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그녀는 또 술잔을 들어 루주가 짙은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누나, 지금 몇 살이야?”
“뭐, 누나? 그건 왜 물어?,재수없게…… 아까 스물다섯이라고 얘기한 것 같은데, 응? 히힛,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야.”
통금 사이렌
“아니, 뭐…… 8.15 해방이란 것도 내겐 실감이 잘 안 되는데다가, 6.25 전쟁 때 열 살쯤이었다면…… 지금은 아마 서른 살 정도 된 것 같아서…….”
“흥, 그래 맞아. 하지만 순전히 거짓말만은 아냐.”
“응?”
“몸은 늙어 가도 마음만은 응달의 이끼처럼 마냥 붙어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왜 그럴까?”
“흥, 한이 많아서 그렇겠지 뭐. 그리고 아무리 구질구질한 뒷골목 인생이라도 처녀 시절엔 누구든 로맨스가 있는 법이니까.”
창녀는 굳이 건배를 청하면서 청운의 잔에 자기 잔을 쨍 부딪친 다음 울음도 웃음도 아닌 묘한 눈빛으로 마셨다.
“그 후 난 견디다 못해 집에서 도망치고 말았었지. 그즘엔 육신은 배를 곯지 않았지만 마음이 찢어지도록 괴롭고 가난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자살을 할까, 그 양아치 같은 세 놈들을 죽여 버릴까? 심장을 먼저 찌를까, 시퍼런 칼날로 성기를 싹둑 잘라 버릴까, 아니면 거짓말을 참말처럼 해대는 그 주둥아릴 철사줄로 꽁꽁 묶어 놓을까? 온갖 공상을 다 했지만…… 난 결국 아무런 복수도 못한 채 바보처럼 그 악마굴 같은 집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어. 꼴에 엄마 뱃속에 든 동생까지 걱정하면서…… 흐흥,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동두천이란 데가 징글맞으면서도 은근히 무섭더라구.”
멀리서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진한 화장 속에 든 저 여자의 맨얼굴은 더 슬프지 않을까?’
청운은 창녀의 잔에 술을 부어 주면서 생각했다. 그 잔엔 피의 지문 같은 루주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녀는 꽤 취한 상태였다.
“겉보기엔 번듯한 이층 양옥집이었지만 짐승 소굴 같았던 그 집…… 거길 나온 후 난 그래도 사람답게 사는 게 복수하는 길이다 싶어 봉제공장에 취직을 했지…… 힘은 들었지만, 그 삭막한 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어. 같은 구로공단의 공돌이였는데 구슬픈 눈빛이었지만 내 앞에선 쾌활하려고 애썼지. 하지만 금형 기계에 손가락을 세 개나 잘려 버린 뒤론 술과 노름에 빠져 무슨 괴상스런 벌레처럼 변해 버리더군. 하긴 뭐 바퀴벌레를 돈벌레라면서 잡아 기르기도 하고 슬슬 기는 지네나 쥐며느리 따윌 보곤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노름빚을 갚기 위해 나를 뚜쟁이패에 팔아 버렸어. 이러구러 저러구러 결국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거지. 흐흥…….”
창녀는 처량스레 웃었다.
“이년의 신세에 비하먼 자긴 아무리 어릴 때부터 거지 노릇을 하고…… 무인도에 잡혀가 고생을 했다더라두…… 내 앞에선 풋내기란 얘기야. 흥, 알겠어요? 어린 새 낭군님, 호호…….”
청운은 아무 말 없이 투명한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찰랑거리는 술을 통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아주 작아져 천사처럼 혹은 악마처럼 멀리 비쳤다.
‘그래, 아무래도 난 잘 모르겠어. 신이 내려다볼 때는 먼지나 개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누군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겠어? 아무리 밤새워 얘기해 본들 내가 저 여자를 알 수 없듯 이 시대엔 창녀가 북파 간첩을 이해할 수도 없을 거야…….’
청운은 속으로 생각하며 술을 들이켰다.
“우리 이젠 그거 해야지, 응?”
여자가 청운의 목을 두 팔로 감아 안으며 속삭였다.
“뭘……?”
“아이 참, 자기두…… 순진한 척 엉큼스럽긴…….”
울음도 웃음도 아닌 묘한 눈빛
번듯한 이층 양옥집 짐승 소굴
“잡혀가기도 하고 팔려가기도 하고…… 대부분 억울한 경우가 많겠지만…… 혹시 자기 스스로 원해서 온 사람은 없겠죠?”
“미친 소리야.”
그녀는 불그무레한 입술로 청운의 물음이 맴도는 입을 막으며 폭 껴안고 함께 방바닥에 쓰러졌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청운은 국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가 동두천행 버스를 탔다.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북쪽을 향해 달리는 낡은 고물 버스는 비포장도로 위에서 덜컹거리며 먼지를 풀풀 날렸다.
차 안은 그리 복잡하진 않았다. 삐걱대고 누추한 좌석이나마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각자의 여로를 오르고 있었다.
승객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은 편이었다.
수수한 모습의 아낙네나 할머니도 보였지만, 개 중엔 고불고불 윤기나게 물파마를 한 머리에 화장을 진하게 하고 울긋불긋한 목도리를 두른 채 껌을 찍찍 씹어대는 아가씨도 있었다.
껌을 입속에서 혀로 재주껏 놀려 띡딱거리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청운은 눈을 창으로 돌려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 몇 점이 서서히 모습을 바꾸면서 떠 가는 푸른 하늘 아래로 황량한 겨울 벌판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무리 넓은 땅을 돌고 돌아 푸른 강을 따라가도 멀찍이 둘러선 채 시야를 가로막는 산들은 마치 보초병처럼 사람을 가두려는 듯했다.
산이 많은 나라라는 말은 들었지만, 북파 공작원 훈련소에 가기 전엔 결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명의 기운이 깃든 든든하고 자연스런 청산靑山이란 생각밖에는…….
청운은 가능하면 무심한 상태로 되어 보려고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멎어 안내양이 문을 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난방이 되지 않는지라 촌로들은 짐짓 몸을 웅크리며 떨었고, 그러면서도 온기를 좀 들이켜 보려는 양 싸구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면 눈을 감고 있던 아낙네들은 창문을 조금 열고 심호흡과 함께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것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화장을 진하게 한 젊은 아가씨들 중에서도 몇몇은 거리낌없이 고급스런 곽에서 담배개비를 꺼내 물고 흡연을 하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흡연이 자유로운 시절이었지만, 서울에서조차 여자가 찻간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는 경우는 없었다. 남자에겐 낭만으로 여겨져 억지로 권장되기도 하는 흡연이 여자에겐 금기시되던 사회였다.
그 순간부터 청운은 이방의 나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청량리의 창녀가 들려 준 얘기가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또는 그 순간 거대한 컨테이너 같은 미군 PX 트럭이 굉음을 내며 스쳐 나가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일까?
청운의 옆자리엔 누르무레한 파마 머리의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차를 타자마자 곧 눈을 감은 채 코까지 살짝 골며 잠이 들었다.
잃어버린 꿈
검문소에서 미군 PX 트럭은 곧장 통과하고 낡은 시외버스가 제지당해 멈추자, 선글라스를 낀 헌병이 올라와 의례적인 동작으로 가볍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승객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심중에 청운은 가슴이 덜컥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흐흐, 만일 선감도에서 도망친 후거나 해골산에서 탈영한 신세라면 쥐구멍에라도 기어들고 싶을 거야. 하지만 이제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그냥 태연하면 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