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7)더위먹은 호랑이와 독거미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5.06.23 03:37:43
  • 호수 1537호
  • 댓글 0개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이보시유. 선생은 저를 살려 주실라구 하늘이 보내신 분이 맞지요? 저도 알아요.”

“원, 별말씀을. 저 같은 자가 무슨 힘으로…….”

“아, 부탁합니다. 제발…….”

필사적 몸부림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부부는 한몸이랄까,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저희를 살려 주시는 셈치고 방도가 있으면 알려 주십시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허, 사정이 딱한 줄 짐작하지만, 인간사 길흉화복을 어떡한단 말이오. 기도를 드려보는 게 좋을 게요.”

노신사는 슬그머니 일어서려는 동작을 취했다. 아버지는 다급히 소리쳤다.

“오오, 천사님!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구 어떻게 그냥 가실라구 하십니까?”

“허, 이것 참…….”

노신사는 난처한 안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곧 음성을 중후하게 바꿔 중얼거렸다.

“허허 참, 냉수 한 사발로 천기를 누설할 수도 없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꼬깃꼬깃 감춰두었던 지폐 몇 장을 꺼내 와 노신사의 손에 쥐어 주었다.

“허허, 이거 이러자는 소리가 아닌데…… 아무튼 죽고 살고는 둘째치고 한 가지 물어나 봅시다. 사주가 어떻게 되오?”

“사주라고요?”

“그렇소.”

“예. 호랭이띠입니다.”

“호랭이라…….”

“네, 팔월 한여름에 났습니다.”

“흠, 더위 먹은 호랭이라…… 그랬군, 그랬어. 내 예감이 틀림없었군.”

한동안 손가락으로 육갑을 짚어 가던 노신사는 잔뜩 굳은 얼굴로 신음하듯 뇌까렸다.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버지가 되물었지만, 노신사는 계속 침묵할 뿐 더 이상 대꾸가 없었다. 엄마가 다시 몇 푼인가를 더 꺼내 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놀라지 않을 테니 제발 말씀해 주세요.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노신사는 비로소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지금 당신들의 절실한 간청에 감복하여 감히 신명을 어기고자 하는 바이오. 그에 따른 심정 고통이 엄청나다 해도 나를 원망치 마시오. 알겠소?”

“네, 여부가 있나요. 어서 말씀하세요.”

노신사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한번 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까 이 집 앞을 지날 때였소이다. 문득 웬 서늘한 기운 한 줄기가 내 이마를 타고 지나가지 뭐겠소?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웬 시커먼 먹구름 한 덩어리가 지붕 위에 머물러 있었소이다.”

엄마가 흠칫 놀라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쯧, 그게 아무 눈에나 보이겠소?…… 헌데 놀라지 마시오. 그 먹구름을 자세히 본즉 그건 다름 아닌 바로 독거미 떼의 운기더라 이 말이오.”

냉수 한 사발에 천기누설
먼 조상의 업보받은 아이

“뭐라구요?”

“커다란 독거미떼가 서로 엉켜 있는 형상의 운기…… 독거미가 늙은 호랭이를 파먹는 거외다.”

엄마의 안색이 백짓장처럼 핼쑥해져 갔다. 반면 아버지의 얼굴은 불그죽죽해졌다.

“헌데 그 수가 매년 한 마리씩 늘어나는 형세로 보아 이는 필시 나이를 가리킴이 분명한 터이오. 혹시 댁네 중에 현재 일곱 수의 아이는 없는지?”

“저 우리 용운이가 일곱 살인데…….”

“음…… 내 그럴 줄 알았지. 저 애가 태어난 건 언제요?”

“늦여름날…….”

“흠, 독거미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로군. 바로 저 애요.”

“뭐라구요?”

“저 애가 바로 먼 조상의 업보를 받아 독거미의 살을 품고 태어났다는 거요. 지붕 위의 살기도 저 애한테서 뿜어나오는 것이고, 또한 그게 저 양반의 기혈을 빠는 중이라 이 말이외다.”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 안의 아버지가 힘겹게 지탱하던 상체를 이불 위로 무너뜨리며 폐부 깊숙이에서 무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허! 두렵고도 두렵도다…….”

노신사의 탄식이 꼬리를 길게 끌었다. 넋 나간 듯 서 있던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이제 우리는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어떡하긴…… 호랭이와 독거미 중 한쪽이 죽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지.”

아! 그 황당무계한 소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야 어찌 되건 말건, 한 가정의 운명이야 어찌 되건 말건, 그 터무니없는 괴담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내뱉을 수 있는 마음보는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정말 자기의 지혜와 철학에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을까?

대체 어떤 무엇이 그런 황당무계한 철학에 그토록 자신감을 갖게 한 것일까?

어쨌건 그날부터 용운은 아버지로부터 느닷없이 미움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건 살의까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다음날 학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부엌에 있던 엄마는 그늘이 짙게 드리운 눈으로 용운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엄마, 왜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니다. 어서 들어가 밥 먹어라. 배고프겠다.”

미움의 세례

엄마는 비로소 정신이 든 듯 밥상을 차렸다. 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괴이쩍었다. 엄마가 부축을 하고 미음을 떠넣으려는데도 입은 안 벌리고 계속 밥상 앞의 용운만을 노려보았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단독] 국방부, 내란 문건 ‘대청소 프로젝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국방부 문건이 대규모로 파쇄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조치는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의 지시로 이뤄졌다. 오 전 기획관은 검찰 특수본과 재판서 정보사와 수사2단 인사안의 문제점을 증언했던 인물이다. 자신이 비상계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수사에 협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이다. “올해 초 신년맞이 대청소라면서 문서를 대량으로 파쇄했다.” <일요시사>와 접촉한 국방부 직원들의 말이다. 파쇄된 문건들은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자료라고 한다. 지시자는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이다. 검찰 수사에 협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는 게 군 내부자들의 주장이다. 뭘 숨기나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말 취임하면서 시작한 첫 번째 군 개혁은 인사다. 신임 인사기획관에 일반 공무원 출신인 이인구 군사시설기획관을 임용한 건 안 장관이 강조해 왔던 ‘군 문민통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사기획관은 본래 예비역 장성이 맡아왔다. 이 신임 기획관의 전임자였던 오 전 기획관도 예비역 준장 출신이다. 군 내부에서는 국방부에 여전히 12·3 내란 사태에 협조한 군인들이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핵심으로 인사기획관실의 총괄과이자 인사기획관의 일정, 예산 등을 모두 관리하는 인사기획관리과가 언급된다. 다수의 국방부 관계자들은 “오 전 기획관은 물러났지만 책임져야 할 다수의 인물이 아직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부서의 간부들은 전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과장 김모 대령은 오 전 기획관이 대령이었을 때 소령으로 근무했고, 총괄 이모 중령은 오 전 기획관이 특전사 여단장을 역임했던 1공수여단서 중대장과 707중대장을 거쳤다. 장군인사팀장 김모 대령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수도방위사령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 전 장관과 가깝거나 육사 출신인 이들이 국방부 인사의 핵심부서인 인사기획관리과에 포진하면서 계엄 실행을 위한 보직 이동이 이뤄진 셈이다. 김 전 장관은 실제 대통령경호처장일 때부터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과 군 인사에 대해 논의했다.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은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장관이 모든 책임을 오 전 기획관에게 묻는 형식으로 퇴직을 시켰으니 우리는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면서 정부초기 개혁의 소나기만 피하면 진급 가능’이라며 서로서로 쉬쉬하고 있다고 한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인사기획관리과 간부들은 내란 이후인 지난해 12월 중순 오 전 기획관의 지시에 따라 문건 파쇄를 계획했다. 김 전 장관이 물러난 이후 인사기획관리과장 김 대령 및 총괄인 이 중령 외에는 계획되지 않은 대면보고는 금지했고 내부 보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사과 간부들 계엄 실패 후 12월 계획···1월 파쇄 “지시자는 검찰 수사 응했던 오영대 전 인사기획관” 한 달여 뒤 이 중령은 모든 과에 ‘신년맞이 대청소’를 하라고 전파했다. TF 자리 배치와 오래된 문건을 정리한다며 유독 인사기획관리과만 복도로 책상을 빼고, 대량 세절이 가능한 세절실을 예약해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파쇄했다. 여기엔 내란 핵심 파일도 포함된 것으로 파악됐다. 안 장관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오 전 기획관에게 여러 차례 질문한 바 있다. 당시 오 전 기획관이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퍼지기도 했다. 이 중령은 동영상을 보며 웃는 직원들의 명단과 안 장관에게 제보한 인물을 색출하기 위해 탐문 활동을 벌여 오 전 기획관에게 추정해 보고했다. 이들은 모두 오 전 기획관으로부터 승진추천, 성과상여금, 각종 포상 등 인사상 불이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문건을 파쇄한 이유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란 당일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던 오 전 기획관의 지시를 받은 이 중령은 각 과의 총괄 담당자들을 소집해 ‘계엄 선포가 됐는데 선제적으로 인사 관련 조치를 왜 안 하냐’ ‘합참에는 계엄사령부가, 지작사령부에는 지역계엄사령부가 곧 창설될 텐데 각 군 본부 및 지작사와 인사 지침을 협의해 계엄령 취지에 맞게 배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 전 기획관은 계엄 해제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 테이블을 통과했음에도 합동참모본부 전투통제실에서 이 중령에게 “(계엄이) 해제되긴 했는데 다시 시행될 수도 있으니 빨리 계엄사 창설 지원을 위한 인사 조치를 완성하고 지작사 병력에 대한 휴가 지침 및 통제 등 건의 사항을 받아보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 전 기획관은 내란 직전까지 김 전 장관의 의중에 따라 군 인사를 반영했다. 최근 내란 특검팀이 군 장성급 인사 자료 확보에 나선 것도 이에 관해 들여다보기 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팀은 최근 국방부 장군인사팀과 육군본부 장군인사실 등을 압수수색해 해당 부서 내 인사 관련 파일 등을 확보했다. 정치권에선 지난 2023년 11월과 지난해 4월 이례적인 인사가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진급에 절박한 군 인사들을 계엄 실행 세력으로 활용했단 의혹이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윤석열정부 장군 인사는 특이하고, 이례적인 경우가 유독 많았다”며 “인사를 통해 군을 장악하고, 내란을 준비했다는 의혹 관련 특검의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3차 계엄 대비 문건 없애” 증거 인멸 국회서 해제 불구 지작사와 인사 논의?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은 지난 2023년 11월 인사에서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안수 전 계엄사령관은 ‘75주년 국군의 날 행사기획단장 겸 제병지휘관’ 등 한직에서 2023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 발탁됐다. 지난해 4월엔 지휘부에 이어 작전본부 인사가 이어졌다. 원천희 당시 육군 소장이 4차 진급으로 합참 정보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이승오 소장은 군단장을 거치지 않고 합참 작전본부장으로 진급했다. 안찬명 당시 육군22사단장은 임명 5개월 만에 합참 작전부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통상 사단장은 1년 반~2년가량 보직을 맡는다. 군 안팎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던 이유다. 경질 위기이던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은 유임됐다. 그는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의 블랙요원 명단 국외 유출 사건 및 박민우 전 정보사 100여단장과의 갈등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서 “후속 조치를 강하게 할 생각”이라고 언급했지만, 다음 달 본인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는 군 관계자에게서 “노 전 사령관과 김 전 장관이 장군들 인사에 대해 논의했고 오 전 기획관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한 바 있다. 위기감을 느낀 오 전 기획관은 특수본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오 전 기획관의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지난해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했다. 앞뒤 달랐다 오 전 기획관은 “(문 전 사령관이 박 준장으로부터 고소당한 혐의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지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며 “공론화된 문제고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됐는데도 이렇게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