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탐사기획> 나라가 버린 34용사의 죽음 ⑦<르포> 순직 재심사 동행 취재

보류서 인정까지 10년 걸렸다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취재 기간이 반년을 넘어가면서, 기각·보류된 ‘34건’ 중 일부가 재심사 절차를 밟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일요시사>는 한 유가족의 협조를 구해 재심사 당일의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아들을 위해 10년을 기다린 아버지의 사연. 그 세월 곳곳에는 유가족들의 고통과 순직제도의 모순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지난 3월10일, 정재수씨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시간은 넉넉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쫓긴 탓이다. 옷장에서 오래돼보이는 밤색 정장을 꺼내 들었다. 잘 다려진 옷 아래로 아들 고 정동진 상병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 앞에 위패와 조화, 향과 성냥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죽은 사람 사진을 밖에다 빼놓으면 안 된다고 해서…. 옷장 열어볼 때마다 한 번씩 보는 거죠.” 

옷장 속
아들 사진

정씨는 멋쩍은 표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 상병의 사진이 놓인 옷장은 정씨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있었다. 침대 발치 서랍장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약봉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잠을 청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나날의 반복.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니 불면증이 사라질 리도 만무했다.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어떻게 이것 하나만이라도….’ 지난 10여년간 정씨의 유일한 소원은 정 상병의 순직 인정이었다. 통 이루지 못했던 소원은 어느샌가 마음의 병으로 변했다.


이날은 정 상병의 순직 재심사가 있는 날이었다.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2012년 여름 사망한 정 상병의 순직 인정을 위해, 그동안 정씨는 보훈청·법원·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등을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진상규명위의 순직 인정 권고를 받았음에도,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정 상병 사례를 한 차례 ‘보류’로 판정했다. 

정씨는 이번에 직접 국방부를 찾아 심사위원들을 설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심사 과정서 유족의 방문 진술은 선택사항이다. 저번엔 두방망이질 치는 마음에 서류만 보내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던 그였다. 정씨는 그때 부족했던 ‘한끝’이 자신의 호소는 아니었을지,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고 했다.

“정말 착한 아들이었어요. 저한테도 잘하고, 동생이랑도 잘 놀아주고….” 

정씨는 잠시 앨범을 펼쳤다. 정 상병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여럿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어엿한 성인이 된 모습까지. 시종일관 웃고 있던 ‘착한 아들’의 사진 일대기는 20대 초반에서 영영 멈춰버렸다. 

정오를 겨우 넘긴 시각, 정씨는 문밖을 나섰다. 국방부와 약속한 시간은 오후 세 시. 정씨 집이 있는 경기 남양주서 국방부가 위치한 서울 용산구까지는 넉넉잡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했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봄으로 접어든 날씨. 따사로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그를 반기는 듯했지만, 굳은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사실 오늘도 별로 예감이 좋진 않아요. 그래도 이번엔 직접 가니까 잘 이야기해봐야죠.” 


어느덧 고속도로에 오른 차 안에서, 정씨와 대화를 나눴다. 정 상병과 그의 사연도 더욱 자세히 들어볼 수 있었다.

순직 재심사 당일 자택서 국방부까지 동행
헌병대 사실 왜곡 그대로 인용…재심사 요구

정 상병은 상근예비역으로 복무 중이던 2012년 7월24일, 집에서 고열·마비 증세를 보였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다.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 부검 결과 정 상병이 평소 복용하던 경구용 항우울제를 스스로 다량 복용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군 헌병대는 죽음의 원인을 모두 정 상병에게 떠넘겼다. 정 상병이 입대 전부터 우울증과 대인기피 증세를 보였고, 이 때문에 복무 부적응을 겪었다는 것. 거기에 부모·이복형제와의 갈등 등 개인사가 겹친 게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군은 정 상병의 가족관계부터 학교 생활기록부까지 이잡듯 뒤졌다. 정 상병 삶에 남았던 각각의 특이점들은 군에 의해 연결되고, 재구성됐다. 

정씨는 군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정씨 설명에 따르면 정 상병은 입대 전까지 정신질환 관련 약을 복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병교육대서부터 복무 부적응을 겪으며 정신질환이 발병했고, 자대 배치 이후 읍대장 및 선임병의 질책으로 상태가 악화됐다. 

군이 문제시했던 가족관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정 상병과 부모, 이복형제 사이에 갈등은 없었다.

정씨는 “(정 상병이) 큰형과 나이 차가 많이 났는데, 서로 정말 돈독했다. 형이 (정 상병을)많이 아꼈다”며 “둘은 그냥 우애 좋은 형제였을 뿐인데, 이복형제면 무조건 서로 미워한다고 생각하나? 이복형제가 있으면 불우한 거냐”고 반문했다.

정 상병은 군에서 작성한 설문지 속 ‘우리 가족은?’이라는 질문 옆에 “가난하지만 화목하다”고 적었다.

진상규명위는 2021년 10월 나온 결정문을 통해 정씨 주장을 대부분 사실로 판단했다. 결정문에는 정 상병이 입대 직후부터 보인 복무 부적응 증상이나 읍대장·선임병이 가한 질책 내용 등이 자세히 기술돼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 상병은 약 복용 전날에도 읍대장에게 심한 질책을 들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진상규명위는 결정문에 “군 입대일 이전 건강보험요양급여 등에서 정신과 진료 이력을 확인할 수 없다”며 “망인은 신교대 입소 후 대인기피증 증세를 호소했고, 생활관서 잠을 잘 수 없어 교관연구실서 취침했다. 군 입대로 상당한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있었고 대인관계에 급격한 어려움이 발생한 것”이라고 적었다.

소속 부대
관리 소홀


이어 “망인은 입대 이후 정신질환이 발현됐고, 자대 전입 후 대인기피증을 겪으며 업무 처리를 하지 못해 받은 스트레스와 질책으로 자해를 시도하는 등 정신질환이 악화돼 자해 사망에 이르렀다”면서 “망인의 자해 사망은 읍대장 및 선임병의 질책과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진상규명위는 소속 부대의 관리 소홀도 문제 삼았다. 정 상병은 자대 배치 이후 꾸준히 군 복무에 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의가사 전역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상규명위 조사에 따르면 소속 부대는 정 상병의 상황을 알면서도 국군수도병원 진료 예약 이외에 별다른 관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진상규명위는 결정문서 “소속대의 대처와 관리는 안이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정씨는 “전역 요청이 제때 받아들여졌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우울증 약이라도 한 번에 70봉지씩 주는 게 아니라, 부대서 하루하루 먹을 양만 끊어서 줬어도 괜찮았을 수 있다”며 “사건의 진상을 알아갈수록, 소속 부대가 관리를 너무 못해줬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고 토로했다.

국방부 중앙전공사상심사위원회는 진상규명위의 결정문을 보고도 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 근거로는 이미 반박된 군 헌병대의 주장을 들었다. 이번이야말로 정 상병 순직이 인정될 기회라 여겼던 정씨는 좌절했다. 이미 모든 입증자료를 넘겨서 신청한 심사였다.


명예 회복
동분서주

재심사 때 보강자료랍시고 제출한 서류는 기존 주장을 방증할 친한 동기의 진술서 몇 장뿐이었다. 정씨의 ‘별로 좋지 않은 예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잘 안되면…차라리 저도 그냥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참을 차창 밖만 바라보던 정씨는 이 말과 함께 오열하기 시작했다. 정 상병의 비극적 결말은 곧 정씨의 또 다른 비극의 전말이었다. 그는 정 상병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과 이혼했다.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게 정말 큰 이유였던 건 사실입니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그는 직장에 다니는 대신 정 상병의 명예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생전의 정 상병처럼, 정씨의 약 봉투도 점차 두꺼워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정 상병의 죽음에 대한 군의 입장은 10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았다.

재심이 있던 날로부터 약 3주 전, 정씨는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 상병의)엄마잖아요. 어쩌면 저보다도 더 간절히 순직이 되길 바랐을 거예요. 이 사람이 아들 죽고서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습니다. 근데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사고로….” 

그는 이 소식을 담은 진정서를 국방부에 보냈다. 그에겐 정 상병의 순직 인정이 간절한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정씨는 국방부 종합민원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종일관 굳어있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국방부 옆, 대통령실을 겨냥한 시위대의 구호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쿵쿵 울렸다. 경호원들은 카메라를 보고 다가와 “어떻게 왔냐”고 캐물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 없이, 정씨는 민원실 문을 열었다.

10년 넘도록…가정도 일상도 사라졌다 
뒤늦은 순직 인정…허탈한 한숨과 의문

아직 약속 시간은 30분 넘게 남아있었다. 시끄러운 바깥과 반대로, 민원실 내부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가끔 울리는 전화기 소리만 조그맣게 들렸다. 접수를 마친 정씨는 연신 물을 들이켰다. 얼마 뒤 국방부 관계자들이 들어와 정씨를 찾았다.

관계자들은 정씨를 차에 태워 청사 내부로 들어갔다. 

‘끝나면 연락 달라’는 문자 한 통을 정씨에게 보냈다. 그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1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다 끝났다’는 정씨의 답신을 받았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난 탓에, 외려 당혹스러웠다. 

“앞에서 대기하다가 7분, 10분 정도 심사한 거 같아요. 위원장이 이것저것 물어보긴 하더라고요. 주변 위원들은 (제게)뭘 묻진 않았는데, 제 말을 수긍하는 것 같긴 했습니다.”

국방부는 정씨를 돌려보내기 전 “1~2주 뒤에 심사 결과를 통지해주겠다”고 안내했다. 이미 기다림에 익숙한 정씨의 표정은 초연해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정씨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날로부터 약 3주 뒤였다. 정 상병은 사망 11주기를 불과 석 달 앞두고 결국 순직을 인정받았다. 정씨 손에 쥐어진 건 결정문 한 묶음과 ‘순직 인증서’ 복사본 몇 장뿐. 마냥 기쁘게 들리진 않는 목소리에 어색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정씨는 “왠지 모르게 허탈하다”고 입을 뗐다.

“조금만 더 빨리 잘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죠. 애 엄마가 이걸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근 10년을 노력했습니다. 그사이에 가정도 완전히 파괴되고. 좋다기보다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재심 과정서 ‘판’을 극적으로 뒤집은 증거란 없었다. 정씨조차도 왜 순직이 저번에는 ‘보류’됐고, 이번에는 ‘인정’됐는지 몰랐다. 어쩌면 1년 전에, 또 어쩌면 10년 전에 났어야 할 결정이 뒤늦게 바로잡아진 건 아닐지 의문이 들었다.

그랬다면 한순간에 아들을 잃은 황망함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괜한 죄스러움에 얼룩진 세월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왈칵 밀려드는 머릿속에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맙다”는 정씨의 말이 메아리쳤다. 

이제야
일상으로

정씨는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일자리도 다시 구했다. 지난 17일, 퇴근했다는 그와 간만에 안부를 나눴다. 이날 <일요시사>는 정씨에게 오는 9월 진상규명위 활동이 종료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정씨는 유가족 입장에서 진상규명위의 필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제가 제일 감사드리는 곳은 진상규명위다. 거기서 조사를 잘 해줘서 제 아들이 그나마 순직을 인정받은 거죠. 엄청 도움이 된 단체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위원회가 없어지지 않는 게 (유가족들에게)좋을 것 같습니다.”

<jeongun15@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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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