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부부강간’ 논란

부인과 섹스하려면 허락 필수?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지금껏 ‘부부강간’은 남편이 흉기를 들고 아내를 위협해 다치게 하고 성관계를 맺는 경우에 한 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흉기를 드는 행위와 같은 위협을 하지 않았어도 상대방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면 부부 간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 법원이 부부강간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적지 않은 논란이 일것으로 보인다.


흉기를 드는 등 심각한 위협을 하지 않았더라도 힘으로 상대방을 누르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면 부부 간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성관계의 ‘강제성’을 판단할 때 우리말에 서툴고 남편 말고는 기댈 곳이 없는 외국인 아내의 처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기 때문에 유사한 피해를 입은 결혼이주여성들의 소송이 잇따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정 범위 확대
 
지난 20일 법조계와 여성계에 따르면 네팔 출신 외국인 아내를 강간하고 나체 사진을 찍은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징역형이 최근 확정됐다. 검찰의 범죄사실에 따르면 50대인 A씨는 2012년 국제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네팔에서 20살 연하의 B씨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2013년 5월 한국으로 입국해 제주도에서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A씨는 아내가 몸을 웅크리는 등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두 달 동안 10여 차례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A씨는 또 B씨에게 집에서 옷을 입지 못하게 했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나체 사진을 찍었다. B씨는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었다거나 아파서 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남편이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A씨는 결혼생활 두 달 만에 아내와 계속 살 수 없다면서 결혼중개 업체에 B씨를 두고 왔다. 주변의 소개로 이주여성 쉼터에 가게 된 B씨는 이후 여성단체의 도움을 얻어 남편을 고소했다. 결국 법정에 서게 된 A씨는 “성관계를 가진 것은 사실이나 부부 간의 정상적인 성관계였을 뿐, 폭행하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부부간에 정상적 성관계를 맺은 것일 뿐 아내를 폭행하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다는 A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국제결혼을 해 혼자 한국에 와 남편 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하기도 했다”며 “거부 의사를 표시하는 것 말고는 사력을 다해 반항하는 등 적극적 항거를 시도하기 어려워 보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강제로 아내와 성관계한 남편 징역
흉기 없어도 강제성 인정되면 성립
  
재판부는 이어 “피고인이 범행 당시 피해자를 폭행·협박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한 다음 강간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A씨가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했다. 항소심 진행중에는 A씨가 B씨에게 5000만원을 주고 합의해, B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판부에 전달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법 제주형사부는 지난 7일 A씨에게 징역 3년형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A씨는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이 판결은 확정됐다.
 
부부강간죄는 인정하면서도 형량만 감형해 준 것이다. 재판부는 “민법 제826조 제1항은 부부의 동거의무를 규정하고 있고, 여기에는 배우자와 성생활을 함께 할 의무가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폭행, 협박에 의해 강요된 성관계나 가학적·변태적 행위를 감내할 의무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 강간 범행의 경위, 수단 및 방법 등에 비춰 죄질이 좋지 못한 점, 피해자는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해 엄청난 육체적·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피고인에게 불리한 사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부부강간죄’를 처음으로 인정, 흉기로 아내를 위협하고 성관계한 남편에게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당시 아내를 흉기로 위협한 강모씨는 2001년 결혼한 아내와 잦은 불화를 겪던 중 2011년 밤늦게 귀가한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억지로 성관계를 맺는 등 한 달여 동안 2∼3차례에 걸쳐 폭행 및 성폭행을 한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1·2심은 “민법상 부부는 동거 및 성생활 의무가 있지만 형법상 강간죄 객체는 ‘부녀’로 규정돼 있을 뿐 다른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 법률상 아내가 모든 경우에 강간죄 객체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 없다”며 “폭행·협박으로 반항을 하지 못하게 해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판단, 모두 강간죄가 성립된다고 봤다. 대법원은 혼인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부부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다는 법리를 명확히 했다. 시대변화와 맥을 같이 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악용 소지 우려
 
이처럼 법원이 유죄로 인정한 ‘부부강간’ 사건은 가해자인 남편이 흉기를 들고 아내를 위협하거나 다치게 하고 성관계를 맺은 경우에 한 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흉기와 무관했기 때문에 앞으로 국내 국제결혼 가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판결로 여성계는 남편의 성폭력에 시달려온 적지 않은 이주여성들에게 구제의 길이 열렸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반면 남성단체는 이번 판례가 위장 결혼을 부추기고 남성들이 국제결혼의 피해자가 되고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어찌됐든 이번 판결로 인해 ‘부부강간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간통죄 운명은?
 
기혼자가 다른 이성과 성관계를 가질 경우 우리 형법은 간통죄를 적용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희박하다. 하여 간통죄 무용론이나 폐지론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1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현재 간통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과 위헌법률심판 사건을 심리 중이다. 형법 241조 1항은 ‘배우자가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고 규정했다. 벌금형 없이 징역형만 정해 양형이 비교적 센 편이지만 실제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고소를 취하하는 등 기소를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데다, 기소를 한다 해도 90% 이상이 집행유예나 공소기각으로 풀려난다. 논란은 결국 헌법소원으로 이어졌고 헌법재판소는 올 상반기 중 간통죄의 위헌 여부를 판단한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간통죄를 둘러싼 존치론과 폐지론이 팽팽하게 맞서왔다. 헌재는 이 조항에 대해 1990∼2008년 네 차례 합헌 결정한 바 있다. 1990년에 합헌 의견이 재판관 9명 중 6명으로 위헌 의견보다 많았으나 2008년에는 위헌 의견이 5명으로 합헌 의견을 넘어섰다. 위헌 결정이 내려지려면 재판관 6명 이상이 위헌 의견을 내야 한다. 벌써 다섯 번째 위헌심판대에 오른 간통죄의 운명, 그 결과가 주목된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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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