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괜찮아. 남자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거야.” 이 말은 여성에게 성희롱을 당한 남성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남성 성희롱 피해자는 꾸준히 존재하지만,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지 못한다.
한국은 과거에 남성 성폭력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3년에 형법을 개정하면서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에 포함된 것이다. 현재 형법 297조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돼있지만, 그전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기재돼있었다.
부끄러워
신고 못해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없는 것은 피해자 통계 수치로 증명된다. 강력범죄는 남성 피해자보다 여성 피해자의 수가 훨씬 많다. 2019년 기준 피의자 비율은 남성이 95.45%, 2만7626명으로 대부분 피의자 성별은 남성이다.
피해자의 비율은 여성이 85.81%, 2만2718명으로 대부분의 피해자 성별은 여성이다. 이 수치는 매년 비슷하다.
강력범죄 중 성범죄 피해자 성별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해 강제추행을 당한 여성은 1만3962명인데 비해, 남성은 1248명으로, 남성 피해자가 10%도 안 된다. 기타 강간 및 강제추행 등을 당한 여성 피해자는 238명이지만 남성 피해자는 8명이다.
이런 상황이니 성범죄 예방 등은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법에서 남성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된 남성 피해자를 위한 전문 보호시설 역시 전무해 내년에 서울에 세워질 예정이다.
피해자가 적다고 피해 사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여성가족부는 남성이 성폭력이나 성희롱 피해 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경우가 여성에 비해 매우 드물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남성이 신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서’ 등이다.
성폭력 피해를 알리는 것 자체는 누구나 힘든 일이지만, 남성의 경우는 ‘성폭력은 여성이 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통념 때문에 더욱 음지로 몰리고 있는 실상이다. 통계에 나온 수치보다 많은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남성이 경찰에 성폭력 및 성희롱을 당했다고 신고해도, 경찰의 대처가 여성이 신고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지목당한 여성이 범행 사실을 부인하면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증언해줄 사람이 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보통 위계 의한 성추행으로 시작
정확히 A(30)씨의 경우가 이런 상황이다. A씨는 경기도 ○○노동조합에 근무하는 직원이다. 지난해 7월26일 A씨는 같은 지부의 지부장인 B씨가 “서울지방본부 본부장 면담이 있는데 같이 가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함께 서울에 있는 ○○노동조합 사무실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노동조합 여성 국장을 포함한 A씨와 B씨 등 총 4명이 참석했다. A씨와 여성 국장은 일면식도 없이 처음 보는 사이였다. 4명 중 A씨가 직급이 가장 낮았고 나이도 가장 어렸다. 그래서 회의는 참석만 했을 뿐 발언권을 가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4명의 일행은 식사하러 갔다. 여름이라 날이 더워, A씨는 근처에 있는 냉면집을 찾기 위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었다.
이때 A씨의 엉덩이 부분에 무언가 닿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여성 국장의 가방이 엉덩이에 닿는 거라고 여겨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소름이 끼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성 국장이 A씨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즉시 몸을 피한 후 여성 국장을 바라봤다.
여성 국장은 A씨의 상급자기도 했지만 나이도 20살이나 많았다. 이런 이유로 바로 화를 내지 못하고 여성 국장을 째려봤다. 그러자 여성 국장은 당황하면서 우물쭈물하더니 “엉덩이가 만지고 싶게 생겨서…”라고 작게 말했다.
이런 일을 당했어도 A씨가 그 자리에서 당장 따질 수는 없었다. 여성 국장의 체면도 있고, 지역본부가 서울 본부에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A씨의 심정이었다. B씨가 냉랭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했고, 이후 4명은 식사를 마친 뒤 헤어졌다.
이후 사건은 잠잠했다. 그러나 A씨와 B씨가 속한 노조가 지난해 10월 내부 사정으로 해체가 결정됐다. 지부 해체 결정이 난 이후 A씨와 B씨를 포함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A씨는 B씨에게 “저 이제 ○○ 노동조합 임원을 그만두니까 여성 국장을 고소해도 돼요?”라고 물어봤다.
여국장이…
강제추행
정말 그렇게 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B씨가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난처해하자 같은 자리에 있는 다른 직원이 상황을 물었다. 그래서 A씨는 지난해 있었던 사건을 주위 직원에게 설명했다.
여성 국장이 A씨를 추행한 사실은 그때부터 소문났다.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술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화두가 됐다. 경기도 ○○ 노동조합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상위 지부의 업무처리 방식이 불만이었던 직원은 “여성 국장이 A에게 그런 짓도 하지 않았냐”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여성 국장이 A씨를 성추행했는데 왜 아직도 여성 국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는 취지의 말이었다. 그러자 추행 사건을 몰랐던 다른 직원들은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그 자리에서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된 C씨가 바로 여성 국장에게 전화했다.
C씨는 추행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했지만, 여성 국장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 여성 국장은 C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 사건을 스스로 전국단위 노조 여성 국장에게 신고했다”고 말했다.
이후 A씨는 노조 전국단위 여성 국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됐고, 추행 사건과 관련해 “나는 원하는 것 없다. 사과만 들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A씨가 여성 국장의 사과만 요구한 것은 3가지였다. 변호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 ▲징역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는 점 ▲고소하고 송사하는 과정 자체의 힘듦 ▲같은 조직 내에서 원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국단위 여성 국장은 A씨에게 “여성 국장이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어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A씨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여성 국장을 형사 고소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를 노조에도 알리지 않았다.
증언만
남았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여성 국장이 “A씨와 C씨가 상황을 만들어서 나를 괴롭힌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제추행 행위 자체를 부인한 것에 더해 A씨를 가해자로 몰아갔다. A씨는 여성 국장을 고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성 국장은 A씨를 포함한 세 명을 추가로 고소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직원들은 격분해서 기업 리뷰를 적는 블라인드에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고소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나와 있다. 우선 A씨는 회사에서 퇴사당했고, 나머지 둘은 정직 처리를 당했다.
○○ 노동조합 감사실에 녹취록까지 제출했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글 작성자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여성 국장이 위원장 도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글 작성자는 “피해자가 신고했는데 가해자가 됐다. A씨가 여자였어도 이랬을까? 경찰이나 여성가족부는 ‘피해자의 증언이 곧 증거입니다. 피해자가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면 그게 성추행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남자가 성폭력 피해자가 되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어이가 없다”고 분노했다.
해당 사건의 변호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변호사는 “피해자가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는 상황이 완전 다르다. 이번 경우는 남자가 피해자고 사건 당시의 증거가 없다. 증언이 있지만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특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있어서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대 초반 미혼 남성인 D씨는 회사에 다니다가 여사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여사장이 “퇴근 후 식사나 같이 하자”는데 따라 나갔다가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피해자가 신고하니 피의자 지목
“실제 피해 남자는 훨씬 많을 것”
여사장은 식사가 끝나자 D씨에게 “술 한잔하자”고 제안했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D씨는 여사장을 따라나섰다.여사장은 술자리에서 D씨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지만, 여사장의 술잔을 거절할 수 없어서 모두 받아 마셨다. 그리고 D씨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 보니 숙박업소였다.
여사장은 이후에도 D씨를 여러 번 불러냈다. D씨는 여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따라 나섰다. D씨는 “기술을 배워야 해서 경력이 쌓일 때까지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는 처지다. 앞으로 사장이 또 부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0명의 여자가 있는 부서에서 혼자 남자로 근무하는 E씨는 공공연히 이뤄지는 집단 성희롱에 시달리고 있다. E씨 부서의 여자 직원들은 김씨에게 ‘엉덩이가 예쁘게 생겼다’ ‘남자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냐?’ ‘잘하겠다’ 등 큰소리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E씨가 가만히 서 있으면 그의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한 여자 직원은 그를 뒤에서 껴안으면서 가슴을 쓰다듬기도 했다. E씨는 “싫은 내색을 해봐야 많은 여자 앞에서는 소용도 없다. 소름이 끼칠 정도지만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심하게 화도 못낸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F씨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F씨는 여직원이 80%인 부서에 근무 중으로 미혼에다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회사 여자 선배는 F씨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면서 “덩치가 있어서 좋다” “영계 같아서 좋다” “내 거야”라는 말을 했다.
이 사실을 회사 측에 호소했다가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F씨는 “여자 선배들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 봐도 내게 돌아온 것은 비난과 해고뿐이었다”고 토로했다.
F씨 측 변호사는 “성희롱이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쪽이 다른 쪽을 억압하는 수단이므로, 여성이 많은 회사에서 남성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성이
피해자면?
‘남성의 전화’의 이옥 소장은 “남성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례는 과거에 드물었는데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성적 피해를 호소하는 상담 전화가 꾸준히 걸려온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전화를 걸어 상담할 정도라면 여러 번 반복해서 당하다가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제로 피해를 본 남성의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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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속 기사>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지원한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4명 중 1명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피해자 수가 월등히 많기는 하지만 남성 피해자 수가 전년에 비해 2배 늘었다.
여가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지난 4월4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21년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운영 실적’을 발표했다.
2018년 4월 진흥원에 설치된 센터는 365일 24시간 상담과 피해 촬영물 삭제, 수사·법률·의료 연계를 지원한다.
지난해 센터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총 6952명에게 18만8000여건의 서비스를 지원했다.
서비스 종류별로 보면, 피해 촬영물 삭제 지원이 16만9820건(90.3%)으로 가장 많았다.
지난해 6월부터는 개정 성폭력방지법에 따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과 수사기관 요청에 따른 피해 촬영물을 선제적으로 삭제 지원하고 있다.
피해자의 성별을 보면 여성 73.5%(5109명), 남성 26.5%(1843명)였다.
남성 피해자 수는 전년(926명) 대비 2배가량 늘었다. 여가부는 “이는 ‘몸캠 피싱(불법촬영 협박)' 피해 신고 건수 급증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