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누명 벗고 돌아온 김건모

6년 만에 무대 오르는 ‘가왕’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김건모가 오랜 침묵을 깨고 돌아왔다. 무려 6년 만의 복귀다. 그간 성폭행 의혹에 휘말려 만신창이가 된 그는 무혐의 처분에도 지난 6년간 꽁꽁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김건모는 마침내 용기 내어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러 무대에 선다.

김건모의 성폭행 의혹이 시작된 건 2019년 12월6일,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를 운영하던 강용석과 김세의는 가수 김건모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방송을 통해 “김건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직접 메일을 보내와 두 차례 만났다”고 주장했다.

거짓된 미투
실추된 명예

피해 여성의 진술에 따르면 2016년 8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유흥주점에서 김건모가 그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한 뒤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었다. 강용석은 “피해 여성이 직접 가게 내부 구조를 그려 줬고, 김건모가 당시 입고 있던 의상은 7부 길이 배트맨 티셔츠였다”고 주장했다.

이날 방송에서 가세연 측은 “구체적 진위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 증거를 많이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즉시 증거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월요일(12월9일)에 고소장이 제출될 예정”이라고 밝히며 본격적인 법적 절차가 진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김건모 소속사 건음기획은 같은 날 “본인 확인 결과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이어 “허위사실 유포 및 명예훼손에 대해 법적 대응을 진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2019년 12월9일, 강용석 변호사는 피해 여성 A씨를 대리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소장에는 2016년 8월 김건모가 술집에서 A씨를 성폭행했다는 피해 사실이 적시돼있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배당한 뒤, 사건 발생 장소와 관계인 주거지 등을 고려해 강남경찰서에 수사 지휘를 내렸다.

김건모 측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소속사는 12월13일 입장문을 내고 “김건모는 피해 사실조차 전혀 모른다”며 “유튜브 방송으로 인해 거짓이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맞고소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건음기획은 A씨를 정보통신망법 위반 및 무고 혐의로 강남경찰서에 고소했다. 입장문에서 김건모 측은 “진실된 미투는 보장돼야 하지만 거짓 미투와 미투 피싱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며 의혹을 완강히 부정했다.

김건모의 성폭행 의혹은 곧 방송과 공연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의 제작진은 당시 고정 출연하던 김건모의 분량을 편집하거나 촬영을 취소했다. 논란 이후의 방영분부터는 김건모 모친의 출연 분량까지 편집됐고, 프로그램의 오프닝·엔딩 음악으로 사용되던 김건모의 곡 ‘My Son’도 교체됐다.

MBC 에브리원의 <비디오스타>에서도 김건모 예비 처남 장희웅이 출연해 결혼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해당 부분은 통편집됐다. 25주년 기념 전국투어 콘서트도 타격을 받았다.

인천 공연 이후 부산, 광주, 수원, 대구, 서울 등에서 이어질 예정이던 공연은 예매 티켓 환불이 잇따르면서 전면 취소됐다. 주관사 아이스타미디어는 “최근 발생한 아티스트 측 이슈로 전국 투어 일정을 취소한다”며 전액 환불 조치를 안내했다.

이후 가세연은 또 다른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 B씨의 사례를 공개했다. B씨는 2007년 1월10일 강남 테헤란로의 한 유흥주점에서 매니저로 일하다 김건모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쟁 끝에 김건모가 욕설을 하며 머리채를 잡고 주먹으로 얼굴과 복부를 때려 피를 흘렸다”고 말했다.


성폭행 의혹 무혐의 처분
2019년 중지한 활동 재개

그가 병원에서 안와상·코뼈 골절 진단을 받았다는 의무기록 사본도 공개됐다. 당시 업소 관계자가 가세연 인터뷰에 등장해 “피해자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나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반론도 나왔다. 2020년 1월, 유튜브 채널 ‘이진호의 기자싱카’에서는 또 다른 인터뷰를 공개하며 당시 상황이 가세연 주장과 달랐다고 전했다.

해당 영상에서 제3의 인물과 피해자로 지목된 다른 종업원은 “실제 폭행의 시작은 B씨였고, 김건모는 말리는 과정에서 휘말렸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이어 B씨 측이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900만~1000만원가량을 건넸다는 사실도 공개됐다.

성폭행 의혹의 핵심 단서로 언급된 ‘배트맨 티셔츠’ 역시 논란이 됐다. 피해 여성은 당시 김건모가 배트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티셔츠 제작자는 “해당 제품은 2016년 12월부터 제작된 한정판으로, 피해자가 주장한 2016년 8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제작자는 “김건모를 위해 특별 제작한 제품이며, 첫 착용 시점도 2016년 12월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흔들었다.

2020년 1월15일, 김건모는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해 약 12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는 조사 후 “하루빨리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경찰은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차량 GPS 기록 등을 분석했지만, 피해자 진술 외에는 직접적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020년 3월, 경찰은 기소 의견을 달아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이 과정에서 김건모가 폭행 피해를 주장한 여성을 상대로 제기했던 명예훼손 고소는 2020년 5월 취하됐다. 반면, 김건모의 무고 고소 건은 경찰이 “무고죄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려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로 넘어갔다. 그러나 2021년 11월18일, 검찰은 김건모에게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이유는 피해 여성의 진술이 구체적인 행위 부분에서 모순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피해 여성은 이에 반발해 항고했으나 2022년 6월 기각됐다. 이어 법원에 재정신청을 제기했지만 2022년 11월4일에도 기각됐다. 이로써 김건모는 성폭행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재판부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은 정당하며, 달리 부당하다고 인정할 자료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90년대
아이콘

김건모 측은 “혐의를 벗는 데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수사 과정에서의 고충을 토로했다. 김건모 성폭행 의혹은 2019년 12월 가세연의 폭로로 시작해 2022년 11월 최종 무혐의 확정까지 약 3년에 걸쳐 이어졌다. 김건모는 성폭행 의혹에 휘말린 이후 방송과 공연에서 사실상 퇴출됐고, 수십억원의 금전적 손해와 명예훼손을 겪었다.


김건모가 성폭행 무혐의를 받자 대중들은 “명예가 크게 실추돼 잃은 것이 너무도 많다”는 반응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건모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음악가로서의 명예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김건모는 199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가수로 꼽힌다.

데뷔 직후부터 독특한 음색과 폭넓은 장르 소화력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국민 가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음반 판매량과 방송 출연, 각종 시상식에서의 기록은 당시 한국 가요계의 절대적인 입지를 보여준다.

김건모는 1992년 1집 앨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서울예술대 국악과 출신으로, 군 복무 시절 해군 홍보단에서 음악 활동을 병행하며 실력을 다졌던 그는 프로듀서 김창환과의 인연으로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타이틀곡은 라디오와 방송을 통해 인기를 얻었고, 후속곡 ‘첫인상’은 KBS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에 오르며 골든컵을 수상했다. 1집은 약 70만장이 판매되며 신인으로서는 큰 성과를 거뒀고, 방송 3사 신인상과 10대 가수상을 휩쓸며 이름을 알렸다.

김건모는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 흔치 않았던 재즈·소울 기반의 음악을 보여줬다. 여기에 레게와 힙합 리듬을 결합해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1993년 말 발표된 2집 <핑계>는 김건모의 입지를 노래 잘하는 ‘인기 가수’에서 ‘국민 가수’로 끌어올린 앨범이었다.

타이틀곡 ‘핑계’는 레게 리듬을 도입한 댄스곡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길거리 불법 테이프 판매점에서부터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적인 히트를 쳤고, 다수의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후속곡 ‘혼자만의 사랑’은 발라드를 소화하는 그의 역량을 보여줬다. 김건모표 발라드는 이후에도 꾸준히 호평을 받았다. 2집은 약 18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1994년 음반 판매량 전체 1위를 차지했고, 그해 방송 3사 연말 가요대상,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했다.

역대 최다 판매
기네스북 등재

당시 5대 가요 시상식에서 대상을 휩쓴 가수는 김건모가 최초였다.

1995년 2월 발매된 3집 타이틀곡 ‘잘못된 만남’은 김건모의 대표곡이 됐다. 빠른 비트와 랩, 고음이 결합된 곡은 유로비트 기반의 하우스 음악을 국내에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곡은 KBS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 SBS <TV가요20> 6주 연속 1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50> 2주 연속 1위 등 각종 방송 차트를 석권했다.

3집 앨범은 약 286만장이 판매돼 당시 대한민국 음반 역사상 최다 판매 기록을 세우며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 가요사에서 손꼽히는 판매량이다. 3집에는 ‘아름다운 이별’ ‘너에게’ ‘드라마’ ‘넌 친구? 난 연인!’ 등 히트곡이 다수 수록되어 음반 전반의 완성도가 높았다.

3집 활동 이후 김건모는 홀로서기를 택했다. 1996년 발표한 4집 <Exchange>에서는 타이틀곡 ‘스피드’가 인기를 얻었고, 16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7년 5집 <Myself>에서는 ‘사랑이 떠나가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이 사랑받았고, 1999년 6집 <Growing >은 대중적 흥행은 다소 저조했지만 음악적 완성도 면에서 높게 평가됐다. 이 시기 김건모는 자작곡을 늘리며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량을 입증했다.

2001년 발표한 7집 <Another Days...>는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김건모의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타이틀곡 ‘미안해요’ 코믹 댄스곡 ‘짱가’ 리메이크곡 ‘빗속의 여인’ 등이 모두 히트했고, 앨범 판매량은 143만장에 달했다. 김건모는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하며 다시 정점에 섰다.

2003년 8집 <History>에서는 발라드 ‘청첩장’ 자전적 곡 ‘My Son’ 코믹송 ‘제비’ 등이 발표됐다. 앨범은 53만장 이상 판매되어 그해 국내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김건모의 8집은 대한민국 음반 시장에서 마지막으로 하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앨범으로 평가된다.

2005년 발표한 9집 <잔소리>와 2006년 10집 <Soul Tree>는 대중적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않았지만, 평단에서는 김건모의 음악적 색채가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했다. 특히 10집 타이틀곡 ‘서울의 달’은 시간이 흐른 뒤 재평가받으며 오디션 프로그램과 음원 차트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었다.

김건모는 이 곡을 공연에서 즐겨 부르며 곡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김건모는 특유의 까랑까랑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보컬과 음색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재즈, 소울, 레게, 하우스 등 다양한 장르를 한국 대중가요에 접목시켰으며, 무대에서 보여주는 라이브 실력도 동시대 가수들과 견주어도 높은 수준을 보였다.

“음악 한순간도 놓은 적 없어”
깜짝 복귀에 콘서트 전석 매진

그는 서울예대 재학 당시 ‘천재’로 불릴 정도로 작곡·편곡·피아노 실력까지 겸비한 뮤지션이었다.

1990년대 한국 가요계에서 김건모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는 1994년 한 해 동안 방송 3사 연말 가요제, 서울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 등 5대 시상식에서 모두 대상을 수상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유일한 가수다. 또 1994년, 1995년, 2003년 세 차례 음반 판매량 연간 1위를 기록했다.

‘핑계’ ‘잘못된 만남’ ‘아름다운 이별’ ‘스피드’ ‘청첩장’ ‘서울의 달’ 등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히트곡이다. 윤일상 작곡가는 저서에서 “조용필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음악적 역량을 가진 가수”라고 김건모를 평가하기도 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김건모는 방송 출연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2010년대에는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파일럿 방송부터 원년 멤버로 합류한 그는 ‘철없는 형’ 캐릭터와 어머니 이선미 여사의 솔직한 입담으로 시청자의 웃음을 자아냈다.

횟집 어항을 집에 들여놓거나 5시간 넘게 대왕 김밥을 만드는 장면 등은 프로그램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특히 어머니 이선미 여사가 서장훈과 주고받던 직설적인 대화는 꾸준히 화제를 모았다. 김건모는 예능 활동을 통해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 시청자들에게도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가며 높은 시청률을 이끌었다.

긴 공백 끝에 김건모는 올해 9월부터 6년 만에 전국투어 콘서트를 열며 가요계 복귀를 알렸다. 공연제작사 아이스타미디어컴퍼니는 “김건모가 부산 KBS홀을 시작으로 대구, 대전,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KIM GUN MO.’ 투어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김건모의 전국 투어는 오는 27일 부산 KBS홀 공연을 시작으로 막을 올린다. 이어 10월18일 대구 엑스코(EXCO)에서 팬들과 만날 예정이며, 12월20일 대전컨벤션센터에서도 무대를 이어간다. 투어의 마지막은 내년 1월 서울 공연으로 예정돼있다.

소식이 전해지자 예스24를 통해 오픈된 부산 공연 티켓은 전석 매진됐고, 대구와 대전 공연도 빠르게 판매되며 여전한 인기를 입증했다.

공연 관계자는 “김건모는 오랜만의 무대인 만큼 세트 구성과 밴드 편성, 곡 순서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며 “팬들에게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준비에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건모는 무대를 떠나 있었지만, 음악만큼은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았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라고 덧붙였다.

공연 일정이 발표되자 팬덤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만난다” “힘든 시간을 겪고도 팬들과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 감동적이다”라는 댓글이 이어졌고, 중장년층 팬들뿐 아니라 과거 히트곡으로 김건모를 접한 젊은 세대까지 티케팅에 동참했다.

오랜 기다림
팬들과 조우

방송인 박명수는 자신의 라디오에서 김건모의 대표곡을 직접 선곡하며 “개인적으로 건모 형 노래를 좋아한다. 다시 활동하신다니 반갑다”며 “‘서울의 달’ 같은 곡은 다시 무대에서 듣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건모 형의 무대를 다시 보고 싶다. 꼭 라디오 쇼에 나와주셨으면 한다”며 섭외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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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APEC’ 강대강 매치 막전막후

‘경주 APEC’ 강대강 매치 막전막후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APEC 정상회의(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이하 정상회의)가 경북 경주에서 열린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20개 나라 정상이 초청 대상으로, ‘외교 슈퍼 위크’가 시작된 셈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각국의 강경파들이 경주로 모이면서 서로 어떤 합을 보일지 관심이 쏠린다. 2025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한미 관세 문제가 급물살을 탔다. 지난 7월 협상 시한 하루를 앞두고 한미 간 무역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지 약 세 달 만이다. 정상회의를 계기로 관세 협상이 매끄럽게 마무리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노브레이크 미국 관세 쟁점은 한국이 상호 관세를 15%로 낮추는 조건으로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3500억달러(약 500조원)에 대한 지불 방식이다. 한국은 직접 투자 비중을 줄이고 투자 기간을 늘리겠다는 방침이지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 최대한 현금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현금 선불 투자를 고집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는지가 협상 타결의 관건이란 관측이 나온다. 정상회의가 며칠 남지 않은 시점까지도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큰 틀에서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세밀한 부분이나 주요 쟁점이 해결되지 않는 등 의견이 모이지 않은 탓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22일(현지시각)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회담한 뒤 “진전이 있었다”면서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날 김 실장은 ‘마지막 쟁점이 조율됐느냐’는 특파원들 질문에 “쟁점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두 개라고 했고, 아주 많지는 않다”며 “오늘 남아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진전이 있었다. 만나면 조금 더 상호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고 답했다. 양국의 대면 협의가 사실상 이날 종료되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두 사람의 결단만 남았다. 미중 간의 관세 협상 결과와 이번에 이뤄질 두 정상의 만남이 한국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중국과 미국은 지난 4월부터 보복 형식으로 서로를 향해 관세 허들을 높여갔다. 그러던 중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면서 질주하는 미국에 제동을 걸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산 제품에 100% 관세를 추가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관세 전쟁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추가 관세가 현실화하면 중국이 미국에 내야 할 관세는 157%에 달하는 만큼 미중 간의 팽팽한 대립이 이어졌다. 좁히지 못한 ‘디테일’ 막판 협상 난항 이 “우리는 동맹…상식과 합리성 공유” 중국이 밸브를 잠그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희토류와 핵심 광물 공급 협력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 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일본도 일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희토류 삼각 동맹이 이뤄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1일 백악관 로즈가든 클럽에서 주재한 오찬 행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한국에서 만나 많은 것을 이야기할 것”이라며 대화의 여지를 열어뒀다. 이어 “우리가 협상에서 잘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나는 시 주석과 좋은 합의를 하고 싶고, 시 주석이 중국을 위해 좋은 합의를 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합의는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중 간 무역 갈등이 장기화되면 한국 경제 성장률을 비롯해 수출입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 대통령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전망과 관련해 “조정·교정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펀드를 둘러싼 이견에 대해서는 “결국 이성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왜냐하면 우리는 동맹이며 서로 상식과 합리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중 갈등이 현재 진행형인 상황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한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11년 만에 이뤄진 시 주석의 방한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직 한중 관계에 큰 잡음은 없지만 훈풍이 불지 않는 만큼 개선의 여지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한중 관계의 안정적 관리에 대해 초점을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명정부의 첫 주중대사인 노재헌 신임 대사는 “(시 주석의) 국빈 방문이 계획됐기 때문에 한중 관계가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며 “양국 지도자 간에 우호와 신뢰 관계를 다시 굳건히 하고 그 초석 위에서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친하지?” 서먹해진 중국 이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시험대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전승절)’에 초청받았지만 의전 서열 2위인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신 자리했다. 이 대통령의 전승절 참여 여부를 놓고 국민의힘이 친중 프레임을 굳히자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앞서 백악관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축사를 하던 중 뜬금없이 “중국의 간섭과 영향력 우려”라며 중국을 향해 견제구를 날렸다. 한국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임을 강조할 경우 미국이 제동을 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한중 관계 개선의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인 만큼 한국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한다. 김지수 한반도 미래경제 포럼 대표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단어가 나오던 때랑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안보와 경제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런 점에서 미국이 더 중요해졌다”고 봤다. 이 대통령 역시 안미경중 노선에 대해 “과거처럼 그런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견제, 나아가 봉쇄 정책을 본격 시작하기 전까지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몇 년 사이 자유 진영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간 공급망 재편이 본격적으로 벌어졌고 미국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며 “중국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데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관계를 잘 관리하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상황”이라 고 부연했다. ‘여자 아베’ 경주 데뷔 김 대표는 “미국의 최대 경쟁국은 중국”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중국을 제어하기 위해 한국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미중 패권 전쟁에서 유리한 전략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중국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미국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중국을 적대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중국인 무비자 입국으로 한국 전역에 퍼진 반중 혐오 시위도 고려 대상이다. 최근 국민의힘 등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반중 정서가 확대되면서 외교 갈등이 촉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노 대사는 중국 주상하이 총영사관에서 주중대사관을 상대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국 내 반중·혐중 시위를 묻는 말에 “당연히 우려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고 양국 국민의 우호 정서 함양·증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근거 없고 음모론에 기반한 행위에 대해서는 조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시적 비자 면제 정책에 대한 자국민의 우려에 대해서도 “불법 체류 현황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범죄 같은 부분은 입국자 등을 잘 지켜보면서 필요하면 단속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지난 21일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본격 대외 행보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보수 성향이 짙은 탓에 한일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정권 초기인 만큼 우호적 태도를 유지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중의원 10선 의원으로 경제안보담당상, 총무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일본 정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비세습 여성 정치인으로 강경 보수 성향이라는 평가와 함께 입지를 다져왔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4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권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1999년부터 자민당과 협력해 온 중도 보수 성향인 공명당이 연정에서 이탈해 표가 분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강경 보수 성향이자 제2야당인 일본유신회를 새롭게 끌어들이면서 극적으로 총리직에 당선됐다. 서로 싫다는 미·중, 사이에 낀 한국 일본까지 강경파 ‘폭풍 속 한반도’ 이 대통령은 신임 일본 총리가 선출된 것에 대해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경주에서 총리를 직접 뵙고,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같이 밝히며 “우리는 새로운 한일 관계의 60년을 열어가야 하는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진 국제 정세 속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 역시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중대한 시기에 총리와 함께 양국 간, 그리고 양 국민 간 미래지향적 상생 협력을 한층 강화해 나가길 기대한다. 아울러 셔틀 외교를 토대로 양국 정상이 자주 만나 소통할 수 있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훈훈한 축하 인사와 달리 한일 관계는 다시 시험대에 놓였다. 온건하다고 평가받았던 이시바 시게루 내각 체제만큼 협력 기조가 이어질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1년 총재 선거 당시 고 아베 전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임 보수 전사로 떠올랐다. 이번 총리 선거에서 역시 아베 전 총리의 파벌로 형성된 아베파의 지지가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현지 신문은 자민당의 연정 상대가 공명당에서 유신회로 바뀌면서 다카이치 내각의 보수색이 선명해졌다고 해석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꾸준히 참배해온 만큼 한국 과거사와 독도 영토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놓고 이정부와 충돌할 우려도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다카이치 총리가 이번에 보여준 강경 보수 행보는 우익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한일 외교에 있어서는 이시바 내각과 마찬가지로 온건한 노선을 택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에 우호적인 뜻을 내비쳤으며 가을 예대제 기간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을 것으로도 전해진다. 한일 관계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다카이치 총리의 온건 행보가 일시적일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역대 총리들이 그랬듯 지지율이 떨어지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반한 감정을 부추겨 보수 지지층 결집을 유도할 것이란 점에서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 대통령이 국가 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미, 한중, 미중 정상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릴 가능성이 크고 비핵화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남·북·미 간의 대화 물꼬를 튼다면 경주를 무대로 ‘평화 한반도’ 기조를 형성하는 일등 공신 역할을 노릴 수 있다. 눌리거나 손잡거나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관계자는 “이 대통령에게 가장 큰 변수는 아무래도 미국이다. 각 국가 정상마다 성향도 다르고 원하는 바도 다른 만큼 미국부터 삐끗하면 차후 일정도 줄줄이 꼬인다”면서 “조급하게 나서면 될 일도 안 되는 게 외교 문제다. 한국은 한국만의 강점이 있다. 우리 쪽에서도 몇 가지 카드가 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정부를 믿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하필 지금? 미사일 쏜 북한 속내 지난 22일 북한이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한미·한중 정상회담 등에서 북한 문제가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미국을 향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한미군과 우리 군의 반응이 엇갈린 점 역시 주목된다. 주한미군은 미국의 한미 동맹에 대한 공약이 굳건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불법적이고 불안정을 초래하는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북한에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반면 우리 군은 통상 해오던 미사일 발사 규탄 성명을 내지 않았다.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정부가 남북 평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만큼 이를 의식해 톤 조절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