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텔레그램 ‘마약왕 전세계’로 알려진 박왕열이 국내로 송환됐다. 아쉽지만 임시다.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범죄인 임시 인도 조약상 완전히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살인 혐의로 현지 재판부로부터 사실상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서의 재판이 끝나면 필리핀으로 다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박왕열은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의 주범이다. 그가 살인 및 마약 유통을 한 지 10년 만에 한국으로 송환된 건 결과적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일요시사>는 수년간 박왕열을 포함해 필리핀에 있는 다수의 해외 범죄자들에 대해 범죄인 임시 인도가 가능하다고 강조해 왔다.
사탕수수밭
살인 사건
박왕열은 한국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 수갑이 불편하다며 풀어달라는 취지로 말했다. 지난 25일 법무부가 공개한 영상에는 전날 필리핀 클라크필드 공항에서 법무부 국제형사과 검사 등 호송팀이 필리핀 측으로부터 박왕열의 신병을 인수하는 모습이 담겼다.
필리핀 당국자들에게 둘러싸인 박왕열은 모자를 눌러쓰고 팔뚝 문신이 그대로 드러나는 평상복을 입은 채 등장했다. 셔츠에는 선글라스를 걸었고 수갑이 채워진 손은 회색 수건으로 가렸다. 양국 당국자는 박왕열의 임시 인도를 위한 서류에 서명했고 각각 상대국의 협조에 고마움을 표했다.
박왕열은 호송팀과 함께 아시아나항공 OZ708편에 탑승했다. 필리핀 측은 박왕열이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그의 수갑을 풀어줬다. 잠시 손이 자유로워진 박왕열은 탑승권을 확인하는 동안 몸을 긁기도 했다.
호송팀은 기내에 탑승한 박왕열에게 “이제 대한민국 국적기에 탑승했기 때문에 체포영장을 집행하겠다”며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됐음을 알렸다. 이어 “변호인을 선임해서 조력을 받을 수 있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다”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다. 이에 박왕열은 “네, 네”라고 답했다.
호송팀은 지난 25일 오전 1시30분 기내에서 박왕열에게 수갑을 채웠다. 호송팀이 “불편하시면 말씀하시라”고 하자, 그는 “근데 갈 때 이거 풀고 가면 안 돼요?”라고 물었다. 인도 과정에서 범죄자는 비행기에서 수갑에 결박된다.
박왕열이 탑승한 비행기에는 일반 승객도 탑승했으나 호송관 2명이 박왕열을 밀착 감시한 채 송환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왕열과 호송팀은 지난 25일 오전 7시16분쯤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 도착했다.
24일 클라크필드 공항서 영장 집행
법무부 수년간 송환 요청 노력 성과
박왕열은 2016년 10월 발생한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의 주범이다. 그는 국내에서 150억원대 유사 수신 범행을 벌이고 필리핀으로 도주한 한국인 3명을 바콜로시의 한 사탕수수밭에서 총으로 쏴 살해했다. 살해 전 피해자들로부터 받아낸 카지노 투자금을 가로챘다.
그해 박왕열은 필리핀에서 수감됐지만 두 차례 탈옥했다. 2022년 4월 필리핀 법원에서 징역 60년을 선고받고 뉴빌리비드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민도로섬에 위치한 샤블라얀 교도소에서 생활했다.
샤블라얀 교도소가 위치한 민도로섬은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필리핀 관광부도 ‘유명 관광지’로 소개하고 있다. 민도로섬 면적은 1만571.8㎢(약 32억평)다. 7000여 섬이 있는 필리핀에서 일곱 번째로 큰 섬이다.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에서는 버스와 페리를 타고 3시간30분쯤이면 갈 수 있다.
박왕열이 수감돼있던 곳의 정식 명칭은 ‘사블라얀 교도소 형벌 농장(Sablayan prison and penal farm)’이다. 면적은 161.9㎢(약 4900만평)로, 서울시의 4분의 1 수준이다. 일반적인 교도소와 달리 농업과 직업 훈련으로 출소 후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다.
모범수나 형기가 끝나가는 수감자들은 교도소 내 작은 집에서 머물 수 있다. 자격을 갖춘 수감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 수도 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집’에서 잠을 자는 구조다.
관광객 출입이 허용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수감시설이 아닌 농장과 생태계 탐방이 주 목적이다.
필리핀 관광부는 이 시설이 “관광지로 유명하다”며 “광활한 교도소 내 부지에는 호수 낚시와 배 타기 등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도 마련돼있다”고 소개한다. 또 “수감자들은 농장 일, 낚시를 하며 지역에서 판매하는 소품, 조각품을 만든다. 이들은 방문객을 따뜻하게 맞아준다”고 소개하고 있다.
떳떳한
범죄자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 홈페이지에는 “죄수들을 직접 만나보고 그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교도소 주변의 울창한 숲에서 죄수들이 안내하는 다양한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교도소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죄수들의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고 소개돼있다.
박왕열이 있던 뉴빌리비드 교도소(NBP)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 외곽에 위치한다. 수감자의 43%가 살인 및 신체적 상해 관련 범죄로 수감돼있으며, 연쇄살인범과 마약계 거물 등도 포함돼있다. 이들 대부분이 20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재범 범죄자들이다.
이 외에도 20년 미만의 복역자를 수용하는 중간 보안시설, 형기를 마치기 직전이나 70세 이상 고령자 및 아보 교도소를 수용하는 최소 보안시설 등 3개 구역으로 구성돼있다.
2021년 11월 기준 수용된 인원은 3만여명이다. 이상적 수용 인원이 6500명인 것을 감안하면 인구 과밀화가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명도 되지 않는 필리핀 법무부 산하 수정국 간수들이 낮 동안 출입문을 통제하는 것 외에 별다른 조치에 나서지 않는다.
다만 수감자 약 1만명(PDL)이 올해 안에 국내 다른 교도소 시설로 이송될 예정이다. NBP 외에도, 메트로 마닐라 외곽에 위치한 교도소 시설로는 팔라완의 이와히그 교도소 및 교도소장(IPPF), 오시덴탈 민도로의 사블라얀 교도소 및 교도소장(SPPF), 잠보앙가시의 산 라몬 교도소 및 교도소장(SRPPF), 다바오 교도소 교도소장(DPPF), 레이테 지역 교도소(LRP)가 있다.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NBP가 2028년 이전에 폐쇄될 전망이다. 정부기관, 주택 등 부동산 개발이 한창”이라고 전했다.
이어진
호화 생활
필리핀 교정당국은 지난해 12월 말까지 약 2만8000여명의 수감자 중 1만8222명이 형기 만료로 석방됐고 나머지는 가석방, 무죄 및 기타 법적 구제책을 통해 풀려났다고 발표했다. 혼잡 체증률은 2022년의 356%에서 69% 감소했다.
NBP 내 마약 밀수 행위는 여전히 이뤄지고 있다. 같은 해 11월 말 NBP 측은 최고 보안 구역으로 알려진 섹터 1 게이트 검사 중 여성 교도관의 바지 주머니 안에서 필로폰과 플라스틱 막대기를 발견했다. 이 교도관은 NBP 내부 병원에서 수감자들과 자주 접촉했다고 한다.
같은 달 초에도 NBP 내에서 1급 교도관이 13만페소(한화 약 325만원), 19.4g(동시 투약량 600여명) 상당의 필로폰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 교도관은 필리핀 문틴루파시 경찰과 마약단속국(SPD-DEU)의 공조로 잡을 수 있었다.
NBP는 일반적인 감옥과는 다르게 재소자들이 교도소 내에서 물건을 사고 팔거나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고립된 범죄자 마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설명이다.
실제 2014년 NBP를 급습한 필리핀 수사기관은 마약은 물론 140만페소(3354만4000원) 상당의 현금과 스트립바, 최고급 욕조, 에어컨 시설 등을 발견했다.
정부는 10년 가까이 박왕열을 송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 대통령은 이달 초 필리핀과 정상회담에서 박왕열에 대한 신병 인도를 요청해 그는 임시 인도 형태로 송환됐다. 현재 경기북부경찰청은 박왕열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이다. 박왕열은 국내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 남은 형기를 채워야 한다.
앞서 한국과 필리핀은 형사사법공조조약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핀에서 장기간 수용 생활을 하는 한국인을 한국으로 이송하면 좋으나 수용자 이송조약은 체결돼있지 않았었다.
마닐라 외곽 유명 관광 섬서 편안한 생활
박왕열발 ‘교도소 마약 유통’ 줄어들 듯
과거 법무부는 이송 조약조차 체결하지 못했었다. 한국 정부의 소극 행정이라는 지적이 나왔던 이유다.
실제 법무부는 일부 한국인 범죄자들에 관해 송환신청서도 보내지 않은 바 있다. 범죄인 인도는 국제형사사법 공조 활동 가운데 가장 고전적 수단이다. 이는 관할권으로부터 도주한 범죄인은 범죄인 소재지국보다는 범죄 행위지국서 유효·적절하게 재판 또는 처벌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다만 범죄인 인도는 국제법상 확립된 제도가 아니다.
국제법상 의무가 아니므로 조약상 의무가 없는 한 타국의 인도 요구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제법 위반은 아니기에 각국은 인도 여부를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다.
한국 범죄인 인도법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와도 상호주의를 적용해 인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인도 대상이 되는 범죄는 원칙적으로 청구국 영역에서 발생한 범죄다. 영해나 영공서 저지른 범죄는 물론 공해상 청구국의 선박이나 항공기에서 벌인 범죄도 포함한다.
범죄인은 수사 또는 재판을 받고 있거나 유죄 판결을 받고 피청구국으로 도주한 자를 말한다. 인도 대상 범죄인은 주로 청구국 국민과 제3국인이다. 인도가 허용되는 범죄는 청구국과 피청구국의 법률로 모두 처벌 가능한 범죄여야 한다.
인도 요청을 거절하는 사유는 의무적 거절 사유와 재량적 거절 사유로 나눌 수 있다. 피청구국에서 청구 범죄에 대해 이미 확정 판결을 받은 경우도 의무적 거절 사유다. 박왕열이 송환되지 않았던 이유도 현지에서 재판을 받고 있어 의무적 거절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례적 상황
남은 수사는?
한 경찰 관계자는 “이번에 박왕열이 송환된 건 대통령의 결단이 있기에 가능했다. 과거부터 법무부가 박왕열을 포함한 해외 범죄자들을 송환하려 노력해 왔다고 해도 대통령이 나서면 달라진다”며 “해외 범죄자에 대한 송환은 법무부뿐만 아니라 외교부의 역량까지 동원돼야 하는 만큼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