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경의 <목민심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 중 하나다. 책 이름을 모르는 공무원이 거의 없고, 한 번쯤 펼쳐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 2014년 출간 이후 누적 판매 650만 권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면 <상록수>와 <토지>에 이어 거론되는 역대 베스트셀러 3~4위권이다.
소설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닌 한 권의 고전이 이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위상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놀라운 숫자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하게 된다. 이렇게 많이 팔린 책이 왜 행정의 언어로는 살아 움직이지 못했는가.
<목민심서>는 흔히 “백성을 사랑하라”는 도덕서로 오해된다. 하지만 이 책의 본질은 훨씬 냉정하다.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집필한, 철저히 실무적인 행정 지침서다. 세금을 어떻게 걷을 것인가, 송사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재난이 발생했을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관리가 부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정약용은 인간이 선하다는 전제 위에 행정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권력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목민심서>는 이상을 설파하기보다 권력을 가진 자가 매일 넘어질 수 있는 지점을 미리 짚어주는 책이다.
이 고전이 오늘날까지 읽히게 된 데에는 황인경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황인경의 <목민심서>는 원문을 그대로 옮긴 번역서가 아니다. 황인경은 한문 원전을 현대 한국어로 풀어 쓰며, 이 책을 시험용 텍스트가 아니라 현대 행정과 일상에 연결되는 교양서로 재구성했다.
그래서 <목민심서>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필독서가 됐고, 연수원과 기관의 추천 도서로 자리 잡았으며, 단체 구매와 반복 구매를 통해 10여년 만에 650만권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고전이 ‘해설본’이라는 형태로 대중화된 보기 드문 사례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상하게도 늘 책장 위에만 머물렀다. 결재선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목민심서>가 요구하는 질문은 불편하다. “이 결정의 책임을 당신은 끝까지 질 수 있는가” “이 판단이 백성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권한을 쥔 당신은 스스로를 얼마나 절제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시험 문제로는 출제될 수 있지만, 조직 문화 속에서는 쉽게 환영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행정 모습은 오랜 시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책이 실패하면 책임은 아래로 이동하고, 판단은 조직 뒤로 숨는다. 민원은 사람의 사정이 아니라 처리 건수가 되고, 행정의 성과는 숫자로 요약된다. 결정은 빠를수록 유능하다고 평가받지만, 설명과 설득은 종종 생략된다.
이것이 <목민심서>가 반복해서 경계해온 장면들이다. 정약용은 관리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220년 전 정약용의 경고를 교양 문장으로만 소비해 왔다.
이제 시선을 2026년으로 옮겨보자. 새해에 우리가 <목민심서>에서 다시 꺼내야 할 것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다. 이 책은 공무원에게 착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엄격해지라고 요구한다. 권한을 가졌다는 이유로 편해질 것이 아니라, 그만큼 더 불편해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황인경의 <목민심서>가 가진 가장 현대적인 메시지다.
650만권이 팔렸다는 사실은 자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숫자는 오히려 질문이 된다. 더 많이 팔리면 달라질까. 1000만권이 넘으면 정신을 차릴까. 답은 분명하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한 권을 읽어도 그 한 권이 자기 자리에서의 판단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책은 여전히 장식품이다.
그래서 2026년을 향한 바람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목민심서>가 다시 시험에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도, 더 많이 인용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이 국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
결재를 올리기 전 한 번 더 떠올려지는 책, 민원을 숫자로 처리하기 전에 한 문장이 스치는 책, 권한을 행사하기 직전 스스로를 점검하게 만드는 책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며칠 전 필자는 황인경 작가와 우리 사회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황 작가는 “<목민심서>가 많이 팔린 건 좋지만, 우리 정치와 사회가 여전히 속도와 성과만 좋아하고 기본은 지켜지 않고 있다”며 “새해부터는 목민심서 작가로서 정약용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황 작가가 정약용의 이름을 빌려 대신 말하겠다고 한 것은 과거를 소환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필자도 <목민심서>는 읽히는 책이 아니라 작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민심서>는 이미 충분히 팔렸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판매가 아니라, 다시 읽는 방식의 변화다. 공무원들은 이 책을 자기 이름이 적힌 책임 앞에서 다시 읽어야 하며, 우리 국민 역시 행정이 어긋날 때 “이게 목민의 자세인가”라고 물을 수 있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목민심서>는 살아 있는 책이 될 수 있다.
2026년에는 <목민심서>가 책장 한켠에 꽂힌 고전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기준이 되길 바란다. “속도가 아니라 기본이 중요하다”는 황 작가의 한마디가 결재선 위와 판단의 순간마다 다시 떠오를 때, 이 650만권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행정을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