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재판 대반전 시나리오

CMIT·MIT 폐 도달 최초 확인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가습기살균제 재판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커졌다. 가습기살균제 성분 물질 중 하나인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증거로 채택된 것이다. 해당 물질이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건 지난해 12월이다. 전문가들은 이 보고서가 재판부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 ‘스모킹건’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재판부는 1심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 관계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MIT)의 인체 유해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재판부의 판단에 반박할 증거가 생겼지만 힘겨운 싸움이 될 전망이다. 통상 사실심인 1심과 2심의 결론이 다른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인과성 인정
조건 모두 충족

서울고법 형사5부는 지난달 27일,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등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사건 2심 공판서 검찰이 제출한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 연구보고서를 증거로 채택했다.

앞서 2021년 1월 1심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들이 가습기살균제 제조에 사용한 CMIT·MIT가 폐 질환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성분들이 폐 질환과 천식에 영향을 준다고 결론 내린 보고서는 없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옥시·롯데마트·홈플러스 등은 가습기살균제 제조에 사용한 성분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선행 연구 결과가 이미 있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 항소심 재판부가 새롭게 증거로 채택한 정부 연구 결과는 지난해 12월에 발표됐다. CMIT·MIT가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정량적으로 입증한 첫 연구라는 평가를 받는다. CMIT·MIT에 방사성 동위원소를 합성해 쥐의 코에 노출한 뒤 추적한 결과 5분 뒤 폐와 간, 심장 등에서 CMIT·MIT가 확인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단체들은 지난달 26일 광화문광장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연구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라고 재판부에 촉구해왔다.

피고인 측 변호인은 “새로운 실험 결과를 항소심서 증거로 제출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증거 조사 절차를 통해 검찰 측과 연구 결과의 신빙성 여부를 다투게 됐다.

지난 공판에는 김재용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가 나와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노출과 간질성 폐 질환·천식은 역학적 상관관계가 인정된다는 취지로 역학조사 결과를 증언하기도 했다.

SK케미칼과 애경 등은 지금까지 법적으로 인체 유해성이 인정되지 않은 CMIT·MIT를 제조·판매했다. SK케미칼은 ‘가습기 메이트’를 만들고, 애경산업이 이를 판매, 이마트는 이 제품을 납품받아 자체 브랜드 상품으로 출시했다.

2006년부터 원인미상 폐 손상 주범으로 가습기살균제를 지목한 질병관리본부는 CMIT·MIT 제품 제조사들에 대해 검찰에 고발하지 않았고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HMG·PGH) 계열 제품들에 대해서만 강제 수거 명령을 내렸다.

환경과학원 발표 논문 “질환 일으키기 충분”
손상 관련 염증·섬유화 노출 농도 따라 증가


당시 실험서 PHMG·PGH에 노출된 쥐들은 이상 소견을 보였으나 CMIT·MIT에 노출된 쥐들은 명확한 ‘폐 섬유화’ 증상이 나오지 않았다는 게 질본의 설명이다.

문제는 CMIT·MIT 계열 제품을 사용했다가 병을 얻거나 사망한 피해자가 상당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정부에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약 8000명이다. 정부가 구제급여 지급을 결정한 사람이 4417명인데, 이 중 SK케미칼·애경·이마트의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사람은 1600여명으로 집계됐다.

정부가 지원을 결정한 피해자 3명 중 1명이 CMIT·MIT 계열 제품을 사용한 셈이다.

재판부는 CMIT·MIT 노출과 건강 영향 간 인과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3가지 기준이 충족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 기준으로 ▲CMIT·MIT가 폐 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함 ▲CMIT·MIT가 흡입으로 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함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을 일으킬 정도의 양이 축적돼야 함 등이 있다.

CMIT·MIT가 비강이나 기도를 통해 폐까지 도달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1심 재판부가 판단한 ‘CMIT·MIT의 폐 도달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물리화학적 특성상 CMIT·MIT가 폐까지 도달하기 어렵다고 봤다. 고분자중합체로 체내에 잔류하기 쉬운 PHMG·PGH와 달리 저분자 화학물질인 CMIT·MIT는 물에 잘 녹고, 몸에서 잘 분해돼 몸 밖으로 쉽게 배출된다는 변호인 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호흡기로 흡입한 물질은 상기도와 하기도를 거쳐 폐로 전달된다. 재판부는 CMIT·MIT를 흡입하더라도 대부분 비강 등 상기도서 흡수돼 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허점 파고들
‘스모킹건’

환경과학원은 몸속에서 CMIT·MIT가 실제 어떻게 이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CMIT·MIT에 방사성 추적자를 합성했다. 방사성 추적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포함된 화합물이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붕괴될 때 방출하는 에너지를 측정하면 해당 물질이 몸속에서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방사성 추적자를 합성한 CMIT·MIT를 실험용 쥐의 비강과 기도에 노출시킨 결과, CMIT·MIT가 비강과 기관지를 거쳐 폐까지 이동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확인됐다. 폐를 통해 전달된 물질이 간과 신장, 위장과 심장, 뇌 등 전신으로 퍼져나간 사실도 추가로 확인했다.

환경과학원은 이들 물질이 체내에 얼마나 머무는지 확인하기 위해 5분, 6시간, 1주일 단위로 방사능 농도를 측정했다. 그 결과 최초 노출 후 1주일이 지난 후에도 기관지와 폐에서 CMIT·MIT 성분이 검출됐다. 특히 지금까지 불명확했던 CMIT·MIT의 위험성도 확인됐다.

CMIT·MIT를 반복 노출한 후 실험용 쥐의 기관지 폐포세척액을 분석한 결과, 폐 손상과 관련 있는 염증 및 섬유화 지표가 노출 농도에 따라 증가했다.


연구진의 이번 연구 결과는 환경과학 분야 상위 5% 수준의 국제학술지인 <국제환경>에 ‘비강 및 기관 내 투여 후 CMIT·MIT의 체내 거동 및 호흡독성’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연구진은 논문서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돼 폐 손상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첫 번째 보고서”라며 “이 연구의 결과는 CMIT·MIT 노출과 폐 손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적시했다.

항소심
뒤집힐까?

연구진은 “최근 한국서 진행된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의 노출이 폐 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재판서 제조사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며 “법원 판결문에는 현재까지 CMIT·MIT 노출과 폐 손상 사이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명시됐다. 그러나 연구 결과를 고려하면 이 같은 결론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SK케미칼 등의 항소심 재판서 기존의 판단을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보고 있다. 재판부가 제시했던 3가지 판단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규홍 안전성평가연구소 인체유해인자 흡입독성연구단 단장은 “이번 연구는 가습기살균제에 사용된 CMIT·MIT가 호흡기 노출을 통해 폐까지 도달돼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체내 분포와 독성 연구 결과로 종합 분석해 입증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며 “CMIT·MIT가 함유된 제품이 호흡기 이외의 장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근거로 건강영향 평가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단장은 “1심 재판부가 판단 근거로 들었던 3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연구”라며 “CMIT·MIT가 폐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이 확인됐고, 물질이 코를 통해 폐까지 이동하며, 폐 내에서 꽤 오래 잔류하는 것도 확인됐다”고 부연했다.

국립환경과학원 관계자는 “같은 기술로 분석한 것이지만, 이번에 사용된 방사성 동위원소는 PHMG·PGH 때 사용한 인듐-111보다 반감기가 훨씬 길어 분석하기가 까다로웠다”며 “다행히 CMIT·MIT가 비강→기관지→폐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방사선 영상기법으로 확인돼 눈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최신 보고서 증거 채택
깨지는 재판부 논리 왜?

그러나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통상적으로 형사소송은 민사소송보다 피고의 책임을 입증하기 힘들다. 1심서도 CMIT·MIT의 위해성을 보여주는 동물실험 결과가 증거로 제출된 바 있다. 한 실험에서는 CMIT·MIT에 노출된 실험용 쥐가 6일 만에 사망했고, 또 다른 실험에서는 CMIT·MIT에 노출된 임신한 암컷 쥐가 사산하거나 체중이 감소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실험용 쥐에 사용한 용량이 지나치게 과도했다 ▲코로 물질을 흡입한 게 아니라 기관에 물질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사망의 원인이 폐 손상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로 이 실험 결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것과 같은 환경서 동물실험을 진행했을 때, 폐 섬유화 등 명확한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반면 학자들은 CMIT·MIT가 인체에 유해하다는 증거 확보에 집중하면서 물질의 노출 농도와 실험 방식 등을 바꿨다.

한 전문가는 “폐에서 염증 지표가 증가했다고 해도 폐 섬유화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기에 1심 재판부처럼 완벽한 증거를 요구한다면 여전히 상황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의 시각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고 했다.

CMIT·MIT의 물리화학적 특성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오해로 부득이하게 이번 연구가 수행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명예교수는 “CMIT·MIT를 비강에 노출했을 때 폐까지 간다는 결과는 과학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PHMG·PGH가 폐로 들어가서 석회층을 일으킨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PHMG·PGH는 고분자인 반면, CMIT·MIT는 단분자로 크기가 훨씬 작다. PHMG·PGH가 폐까지 들어가는데, 그보다 작은 CMIT·MIT가 폐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같은 시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학자들은 추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상황 바꾸기
역부족 지적

일부 연구자들은 CMIT·MIT 성분의 동물흡입시험을 수행했다. 시험 결과가 나오면 비강과 기도에 물질을 묻혀 체내 반응을 관찰한 이번 실험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해당 실험에서는 염증이 일어나기 전, 단계의 면역반응을 관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사망 원인의 인과관계가 아닌 CMIT·MIT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진행되는 SK케미칼 등 재판의 주요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인데 가습기살균제와 상해 간 인과관계 입증의 어려움으로 검찰의 어깨가 무거운 상황이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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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