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차별’ 성범죄 당한 남성들의 눈물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2.10.31 13:00:25
  • 호수 13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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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했다고 하니 어느새 가해자로”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괜찮아. 남자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거야.” 이 말은 여성에게 성희롱을 당한 남성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남성 성희롱 피해자는 꾸준히 존재하지만,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하지 못한다. 

한국은 과거에 남성 성폭력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013년에 형법을 개정하면서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에 포함된 것이다. 현재 형법 297조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돼있지만, 그전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기재돼있었다.

부끄러워
신고 못해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없는 것은 피해자 통계 수치로 증명된다. 강력범죄는 남성 피해자보다 여성 피해자의 수가 훨씬 많다. 2019년 기준 피의자 비율은 남성이 95.45%, 2만7626명으로 대부분 피의자 성별은 남성이다.

피해자의 비율은 여성이 85.81%, 2만2718명으로 대부분의 피해자 성별은 여성이다. 이 수치는 매년 비슷하다.

강력범죄 중 성범죄 피해자 성별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해 강제추행을 당한 여성은 1만3962명인데 비해, 남성은 1248명으로, 남성 피해자가 10%도 안 된다. 기타 강간 및 강제추행 등을 당한 여성 피해자는 238명이지만 남성 피해자는 8명이다.


이런 상황이니 성범죄 예방 등은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법에서 남성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노출된 남성 피해자를 위한 전문 보호시설 역시 전무해 내년에 서울에 세워질 예정이다.

피해자가 적다고 피해 사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여성가족부는 남성이 성폭력이나 성희롱 피해 사실을 남에게 알리는 경우가 여성에 비해 매우 드물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남성이 신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신고하지 않는 이유는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서’ 등이다. 

성폭력 피해를 알리는 것 자체는 누구나 힘든 일이지만, 남성의 경우는 ‘성폭력은 여성이 당할 수 있는 것’이라는 통념 때문에 더욱 음지로 몰리고 있는 실상이다. 통계에 나온 수치보다 많은 남성이 성범죄 피해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남성이 경찰에 성폭력 및 성희롱을 당했다고 신고해도, 경찰의 대처가 여성이 신고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지목당한 여성이 범행 사실을 부인하면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증언해줄 사람이 있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보통 위계 의한 성추행으로 시작

정확히 A(30)씨의 경우가 이런 상황이다. A씨는 경기도 ○○노동조합에 근무하는 직원이다. 지난해 7월26일 A씨는 같은 지부의 지부장인 B씨가 “서울지방본부 본부장 면담이 있는데 같이 가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함께 서울에 있는 ○○노동조합 사무실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노동조합 여성 국장을 포함한 A씨와 B씨 등 총 4명이 참석했다. A씨와 여성 국장은 일면식도 없이 처음 보는 사이였다. 4명 중 A씨가 직급이 가장 낮았고 나이도 가장 어렸다. 그래서 회의는 참석만 했을 뿐 발언권을 가지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4명의 일행은 식사하러 갔다. 여름이라 날이 더워, A씨는 근처에 있는 냉면집을 찾기 위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었다. 

이때 A씨의 엉덩이 부분에 무언가 닿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여성 국장의 가방이 엉덩이에 닿는 거라고 여겨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소름이 끼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여성 국장이 A씨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즉시 몸을 피한 후 여성 국장을 바라봤다.

여성 국장은 A씨의 상급자기도 했지만 나이도 20살이나 많았다. 이런 이유로 바로 화를 내지 못하고 여성 국장을 째려봤다. 그러자 여성 국장은 당황하면서 우물쭈물하더니 “엉덩이가 만지고 싶게 생겨서…”라고 작게 말했다.

이런 일을 당했어도 A씨가 그 자리에서 당장 따질 수는 없었다. 여성 국장의 체면도 있고, 지역본부가 서울 본부에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문제를 크게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A씨의 심정이었다. B씨가 냉랭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을 했고, 이후 4명은 식사를 마친 뒤 헤어졌다.

이후 사건은 잠잠했다. 그러나 A씨와 B씨가 속한 노조가 지난해 10월 내부 사정으로 해체가 결정됐다. 지부 해체 결정이 난 이후 A씨와 B씨를 포함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A씨는 B씨에게 “저 이제 ○○ 노동조합 임원을 그만두니까 여성 국장을 고소해도 돼요?”라고 물어봤다.

여국장이…
강제추행

정말 그렇게 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B씨가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난처해하자 같은 자리에 있는 다른 직원이 상황을 물었다. 그래서 A씨는 지난해 있었던 사건을 주위 직원에게 설명했다.

여성 국장이 A씨를 추행한 사실은 그때부터 소문났다.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술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화두가 됐다. 경기도 ○○ 노동조합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상위 지부의 업무처리 방식이 불만이었던 직원은 “여성 국장이 A에게 그런 짓도 하지 않았냐”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여성 국장이 A씨를 성추행했는데 왜 아직도 여성 국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느냐’는 취지의 말이었다. 그러자 추행 사건을 몰랐던 다른 직원들은 무슨 말이냐고 물었고, 그 자리에서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된 C씨가 바로 여성 국장에게 전화했다.

C씨는 추행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했지만, 여성 국장은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곧 여성 국장은 C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 사건을 스스로 전국단위 노조 여성 국장에게 신고했다”고 말했다.

이후 A씨는 노조 전국단위 여성 국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됐고, 추행 사건과 관련해 “나는 원하는 것 없다. 사과만 들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A씨가 여성 국장의 사과만 요구한 것은 3가지였다. 변호사를 통해 알아본 결과 ▲징역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는 점 ▲고소하고 송사하는 과정 자체의 힘듦 ▲같은 조직 내에서 원한을 사고 싶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국단위 여성 국장은 A씨에게 “여성 국장이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어서 조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A씨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여성 국장을 형사 고소하거나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를 노조에도 알리지 않았다.

증언만 
남았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여성 국장이 “A씨와 C씨가 상황을 만들어서 나를 괴롭힌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제추행 행위 자체를 부인한 것에 더해 A씨를 가해자로 몰아갔다. A씨는 여성 국장을 고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성 국장은 A씨를 포함한 세 명을 추가로 고소했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직원들은 격분해서 기업 리뷰를 적는 블라인드에 글을 남겼다. 이 글에는 고소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나와 있다. 우선 A씨는 회사에서 퇴사당했고, 나머지 둘은 정직 처리를 당했다.

○○ 노동조합 감사실에 녹취록까지 제출했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글 작성자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여성 국장이 위원장 도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글 작성자는 “피해자가 신고했는데 가해자가 됐다. A씨가 여자였어도 이랬을까? 경찰이나 여성가족부는 ‘피해자의 증언이 곧 증거입니다. 피해자가 기분이 나쁘다고 느끼면 그게 성추행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남자가 성폭력 피해자가 되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어이가 없다”고 분노했다.

해당 사건의 변호사도 같은 의견이었다. 변호사는 “피해자가 남자인 경우와 여자인 경우는 상황이 완전 다르다. 이번 경우는 남자가 피해자고 사건 당시의 증거가 없다. 증언이 있지만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특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있어서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30대 초반 미혼 남성인 D씨는 회사에 다니다가 여사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여사장이 “퇴근 후 식사나 같이 하자”는데 따라 나갔다가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피해자가 신고하니 피의자 지목
“실제 피해 남자는 훨씬 많을 것”

여사장은 식사가 끝나자 D씨에게 “술 한잔하자”고 제안했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D씨는 여사장을 따라나섰다.여사장은 술자리에서 D씨에게 연거푸 술을 권했지만, 여사장의 술잔을 거절할 수 없어서 모두 받아 마셨다. 그리고 D씨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 보니 숙박업소였다. 

여사장은 이후에도 D씨를 여러 번 불러냈다. D씨는 여사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따라 나섰다. D씨는 “기술을 배워야 해서 경력이 쌓일 때까지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는 처지다. 앞으로 사장이 또 부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10명의 여자가 있는 부서에서 혼자 남자로 근무하는 E씨는 공공연히 이뤄지는 집단 성희롱에 시달리고 있다. E씨 부서의 여자 직원들은 김씨에게 ‘엉덩이가 예쁘게 생겼다’ ‘남자는 원래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냐?’ ‘잘하겠다’ 등 큰소리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E씨가 가만히 서 있으면 그의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한 여자 직원은 그를 뒤에서 껴안으면서 가슴을 쓰다듬기도 했다. E씨는 “싫은 내색을 해봐야 많은 여자 앞에서는 소용도 없다. 소름이 끼칠 정도지만 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심하게 화도 못낸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F씨도 이와 비슷한 경우다. 의류업체에서 일하는 F씨는 여직원이 80%인 부서에 근무 중으로 미혼에다가 나이가 가장 어렸다. 회사 여자 선배는 F씨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면서 “덩치가 있어서 좋다” “영계 같아서 좋다” “내 거야”라는 말을 했다.

이 사실을 회사 측에 호소했다가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F씨는 “여자 선배들이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 봐도 내게 돌아온 것은 비난과 해고뿐이었다”고 토로했다.

F씨 측 변호사는 “성희롱이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쪽이 다른 쪽을 억압하는 수단이므로, 여성이 많은 회사에서 남성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여성이
피해자면?

‘남성의 전화’의 이옥 소장은 “남성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례는 과거에 드물었는데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성적 피해를 호소하는 상담 전화가 꾸준히 걸려온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전화를 걸어 상담할 정도라면 여러 번 반복해서 당하다가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실제로 피해를 본 남성의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alsw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지원한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4명 중 1명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피해자 수가 월등히 많기는 하지만 남성 피해자 수가 전년에 비해 2배 늘었다.

여가부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은 지난 4월4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21년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운영 실적’을 발표했다. 

2018년 4월 진흥원에 설치된 센터는 365일 24시간 상담과 피해 촬영물 삭제, 수사·법률·의료 연계를 지원한다.

지난해 센터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총 6952명에게 18만8000여건의 서비스를 지원했다.

서비스 종류별로 보면, 피해 촬영물 삭제 지원이 16만9820건(90.3%)으로 가장 많았다.

지난해 6월부터는 개정 성폭력방지법에 따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과 수사기관 요청에 따른 피해 촬영물을 선제적으로 삭제 지원하고 있다.

피해자의 성별을 보면 여성 73.5%(5109명), 남성 26.5%(1843명)였다.

남성 피해자 수는 전년(926명) 대비 2배가량 늘었다. 여가부는 “이는 ‘몸캠 피싱(불법촬영 협박)' 피해 신고 건수 급증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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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