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튀르키예 지진 참사, 쿠르드족 분리독립 재조명 계기

  • 김삼기 시인·칼럼니스트
  • 등록 2023.02.21 16:59:47
  • 호수 1415호
  • 댓글 4개

지난 6일,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는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 접경지역서 7.8 규모의 강진으로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형제국가인 튀르키예에 최대 규모의 긴급구호대를 급파해 구조활동을 펼쳤고, 한국기업들도 복구를 위해 인도적 지원에 앞장섰다. 우리에게 낯선 ‘튀르키예’는 2021년 바뀐 터키의 새 국호다.

한국전쟁(1950년) 참전국 중 튀르키예는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1만4936명)을 파병했다. 당시 국력도 약하고 우리와의 관계도 전무했던 튀르키예가 자국 내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병력을 보냈을까?

역사는 “공산세력의 위협에 처해 있는 국가가 자유와 독립을 원한다면 경제적·군사적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트루먼 독트린(1947년)의 수혜국인 튀르키예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1952년)이라는 명분을 얻기 위해 한국전쟁에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에 파병된 튀르키예 병력 중 60%가 쿠르드족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튀르키예 정부와 대치하고 있던 쿠르드족이 한국전쟁에 9000여명이나 참전한 이유는 전쟁에서 성과를 내면 분리독립의 꿈이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인구의 1/5을 차지하고 있는 쿠르드족을 지금까지도 테러집단으로 여기고 분리독립을 절대 용납하지 않고 있다.

쿠르드족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협조했다. 그러나 로잔조약으로 뒤통수를 맞고 쿠르드족(3500만명)은 터키(2000만명), 이란(700만명), 이라크(500만명), 시리아(300만명) 접경 산악지대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신세가 됐다. 


미·소 냉전시대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란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 간 국경분쟁 때도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분리독립의 약속을 믿고 미국을 도왔지만, 분쟁이 종료되자 미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이 IS를 격퇴할 때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은 분리독립을 꿈꾸며 미국을 도왔지만, 시리아 북동부 지역에 주둔하며 쿠르드족을 보호해오던 미군이 IS가 사실상 붕괴된 상황에서 주둔 명분을 잃고 철수하게 되자 튀르키예로부터 무참히 공격받았다. 

튀르키예에는 2000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어, 만약 이들이 분리독립할 경우 영토 일부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튀르키예는 이라크와 시리아 내 쿠르드족 정치세력(자치정부)을 계속 배척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1차 세계대전 때도, 한국전쟁 때도, 이란·이라크 국경분쟁 때도, IS 격퇴 때도 쿠르드족은 분리독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어 공을 세웠지만, 결국 강대국과 주변 국가로부터 매번 외면당했다.

이렇게 외면당하면서도 쿠르드족이 계속 전쟁에 등장했던 이유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분리독립의 꿈을 기필코 이루겠다는 쿠르드족의 간절한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주권과 영토를 일본에 빼앗기고 국가가 없을 때, 중국과 미국서 광복군과 해방기구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내 광복군의 힘이 일본군보다 약해 도저히 국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광복군은 미국을 지지하면서 결국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켜 국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오니즘 열풍이 불면서 고대 로마시대에 유럽 등지로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다시 모여 1948년에 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이는 세계 이목이 시오니즘에 집중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난 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 접경지역서 지진이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 언론들은 두 국가의 피해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튀르키예 동남부와 시리아 동북부 지역에 주로 살고 있는 쿠르드족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형 지진 참사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 세계의 이목이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쿠르드족에 집중되리라 생각한다. 

이번 지진 참사를 통해 국가 없는 거대 민족 쿠르드족을 더 이상 흩어져 살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지구촌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쿠르드족은 이번 지진 참사를 계기로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이 재조명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 당시 9000여명의 쿠르드족 병력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이 한국전쟁서 실제 공이 큰 쿠르드족엔 별 관심을 갖지 못했다. 튀르키예가 형제국가라면 쿠르드족은 형제민족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미국과 중동 국가들의 눈치만 보느라 쿠르드족을 배척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나마 우리가 2003년 이라크에 자이툰부대를 파견할 때, 이라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지역 아르빌을 택해 4년 동안 의료, 교육사업 및 치안유지 등 인도적 지원활동을 한 게 쿠르드족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전투병력이 없는 자이툰부대의 철군을 강요받고도 쿠르드족 자치구 재건을 위해 임기 내내 끝까지 철군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지금도 세계 각국의 독립사를 벤치마킹하면서 제2의 이스라엘 독립사를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쿠르드족이다. 같은 경험을 했던 우리가 튀르키예와의 형제애를 생각해서라도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을 지지하진 못할망정, 그들의 꿈을 무시하진 말아야 한다.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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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78년 만에 해체’ 검찰 분해 전조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검찰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한때 정부의 ‘칼’ 역할을 맡아 위세를 떨쳤던 검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또 한 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검찰청이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유예기간은 1년. 검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검찰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그 쓰임새가 달라졌다. 개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고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적도 있다. 칼로 쓰이면서 동시에 고쳐야 할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정부도 검찰의 존재 자체를 지우진 못했다. 견제 기관을 만들어 권한을 축소한 적은 있지만 ‘폐지’를 가시화한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대통령 의지 당이 화답? 지난달 26일 검찰청을 폐지하고 기획재정부를 분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라 검찰청은 설립 78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검찰청 업무 중 수사는 중대범죄수사청(이하 중수청), 기소는 공소청이 맡는다. 중수청은 행정안전부 장관, 공소청은 법무부 장관 소속으로 정해졌다. 검찰청 폐지와 중수청·공소청 설치에는 1년 유예기간을 두기로 했다. 지난달 30일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서 검찰청 폐지는 내년 10월로 정해졌다. 내년 10월1일에 법률안이 공포되고 이튿날인 10월2일 중수청·공소청이 설치되는 것이다. 문재인정부가 검찰의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본격화한 데 이어 이재명정부에서 검찰 폐지를 결정하면서 진보 정부의 숙원이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정부 출범 직후부터 검찰청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찰의 수사‧기소 업무를 분리하고 수사권 등은 신설 기관으로 이관하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취임한 이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당 대표 선거 전부터 “추석 전 처리”를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검찰이 되도 않는 것을 기소해 무죄를 받고 나면 면책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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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개혁 의지가 제대로 발현된 정부조직법”이라고 개정안을 평가했다.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 최보윤 수석대변인은 “이재명정권이 끝내 검찰청을 없앴다. 이는 간판을 바꾼 문제가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던 마지막 사법 안전망을 무너뜨린 폭거”라며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사회적 약자”라는 내용의 논평을 냈다. 그러면서 “그 공백은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드러난다. 아동 학대, 장애인 대상 범죄, 노인 학대 사건은 피해자가 말문을 열기 어렵고 증거는 금세 사라진다”며 “예전에는 빠진 단서를 보완하고 잘못된 수사를 되돌릴 두 번째 기회가 있었지만 이제 그 문이 닫혔다”고 비판했다. 검사들은 집단 반발 하루아침에 조직이 사라지게 된 검찰 내부는 참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만석 검찰총장 직무대행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위헌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노 대행은 지난달 29일 검찰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78년간 국민과 함께해 온 검찰이 충분한 논의나 대비 없이 폐지되는 현실에 총장 직무대행으로서 매우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이어 “헌법상 명시된 검찰을 법률로 폐지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역대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들도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명백한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헌법은 89조에서 검찰총장 임명에 대해, 또한 제12조와 제16조에서는 검사의 영장 청구권에 대해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며 “이런 규정은 헌법의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정부의 준사법기관인 검찰청을 둔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므로 이를 폐지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설명했다. 검사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을 통해 발동한 특검에 파견된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현재 3대 특검팀에는 110명의 검사와 99명의 검찰 수사관이 파견돼있다. 김건희 특검팀에는 40명, 내란 특검팀과 채 상병 특검팀에는 각각 56명, 14명의 검사가 근무하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과 내란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 수를 보면 웬만한 일선 검찰청 검사 정원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 가운데 김건희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검찰청으로 복귀하겠다”고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국무회의 의결에 대한 집단 반발로 해석된다. 위헌 주장 헌재 가나 검사들은 지난달 30일 민중기 특검에게 입장문을 제출했다. 입장문에는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핵심은 ‘수사와 기소의 분리’ ‘검찰의 직접 수사 금지’인데 특검에 검사들이 남는 건 모순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권이나 시민사회 단체 등에서는 ‘자업자득’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검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칼을 휘두르면서 현재 상황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권력의 방향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줄 수 없다는 의지가 이번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실제 진보 정부에서는 오랜 시간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도해 왔다. 본격화된 것은 문정부 때부터지만, 그 시발점은 김대중·노무현정부 때라고 봐야 한다.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립 등 검찰개혁의 핵심 방안들은 다 그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검찰개혁은 실패했다. 검찰의 반발이 대단했고 당시 정치권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진행하면서 이들의 위세도 엄청났다. 실질적인 검찰개혁이 이뤄진 건 문정부 들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검찰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고 국민 여론도 정부에 힘을 더했다. 문정부에서 검찰은 ‘적폐 청산’의 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개혁 대상으로 지목됐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 이뤄졌고 공수처가 출범했다. 문제는 검찰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내부 출혈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에서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이후 한직으로 좌천돼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연이어 영전시켰다. 진보 정부의 숙원 노·문 거쳐 결말 이는 향후 문정부를 뒤흔들었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갈등,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당선 등의 불씨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관련 의혹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구기도 했다. 조 전 장관의 뒤를 이어 취임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윤 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출동했다. ‘추·윤 대전’이라는 표현이 1년 내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법안이 급하게 처리되면서 ‘누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고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공수처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두고 기관끼리 갈등을 빚는 일도 일어났다. 경찰에 수사가 몰리면서 재판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정부의 검찰개혁을 ‘반쪽짜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이후 이정부는 아예 검찰청을 없애겠다는 뜻을 품고 임기를 시작했다. 대선후보 때는 물론 윤석열정부 시기 내내 ‘사법 리스크’에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검찰에 대판 비판적인 시각을 줄곧 드러낸 바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뜻은 민주당을 거쳐 법안을 통해 실현됐다. 물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당장 보완수사권 문제를 두고 이견이 있고 중수청과 공소청을 어떻게 운영할지 세밀하게 구상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찰은 보완 수사권을 존치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검사가 경찰의 기록만 갖고 기소 여부를 판단하면 부실 기소, 불기소 남발 등으로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주장의 배경이다. 또 검찰에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했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기관이 비대해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 일각에서는 이름만 다른 ‘검찰’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검찰이 정권의 칼로 기능했던 것처럼 다른 이름의 ‘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걱정이다. 산적한 과제 후폭풍 남아 검찰은 꽤 오랜 시간 외줄 위에 서 있던 상황이다. 이정부가 그 줄을 끊으면서 검찰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검찰에 대한 경고는 늘 있었고 전조도 뚜렷했다. 이제 후속조치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가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검찰 해체가 가져올 후폭풍은 국민에게 언제쯤 닿을 것인가.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