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민의힘, 정부, 대한의학회, 의대 협회가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 해소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출범시킨 여·야·의·정 협의체(이하 협의체)가 의료 단체의 탈퇴 선언으로 3주 만에 막을 내렸다. 의대 증원 정책 등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 사태가 협의체를 통해 대화와 소통의 여지를 보였지만 그마저도 수포가 되고 말았다.
중점 현안인 2025학년도 의대 정원 등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국민의힘의 지역 의대 신설 지지를 놓고도 의료계 반발이 커지면서 의료 단체들이 협의체 참여를 중단한 것이다.
‘지금 아프면 큰일 난다’며 아우성치는 우리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공백 사태는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확대 조처가 지금의 의료 대란을 초래했다. 의사가 부족하니 내년부터 해마다 2000명씩 더 뽑겠다고 대통령이 직접 공표하자, 그것이 의료 붕괴의 시발점이 되면서 의대 학생의 97%가 학교를, 전공의의 87%가 수련 병원을 떠났다.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의료 공백 사태가 이렇게 심화하면서 필수 의료가 붕괴했고 긴급 응급환자의 뺑뺑이 등으로 사망자가 늘고 있다. 황당한 일이다. 전쟁, 내란, 자연재해 등으로 세계가 요동치는 지금, 의료 대국 대한민국서 애꿎은 국민의 생명이 볼모로 잡힌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정부가 원하는 의료개혁의 파트너는 의료단체다. 의사 집단이 공감하지 못하는 의제를 국익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이 감행된다면 개혁이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가?
개혁의 성패와 관계없이 의사 집단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져 줄 전문가들이다. 그들을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파렴치한 집단으로 매도해 버린다면, 앞으로 누구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가? 당장 정부와 의료계의 극한 대립 속에서 안전과 생명의 피해를 당하는 우리 국민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사실 윤석열정부가 의료개혁을 들고 나오고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린 것에 대해 국민은 환호했다. 지방에는 의사들이 없어서 병원 운영이 어렵고 지방 의료원 역시 의사 구인난에 허덕이는데, 심지어 연봉 수억원이 넘어도 지원자가 없어 난리라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치료비가 비정상적이고 의사들이 손쉽게 돈벌이가 되는 진료과목에 치우치다 보니, 응급실이나 외과, 소아·청소년과 등에 의사들이 부족하게 된 연유라고 본다.
사실 의대 증원을 대폭 늘리면 의사들이 지금까지 누리는 부와 명예는 떨어지고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할 것이다. 로스쿨 설립 초기 변호사들이 반대한 것도 기득권이 상실될까 하는 우려감 때문이었으나, 현재는 변호사들이 많아지고 보니 국민의 법률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수임료도 대폭 인하됐다.
우리나라 의사들의 연봉은 세계서도 가장 높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십 년간 의대 정원이 늘어나지 않으니, 수입은 늘어났고 자기들만 호의호식하고 권위를 누렸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이제껏 세계 으뜸가는 수준의 의료를 자랑했다. 해외서 한번이라도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의료제도가 얼마나 우수한지 안다. 반대로 한국 의료를 한번이라도 경험한 외국인들 눈에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아주 의아스럽게 보일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감탄했던 한국 의료체계가 아니던가?
전 국민 건강보험 가입, 지역과 의료기관과 의사에 대한 무제한 선택권, 진료 횟수 무제한, 낮은 진료비, 최고의 가성비, 가까운 병의원서 언제든지 예약 없이 전문의를 만날 수 있고 국민 1인당 의료기관 이용 횟수가 1년에 17.2회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 6.8보다 훨씬 높은 의료 접근성 세계 1위의 나라다.
기타 의료 지표들을 OECD 국가 평균과 비교해봐도 한국의 지표는 월등히 최고 수준이다. 평균수명 남녀 모두 세계 1∼2위, 평균수명 증가 속도 1위, 영유아 사망률 최저, 비용 대비 의료의 질 1위, 인구 당 병원 수 1위, 인구 당 병상수 2위, 국토 면적당 의사 수 3위, 의사 중 전문의 비율 73%(OECD 평균 65%), 코로나 대응 세계 1위(사망률 최저) 등 수많은 강점이 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윤정부는 한국의 의사 수가 OECD 평균보다 적기 때문에 의대 정원을 2000명(1.67배)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증원의 필요성을 입증할 명확한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7명으로 OECD 평균 3.4보다 낮지만 이미 매년 3058명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으며 의사 수 증가 속도도 OECD 평균보다 더 빠르다. 게다가 저출산으로 인해 인구수가 2031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서게 된다.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기에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의료기술, 인공지능(AI)의 빠른 발전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향후 의료 수요를 단순 숫자만 가지고 예측하는 것은 오류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의료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시장 논리에 맡기게 되면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일은 명백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빈부격차나 지역 격차에 따라 의료시장이 형성되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명은 철저히 부의 정도에 따라 계층화되고 대상화된다.
건강 수명의 양극화는 심화하고, 생산 연령서 벗어난 어린이, 노인의 생명은 상대적으로 침해된다. 생명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공리로 여기지 않는 사회는 누군가의 생명이 누군가의 생명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또 의대 증원 규모의 적정성에 대한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의 부재를 공공성의 보루가 돼야 할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의료 문제의 프레임을 의대 정원 문제로 축소하면서 의사들의 이권다툼으로 사태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김명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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