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기획고소’ 막전막후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1.30 11:31:39
  • 호수 1412호
  • 댓글 4개

피 말리는 물귀신 소송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모욕죄 고소·고발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피의자는 자신이 고소된 이유를 알지도 못한다.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일단락되도, 고소인은 피의자를 항고한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에 피의자는 합의금을 제출한다. 이런 고소를 두고 ‘기획고소’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형법 제33장 명예에 관한 죄 제331조 모욕에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나와 있다. 제312조 고소와 피해자의 의사에는 ‘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남용되는
모욕죄 실태

이는 모욕죄에 해당하는 법률이다. 모욕죄는 사람을 모욕한 경우 성립하는 범죄로, 형법 제311조에 규정돼있다. 큰 맥락으로 볼 때 모욕죄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범죄인 명예훼손죄와 비슷해 보이지만, 구체적 사실의 적시가 없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즉, 명예훼손죄와 모욕죄의 보호법인은 외부적 명예인 점에서 차이가 없으나, 명예훼손죄는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만한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를 적시해 명예를 침해하는 것이다. 모욕죄는 단순히 추상적인 판단이나 경멸감을 나타내는 말을 해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것이고, 구체적인 사실이나 허위를 적시해 그 사람의 대외적 평가를 저하시켰으면 명예훼손이 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대법원 판례 중에는 “늙은 화냥년의 간나, 네가 화냥질을 했잖아”라고 한 피고인의 발언을 두고, 피고인이 피해자의 도덕성에 관해 경멸적인 감정표현을 과장되게 강조한 욕설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했다. 즉, 명예훼손이 아니고 모욕죄라는 것이다. 


모욕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친고죄다. 대부분 서면으로 재판하는 약식명령으로 재판이 진행되며, 경찰이 벌금 2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즉결심판에 회부할 수 있다. 보통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데, 법적인 판단 기준이 주관적이라는 것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또 고소·고발이 남발되는 상황도 초래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명예훼손·모욕 고소·고발 건수도 급증했다. 지난해 7월14일 오픈넷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명예훼손·모욕으로 접수된 사건은 2010년 2만2777건에서 2020년 7만9910만건으로 10년 사이 약 4배가량 급증했다.

명예훼손 사건은 2010년 1만4912건에서 2020년 3만5518건으로, 모욕 사건 역시 2010년 7865건에서 2020년 4만4392건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접수 사건 중 기소 처리된 건수는 연간 약 7000건에서 1만2000건 사이로, 평균 1만1000건 수준이다. 이 통계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실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오픈넷이 분석한 것이다. 

명예훼손·모욕 10년 사이 4배 증가
수사력 낭비와 사회적 부작용 발생

오픈넷은 “개인 간의 분쟁 상황이나 게임, 커뮤니티 등 온라인 공간에서 오간 언쟁이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형사사건으로 자주 비화되고 있는 현상, 그리고 많은 정치인과 공인이 자신들에 대한 의혹 제기나 부정적인 표현들에 ‘가짜 뉴스나 악플에 대한 선처 없는 법적 대응’을 곧잘 선언해 비판적 여론을 진화시키려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지적하면서는 “매년 8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표현 행위로 인해 형사 피의자 지위에 놓여 심리적 위축 및 생업에 지장을 겪는 문제, 중대 범죄에 집중돼야 할 수사력이 낭비되는 현실적 문제와 사회적 부작용도 동반한다”고 비판했다.


모욕죄가 남용되는 상황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지난해 1월, 김지아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모욕죄로 고소당했다. 김씨는 ‘귀하의 사건 처분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형사사법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모욕 : 타관 이송’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김씨는 이 문자를 스팸으로 여겼다. 평범하게 직장생활하다가 퇴사 후 쉬고 있었던 김씨가 고소당할 일이 없었던 탓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컴퓨터를 켜고 형사사법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형사사법포털 사이트는 공인인증서로 접속하면 사건번호를 조회할 수 있다. 확인해보니 6개월 전에 고소가 접수된 상황이었다. 김씨는 당황했다. 사건 진행 이력에는 본인이 모욕죄로 고소됐다는 사실만 나와 있을 뿐이다. 6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소당한 내용이 문자로 왔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경찰 사건 조회 결과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A씨 외에도 피의자로 입건된 사람이 무려 64명이나 됐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고소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6개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민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문자를 받은 지 6일 후 김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서의 담당 형사였다. 형사는 김씨에게 모욕죄 고소를 당한 이유를 설명했다. 대략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 작성한 댓글이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형사는 “경찰서에 와서 이 문제에 대해 소명하면 된다”고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고소부터 
항고까지

김씨는 형사의 설명을 듣자, 자신이 남긴 댓글이 생각났다. 커뮤니티 글은 아버지 생신 기념으로 케이크 업체에 주문 제작을 했는데, 케이크가 주문했던 내용과 달랐다는 글이었다. 글쓴이는 케이크 업체 주인과 다퉜던 내용도 올렸다.

형사는 김씨가 케이크 업체 주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달았다고 설명했다. 케이크 업체 주인이 김씨를 모욕죄로 신고한 것이다. 김씨 외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사람도 있었다. 

김씨는 공개정보 포털 사이트에 신청해 고소장 내용 일부를 볼 수 있도록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정확하게 어떤 내용으로 고소당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 사이 다시 관할 경찰서에 고소장을 볼 수 있도록 요청했다. 몇 시간이 지난 뒤 담당 형사는 “정보공개 신청하셨냐. 왜 한 거냐”고 물었다. 김씨가 “고소당한 게시글의 내용을 알고 싶어서 했다”고 하자, 형사는 조사받으러 오면 확인시켜주겠다고 했다. 

답답했다. 형사가 알려줬으니 게시물에 케이크 가게 주인을 비방하는 댓글을 남겼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댓글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조사받으러 가기 전에 어떤 댓글을 쓴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해당 게시물은 이미 삭제된 지 오래였다.

결국 조사받으러 가는 날까지 고소장의 내용을 볼 수 없었다. 조사받으러 가는 길에 김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진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도 어떤 댓글을 썼는지 알 수 없으니 정확하지 않았다. 


김씨는 사이버팀에서 진술을 받았다. 담당 형사는 휴가를 간 상황이어서, 다른 형사가 왔다. 피의자 신문 조서를 작성한 뒤 형사는 ▲사는 곳 ▲최종 학력 ▲한 달 수입 ▲재산 ▲건강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 ▲술을 얼마나 마시는지 ▲다른 사건에 고소된 적 있는지 ▲교통사고·상해·손괴 등 처벌을 받아봤는지를 물었다.

“피의자 조사를 받으러 온 적은 처음”이라고 김씨는 답했다. 

이어 ▲해당 커뮤니티 아이디가 있는지 ▲언제쯤 만든 아이디인지 ▲해당 아이디로 댓글을 달았던 사실을 인정하는지 ▲댓글을 달 때 어디에서 달았는지 ▲거주 지역은 왜 바뀌었는지 ▲해당 댓글을 어떤 기계로 작성했는지도 물었다.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

김씨가 비방했던 케이크 업주는 사실 마카롱 업주였다. 주문 제작 케이크 관련 글도 아니었고, 마카롱 관련 글이었다. 다만 글쓴이의 주문이 일방적으로 취소당한 내용은 맞았다. 진술 시간은 1시간 걸렸으며 결과가 나온 것은 한 달이 넘은 후였다. 아무래도 64명을 고소한 사건이다 보니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린 것이다.

결과는 문자로 왔다. “귀하의 사건 처분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형사사법포털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모욕 : 혐의 없음(증거불충분)”이었다.


고소를 당하고 두 달이나 기다려 혐의없음 처분을 받은 것이다. 김씨는 아직도 자신을 고소했던 가게의 이름을 모르고, 어떤 내용으로 고소당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직고소했으니 서울에 있는 가게가 아닐지 예상할 뿐이었다.

김씨는 이 일을 겪은 뒤, 앞으로 커뮤니티에 글을 쓸 때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소를 당하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고, 애초에 고소를 당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건이 끝나는 것 같았다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김씨는 뜬금없이 해당 사건을 조회하고 싶어졌다. 다시 형사사법 사이트에 들어가 내 사건으로 등록해놨던 사건 목록을 확인했다. 고소인은 항고를 한 상태였다.

사건번호 이력에 새로운 목록이 추가됐다. 고소인이 모욕에 대한 혐의없음(증거불충분) 처분에 대해 항고했고, 이 사건은 상급청으로 송부됐다. 이미 항고는 진행된 상태였다. 처음 고소가 걸렸을 때처럼 한참 후에 알려줄지 알 수 없었다.

항고를 당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다시 마음이 답답했다. 피항고인이 모르는 항고라는 것도 기가 막혔다. 항고는 지방검찰청에서 고등검찰청으로 넘어갔고, 추후 항고 기각처분을 받았다. 김씨가 항고당한 것을 알게 된 날에는 입맛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처음 고소를 당했던 심정과 같았다.

앞서 언급했듯 해당 사건의 댓글과 게시글은 진작에 삭제됐다. 경찰서 조사를 받을 때 봤던 해당 글 제목을 검색해도 검색되지 않는다. 

소장 이어 합의 종용
십중팔구 돈이 목적

물론 비방 목적의 댓글을 단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고소인이 ‘비꼬는 한 줄짜리 댓글’로 고소하고 항고까지 갔다는 것을 두고, 김씨는 고소인이 ‘합의금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김씨는 “내가 쓴 댓글 한 줄 말고는 추가 자료도 없을 텐데 항고까지 한 것을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려고’ ‘겁먹고 덜컥 합의하길 바라는 마음’ ‘경찰·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한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며 “항고 인용률이 10% 내외라고 하는데, 항고가 기각되면 그 후에 ‘재정신청’을 넣어서 또 괴롭힐 수 있다. 이번에 나는 항고를 당하면서 처음 고소당한 걸 알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고소당했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심리적인 압박감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때의 기분을 비유하자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깜깜하고 막막했다”며 “결과가 나왔을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대체 고소인은 비꼬는 댓글 한 줄이 보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돈이 필요했던 건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일부러 손님과 업체 간의 갈등을 빚는 글을 커뮤니티에 조작해서 쓰고 댓글로 욕하는 사람을 모욕죄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합의금을 타 먹는 ‘기획고소’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말하는 기획고소는 속칭 고소 남발자들이 불순한 의도나 고의로 행하는 고소를 부르는 말이다. 즉, 일부러 욕먹을 상황을 만든 후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등으로 고소하는 것이다.

김씨와 같은 사연은 ‘특이하거나’ ‘운이 나빠서’ 걸린 게 아니다. 모욕죄가 남발되는 상황은 큰 사건에서 더 흔하다. 

예를 들어 ▲가평계곡 살인 사건에서 공범인 조현수가 도주 전 네티즌을 무더기로 고소 ▲최순실이 자신에게 악플을 단 2700여명을 고소 ▲스티브 유가 자신을 비판하는 악플러를 고소하려고 한 것 등이 있다.

모욕죄 논란은 꾸준히 되풀이되고 있고, 관련 사건이 급증하면서 법조계에서는 관련 법리를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천 남동경찰서 이승민 경정은 2021년 <형법상 모욕죄에서 모욕의 개념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모욕죄 형사 처벌의 효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이 경정은 “일선 수사 현장에서 모욕 고소장을 보면 술자리‧주차 문제 등 주민들 간 분쟁과 온라인 게임 중 채팅 등 사소한 분쟁에서 시작된 욕설과 댓글 내용이 상당수”라며 “작은 무례와 멸시로 시작된 욕설에 대해 형사처벌 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라고 자조했다. 

그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모욕죄는 빈번한 형사처벌과 당사자가 납득하지 못하는 경론이라는 우려가 상존한다. 일반 국민들이 법을 무시하거나 경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국민들이 명확히 수긍하지 못하는 판단으로 잦은 처벌을 받는다면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위법 행위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십·수백명 
무더기 경찰행

이어 “오히려 수사와 사법기관의 불신을 만들 수 있고, 결국 법은 강제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며 “모욕의 개념을 일관성 있게 해석해 수범자에게 예측 가능성을 줄 필요가 있다. 경범죄처벌법의 행위 유형을 보완 입법하거나, 모욕죄에도 별도의 면책 규정을 따로 규정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앞으로 수사 및 법원 실무에서 모욕죄에 대해 일반인들도 예측하게 할 수 있는 판단의 축적과 함께 입법적 보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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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