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설날 사건·사고 백태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1.16 13:15:05
  • 호수 14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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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주변을 살핍시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사망, 폭력, 이혼. 명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누군가는 명절이기 때문에 떠오르는 단어다. 학교나 회사 등에 가지 않고 집에만 머무르니 발생하는 사건·사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에는 더욱 이웃을 살펴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사건은 면밀히 지켜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 도래했다. 가족과의 재회가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설날이 추석과 함께 가장 기피하거나 두려워하는 날로 꼽힌다. 기본적으로 설날은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만 해도 너무 많아서 주부의 스트레스 요인이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해 운전하는 것도 힘들다. 고향이 가깝거나, 거주지가 고향이어도 예외는 아니다.

명절증후군
남녀차별

주부가 아니더라도 명절 스트레스가 심한 건 마찬가지다. 미혼이나 취준생들 사이에선 ‘명절날 이런 말 듣기 싫어 BEST 3’가 정해져 있을 정도다. 듣기 싫은 말에는 “앞으로 계획이 뭐니?” “어느 학교, 어느 직장에 갈 거니?” “전부,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등이 있다.

명절에는 자신의 연봉이나 자녀의 학업 능력으로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급기야는 과거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는 상황까지 생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명절이 다가올 때쯤이면 포털 연관 검색어에 ‘명절증후군’이 등장한다. 결국 명절이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스트레스도 크다는 방증이다. 


이 같은 스트레스 수치는 과학적으로 검증됐다. 국내 연구진은 평상시 휴일이나 공휴일보다 명절 연휴 때 유독 심장마비 환자가 많고, 사망률도 높다는 빅데이터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심장내과 연구팀(전기현·권준명·오병희)은 2012~2016년 전국 응급실을 찾아 ‘병원 밖 심정지’ 13만9741건 중 극단적 선택을 제외하고, 내과적인 질환으로 심장마비가 발생한 9만5066명을 분석한 결과를 이런 연관성이 관찰됐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는 대한심장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Korean Circulation Journal)에 발표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해당 기간 중 총 43일의 설·추석 연휴에 2587명의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 명절 연휴에 하루당 60.2명이 심정지로 쓰러진 셈이다. 이는 같은 조사 기간 중 평일, 주말, 공휴일에 발생한 심정지 환자가 하루당 각각 51.2명, 53.3명, 52.1명인 것과 비교해 매우 높은 수치다.

명절 때 발생한 심정지 환자는 병원 도착 전 사망률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다른 그룹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특히 음력이어서 매년 날짜가 달라지는 설과 추석을 다른 해의 동일한 양력 날짜와 비교했을 때도 명절 연휴의 높은 심정지 발생 양상은 뚜렷했다.

명절에 발생하는 심정지는 낮과 저녁에 더 빈번했다. 시간대로는 오전 7~10시에 가장 큰 1차 피크가, 오후 5~7시 사이에 2차 피크가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스트레스로 심정지 환자 발생률↑
상승하는 사망·폭력·이혼 지수


이주미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이 논문에 대한 별도의 평론에서 명절 연휴의 높은 심정지 발생률을 명절 연휴가 끝난 후의 높은 이혼율, 설날과 추석 연휴 기간의 높은 자살률, 긴 연휴에 급증하는 가정폭력 건수 등과 연관지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연휴 기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스트레스는 급성 심정지를 유발하는 큰 위험요소가 된다. 이는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에 심정지 사망률이 높은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진단했다.

연구 결과는 사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그리고 조금 더 처절하다. 지난해 추석에는 홀로 사는 노인의 고독사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의 독거노인 수가 매년 증가하면서 65세 이상의 고독사 비율도 함께 늘어난 것이다.

지난 추석 연휴를 앞두고 광주광역시에서 홀로 사는 60대 남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광주 남구 양림동의 한 주택에서 악취가 난다는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A씨는 숨진 지 1~2주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A씨는 20여년 전 아내와 헤어진 후 가족과 연락을 끊고 홀로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A씨가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2021년 고독사 사망자 수는 총 3378명으로 최근 5년간 증가하는 추세다. 매년 남성 고독사가 여성 고독사에 비해 4배 이상 많으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연령은 50~60대로 확인됐다.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주택, 아파트, 원룸 순이다. 주택에서 발생한 고독사가 매년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최초 발견자는 형제‧자매, 임대인, 이웃 주민 순으로 많았으며, 기타 직계 혈족, 택배기사, 친인척, 경비원, 직장동료 등에 의해 발견되거나 신고됐다.

명절에 신변을 비관한 극단적 선택도 있다. 설 명절을 앞두고 80대 독거노인이 자해를 시도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광주 북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 사는 82세 독거노인이 다쳐 쓰러진 것을 이웃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외로운 
노인들

신고 직후 소방당국이 출동해 노인은 광주의 한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인은 목과 복부 등을 흉기로 찌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설 연휴에는 ‘혼자 술을 마시는 노인’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아 아쉽고 헛헛한 마음을 술로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20년 5월 전남 여수서 술에 취해 자택 마당에 넘어져 있던 70대 노인을 마을 주민이 발견해 응급 이송했다. 같은 해 6월, 인천에서 70대 노인이 만취해 도로 위에 쓰러져 누워 있다 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연휴에는 부산의 한 빌라에서 이웃 모녀가 살해당한 경우도 있다.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50대 여성 B씨는 자신의 정신과 약을 탄 도라지차를 범행에 쓴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지난해 9월12일 부산 부산진구 한 빌라에서 이웃 주민이었던 모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B씨는 일정한 수익이 없어 병원비나 카드 대금 등을 내지 못하는 생활고를 겪었고, 가족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는 상태였다.

검찰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B씨가 이웃의 시가 600만원 상당 귀금속을 노리고 범행에 나선 것으로 봤다. B씨는 수년 전부터 자신이 복용하던 정신과 약을 절구로 빻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탔다. 이 약에는 수면제 성분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지난해 9월11일 밤 이 물을 들고 모녀를 찾아가 “몸에 좋은 도라지차”라고 건네 먹인 뒤 정신을 잃게 했다. 다음날 새벽 2시쯤 쓰러진 모녀가 의식을 회복하자, B씨는 모녀를 흉기로 찌르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앞서 명절에 사망률이 올라갔듯, 올라가는 다른 수치가 있었는데 바로 폭력이다. 경찰은 설 연휴 가정·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범죄 신고 등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고 예방활동을 강화하기로 했다. 

술이 웬수
끝없는 폭력


경찰은 지난 11일부터 오는 24일까지 2주 동안 설 명절 종합 치안 활동을 추진한다고 지난 9일 밝혔다. 연휴 기간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 및 수사 중인 아동학대 사건 전수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재발 원인과 보호‧지원 필요성 점검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최근 신고 이력, 보호조치 내역 등을 종합해 가정폭력·아동학대 고위험군 대상을 분류해, 지역 경찰뿐 아니라 유관기관과 공유해 보복 등 위험성 모니터링에도 나선다. 스토킹 등 반복 신고 사건은 살인 등 중대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과·팀장, 서장, 시·도청 등 3중으로 점검한다는 방침이다. 

이런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은 실제 연휴 기간 가정폭력 신고 등이 증가 추세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설 연휴 기간 하루 평균 전체 신고는 4만877건으로, 평소 5만1377건보다 20.5% 줄었지만, 가정폭력 하루 평균 신고는 841건으로 평소 608건보다 38.3% 증가했다.

두 차례의 가정폭력 유죄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C씨는 아내에 대한 가정폭력을 이어갔다. 2020년 12월31일 오후 7시 C씨는 술에 취해 전북 전주시 자택으로 들어와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다 눈에 띈 65㎝ 길이의 목검을 들어 아내를 향해 휘둘렀다. 맞은 부위를 감싼 채 쓰러진 아내의 몸에는 멍이 새겨졌다.

C씨는 아내 일상을 사사건건 간섭했다. 아내가 일하던 주점에 찾아가 다짜고짜 업주에게 욕설하고 영업에 훼방을 놨다. 이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C씨는 결국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주지법 제3형사부(고상교 부장판사)는 ‘과거 두 차례의 유죄 판결’ ‘집행유예 기간 중 범행’을 이유로 들었다. C씨가 아내를 폭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8년 6월에는 자택서 가로 50㎝, 세로 11㎝, 높이 14㎝의 나무상자로 아내의 얼굴, 가슴, 팔, 다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피부는 퍼렇게 멍들고 찢어져 전치 3주의 진단이 나왔다. 이때 C씨는 징역 1년2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2016년 3월에도 같은 일을 반복해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C씨는 매번 법정서 “반성한다”고 말했고, 아내는 그때마다 남편의 말을 믿고 합의서, 탄원서를 냈다. 이 같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살인, 고독사, 극단적 선택까지
술 마시는 노인 사고 위험성 높아

2020년 추석 연휴에 50대 남성 D씨는 대전 서구 한 건물 외벽에 사다리를 대고 2층에 위치한 배우자 주거지로 침입,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를 “죽이겠다”고 겁을 줬다. 앞서 D씨는 과거 배우자에게 가정 내 폭력 행위를 저질러 접근금지 등 임시조처가 내려진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명절이 지나면 자연스레 이혼율도 올라간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설 명절 직전 2월에는 이혼 건수가 약 1만5000여건이었으나, 명절 직후 3월엔 1만6800여건으로 1800건가량이 증가했다.

2021년 추석이 있던 9월은 이혼 건수가 1만3700여건이었고, 직후 10월은 1만5200건으로 전달에 대비해 1400건이나 늘었다.

회사원 남편과 10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오던 가정주부 E씨는 오랫동안 쌓여온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추석 명절이 지나고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 

E씨는 명절에 모든 가족이 있는 자리서 시댁 어른의 막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 E씨의 시댁 어른은 E씨에게 “너무 뚱뚱하다” “남편이 여자로 보겠냐”는 등의 모욕을 줬다. 게다가 시댁 어른은 남편의 밥을 잘 챙겨야 한다고 항상 잔소리했다.

실제로 E씨는 항상 남편의 밥을 잘 차려줬기 때문에 더 억울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됐고 심리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E씨는 남편이 중재해주길 원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결국 남편에게 명절을 이유로 이혼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 의례 정립 위원회(이하 성균관)는 지난해 9월5일 ‘반성문’격의 기자회견문을 공개한 바 있다. 성균관은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회견문을 통해 “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서도 “현대화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옛 영화만을 생각하며 선구자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결과 유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 차별’이라는 용어가 난무했다. 명절 끝에는 ‘이혼율 증가’로 나타나는 현상이 유교 때문이라는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며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것은 후손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데 고통받거나 가족 사이 불화가 초래된다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이라고 돌아봤다.

불행한 연휴
이혼 늘어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명절에 발생하는 갈등, 싸움, 스트레스는 직접적인 이혼 사유가 되기는 어렵지만 고부 갈등, 정서 갈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거나 중간에 배우자가 처신한 행동, 이로 인해 발생한 폭언이나 폭력 등이 있다면 충분히 사유가 될 수 있는 만큼 법률적인 전문가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이혼을 준비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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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