진들을 정부기관에 낙하산 인사로 들여보내기도 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보좌진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정치인 보좌에 집중할 수 있겠나? 그러다 보니 낙선 의원들 사이에서 이런 편법과 탈법을 이용한 급여 지급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일부 보좌진의 경우에는 해당 정치인으로부터 급여를 받기는커녕 해당 정치인에게 오히려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스폰서 겸 보좌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 차기 공천 등을 염두에 둔 행보다.
스폰서가 보좌진의 급여를 대납하는 경우도 있다. 한 전직 정치인 보좌진도 “해당 정치인이 낙선한 후 생판 모르는 사람 명의로 급여가 지급 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냥 후원자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그 사람들이 돈이 남아돌아서 낙선한 정치인을 돕겠는가? 정치판이라는 게 지금은 낙선해 오갈 곳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가도 하루아침에 다시 당선돼 거물급 중진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그런 사람들을 조금씩 도와주며 친분을 쌓아두면 나중에 국책사업 같은 거 딸 때 도움도 되고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천권을 따낼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치권의 열정페이가 일반적인 열정페이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추후 여러 가지 부정부패와 연결될 가능성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법과 탈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보좌진들의 생계를 살피려는 정치인은 그나마 인간미는 있는 사람이다. 일부 정치인들은 아무런 급여도 받지 않고 자신을 도왔던 보좌진들을 당선된 후 모른 척하기도 한다.
배신도 밥 먹듯
이 같은 일을 직접 겪어봤다는 한 전직 정치인 보좌진은 “낙선 후 어려울 때 곁을 지키며 보좌했는데 당선되고 나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 아니겠냐’며 기존 보좌진들을 내치더라. 이렇게 당해도 하소연 할 수도 없는 곳이 정치판”이라고 말했다.
해당 전직 보좌진은 “나는 억울해도 그냥 받아들이고 그 정치인과 인연을 끊었지만 일부 보좌진들은 그런 정치인의 치부를 찾아내 선관위나 당에 투서를 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해당 정치인을 보좌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포기했던 보좌진으로서는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급여를 주지 않아도 보좌진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니 현직이 아닌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보좌진들에게 급여를 주지 않는 관행이 어느새 당연시되고 있다”며 “정치인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서 다른 업계에 열정페이를 폐지하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