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정치팀] '고시낭인'이란 말은 이미 익숙하지만 '정치낭인'이란 단어는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하다. 하지만 정치1번지 여의도 주변엔 늘 정치낭인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누구일까? <일요시사>가 정치권을 맴도는 정치낭인들의 삶을 집중 탐구해봤다.
'낭인(浪人)'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허랑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사전에 나온 해석만을 놓고 보면 흔히 말하는 ‘백수’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들은 백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가 이뤄지면 언제든지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정치예비군?
지난 대선기간 민주당의 한 대선경선후보의 캠프에서 일했던 A씨는 대표적인 정치낭인이다. 특별히 할일은 없지만 그는 매일 여의도로 향한다. 대선캠프에서 일하면서 친분을 쌓은 현직 의원보좌진들이나 당직자들을 만난다. 이렇게라도 인맥을 유지해두면 나중에라도 자신을 다시 찾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보내고 설령 약속이 없더라도 여의도 주변 카페를 찾아 시간을 보낸다. 여의도를 떠나있으면 정치적 감각이 떨어질 것 같다는 이유다.
지금은 무척 꼴이 우습지만 이들은 엄연한 '정치예비군'이다. 줄만 잘 닿으면 백수에서 별정직 4급 공무원인 보좌관으로의 수직 신분상승도 허황된 꿈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분상승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돕는 보좌진의 전문화, 고학력화 경향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보좌진들이 '몸값'을 올리기 위해 전문성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데다가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감시 평가로 인식이 바뀐 의원들이 전문 입법보좌관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충성심과 우직함만으로 버텨왔던 이들이 정치낭인으로 전락한 후 다시 중앙정치로 돌아오기는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때문에 일부는 정치낭인을 넘어 '정치브로커'의 길로 빠지기도 한다. 당장 생계가 걱정되지만 그동안 정치권 경력 외에는 마땅히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상 명예직인 '~위원'과 같은 명함을 내세워 민원을 해결해줄 것처럼 과시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말썽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때 실세로 군림하던 유명 정치인도 낙선하고 나면 수년 간 정치낭인의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특히 유명 정치인이 떠돌이로 전락하게 되면 사정은 더 가혹하다. 이들은 이미 대중에 얼굴이 알려져 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하기도 애매하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 출신 정치인의 경우 낙선 후에도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가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치연구소 등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정치권을 맴돈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의원 두 번만 하면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된다. 의원들이 버스요금이나 생필품 가격을 몰라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있는데 어쩌면 당연하다. 의원들이 재선에 목을 매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정치인은 낭인시절을 회고하며 "어떤 행사장에 내빈으로 초대되어 갔는데 내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현직 시절엔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행사주최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황급히 자리를 마련해 줬을 텐데 참 서러웠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유력 정치인의 경우는 정치낭인 시절도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정치낭인 시절 오히려 주변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낭인 시절 유력 정치인과 인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그가 중앙정치에 복귀할 경우 큰 인적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선했지만 얼굴 팔려 취업도 창업도 애매
선거판 기웃거리다 범죄 유혹 빠지기도
게다가 실세로 군림하는 현역 정치인에게 줄을 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거물급이었더라도 정치낭인 시절엔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또 정치낭인 시절 맺은 인연은 더 끈끈하고 깊기도 하다.
실제로 정치낭인으로 전락해 잊혀져가다 화려하게 복귀하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창희 국회의장이다. 그는 8년간을 원외에서 머물렀다. 지난 17ㆍ18대 총선에서 연거푸 낙선하자 주위에선 “강창희의 정치인생도 끝”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지난 19대 총선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충청권 최초로 국회의장직까지 맡았다.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이야기다. 그는 한때 정치낭인들의 롤모델로 불리기도 했다. 윤 전 대변인은 <문화일보>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종편채널을 전전하던 '뜨내기 정치평론가'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돼 정권실세로 불리게 되니 정치낭인들의 롤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윤 전 대변인의 인생역전은 한 순간의 실수로 끝나버리긴 했지만 정치낭인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나마 금배지라도 달아본 이들은 정치낭인들 사이에선 부러움의 대상이다. 정치낭인 중엔 평생 선거에 도전하고도 배지 한번 못 달아본 이들이 더 많다. 특히 선거판에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가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많다. '도박중독'과 비견되는 '선거중독'이다. 선거를 한번 치르는데 들어가는 돈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유명 정치인들이야 후원금으로 선거비용을 충당하고 선거가 끝난 후엔 또 대부분을 보전 받지만 보통의 정치지망생들은 자비를 들여 선거에 임한다. 또 선거 과정에서 일부는 선거법을 어겨 팔자에도 없던 전과를 얻어 인생이 꼬이기도 한다. 정치낭인들의 슬픈 운명이다.
물론 순수한 정치낭인들도 있다. 나름대로 정치경력도 있고 정치판에 대한 식견도 갖고 있지만 현역에서 은퇴해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이다. 이들은 여의도를 오가며 전당대회나 중앙위원회, 전국위원회 등을 통해 당무에 참여 하는 것 자체에서 보람을 찾는다. 사실상 정치봉사활동인 셈이다. 젊은 청년층에서도 오직 정치참여만을 목적으로 순수한 정치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많다.
정치브로커?
한편 정치낭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이들이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력도 없이 정치권을 맴돌다 '한방'만을 노린다는 비판이다. 또 이런 정치낭인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가 된다. 앞서 언급한 정치브로커 사례처럼 각종 불법이나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도 커진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치낭인들을 정치판이 아닌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