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비하인드 스토리

공격하던 검사들이 방패막이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하던 검사들이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직 판검사들의 로펌 이직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전관예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이 이직한 곳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을 변호하는 곳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관계자들을 재판에 넘겼던 검사들이 반대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된 셈이다.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편으로 해당 사건을 조사하던 검사들이 돌아섰다. 일부 공정거래위원회 간부도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변호를 맡았던 로펌으로 이직했다. 피해자들은 애초 사정기관이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비판한다. 지난 10년간 사건 축소·은폐 의혹을 받았던 검찰과 공정위가 애초 가해기업들과 한통속이었다는 주장이다.

검찰·공정위
의지 없었나

서울중앙지검에서 2019년부터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수사해 SK케미칼과 애경 간부 여러명을 재판에 넘긴 검사는 최근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이직했다. A 변호사는 공정거래와 기업자금, 금융·증권, 중대시민재해 등 사건을 주로 맡고 있다.

대형 로펌들이 지난해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맞춰 노동과 산업재해 분야에 정통한 검사 출신을 대거 영입했는데 A 변호사의 로펌행 역시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양은 재판에서 두 기업의 변호를 맡았고, SK케미칼과 애경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2심 재판을 진행 중인 태평양은 지난달 24일 A 변호사를 영입했다. 이 같은 로펌 이직은 불법이 아니다. 검사 시절 담당했던 사건은 원칙적으로 배당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다.


옥시 한국법인의 존리 대표 등을 수사했던 B 변호사도 지난해 법무법인 광장에 취업했다. B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에서 관련 수사를 맡았고 이직 직전에는 같은 검찰청에서 반부패수사부장으로 근무했다. 광장은 현재 SK케미칼 측의 변호를 맡고 있다.

B 변호사는 2016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맡았다. 당시 광장은 옥시의 피해자 배상 지원 업무에만 관여했다.

그러나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담당하던 검사들의 로펌 이직으로 가해기업의 입장이 유리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검사 시절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정보로 가해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민단체의 이 같은 우려는 이미 일어난 바 있다.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려 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에 따르면 협의체를 만든 SK케미칼과 애경은 2017년 10월18일, 11월1일 개정안 저지 대책 및 정부 움직임 등을 논의했다.

협의체는 당시 현재 김앤장에 개정안 내용을 비판하는 의견서 작성을 요청했고 일부 국회의원에게는 법률이 통과되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계획을 짰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는 개정안에 대한 반대 논리 개발을 맡기고 국회의원들에게는 로비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2017년 9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피해구제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으나 개정안은 1년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주심 맡던 공정위 위원도 법무법인행
전관·사정기관 출신들 여러 차례 미팅


사참위가 공개했던 협의체 회의록에도 “일부 보수 매체를 선정해 개정안에 대한 비판 기사 보도될 수 있게 조치, 개정안에 대해서 100% 찬성은 아니라는 분위기 조성 필요”라는 내용도 담겨있다. ‘언론 플레이’를 통해 개정안에 대한 여론을 호도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협의체는 검찰과 정부 내의 구체적인 움직임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회의록에는 “새로 부임한 형사2부 박모 부장검사는 검찰 동향 모니터링 중이기는 하나 공정위로부터 자료 등을 받은 것이 없고 당장 조치 취할 계획은 없다고 함” “살인죄 등 명백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 죄책은 무혐의로 종결하고, 나머지 부분은 환경부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한부 기소중지로 처리할 예정” 등의 내용이 나와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조사했던 공정위도 부적절한 이직에서 자유롭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주심을 맡았던 김성하 전 상임위원은 지난해 법무법인 지평에 고문으로 재취업했다. 지평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재판에서 SK케미칼 변호를 맡았다. 가습기살균제 단독 사용 피해자들과 SK케미칼·애경의 피해지원을 위한 합의 중재를 담당한 곳이기도 하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부실 조사 및 은폐 의혹 정황이 여러 차례 드러난 바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들에 대해 지난 10년간 2~3차례만 조사했다. 이들 기업은 공정위로부터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가해기업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적극적인 로비 때문으로 보인다.

사참위에 따르면 SK케미칼과 애경 측 임직원·법률대리인은 김 전 위원과 여러 차례 만났다. 법원 1심 역할을 하는 공정위 심의·의결에서 공정위 상임위원은 판사다. 판사가 법정 밖에서 변호인들을 따로 만난 셈이다. 김 전 위원은 사참위 조사에서 “안건이 많고 방대해 면담을 하면 논점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일종의 과외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수년간 수사
축소, 은폐…

사참위는 공정위가 ‘공정위 위원의 면담 등에 관한 지침(이하 면담 지침)’을 어긴 점도 지적한 바 있다. 면담 지침은 2012년 만들어졌다. 지침에는 원칙적으로 기업 측 피심인을 만나선 안 된다고 규정해놨다. 공정위는 김 전 위원이 면담 지침을 어겼다고 보지 않았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전관이나 로펌 인사와 ‘장외 접촉’이 문제가 되자, 공정위는 2017년 외부인 접촉 관리규정을 만들었다.

사참위는 공정위가 소비자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부처인데도,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을 엄격하게 평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공정위는 산하에 한국소비자원을 둔 소비자 안전 주무부처다. 공정위는 SK케미칼·애경의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다루면서 오히려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 입증을 예단하기도 했다.

2011년 5월 공정위에는 또 다른 제품인 ‘세퓨’의 안전성 검증을 묻는 구체적인 민원이 접수됐다. ‘인체에 무해하며 흡입하더라도 안전해 유아나 환자가 있는 곳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표시 광고가 검증된 내용이냐는 민원이었다.

같은 달 질병관리본부(질본)에서는 역학조사 중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황이었다. 공정위는 기업 측 자료를 받아 전달하는 데 그쳤다. 훗날 세퓨 가습기살균제는 인체 위해성이 드러났다. 정부부처 간 정보공유가 되지 않으면서, 그 사이 가습기살균제 사용 피해자는 더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정위는 2012년 7월 뒤늦게 세퓨 가습기살균제가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2년 7월 공정위는 애경과 이마트를 무혐의 처분했다. 이때 원료 제조와 판매에 모두 관여한 SK케미칼은 처분 대상조차 아니었다.

공정위는 2016년 2차 조사 때에도 “환경부가 피해 인정은 했지만, 2012년 질본 동물실험 결과와 상충된다”며 심의절차 종료를 의결했다. 심의절차 종료는 사실상 무죄 판단에 가깝다.

공정위 전 고위관계자는 사참위 조사에서 “재심사건이다 보니 새로운 증거나 입증에 논점이 맞춰졌다”며 “원심의 기초자료까지 다 보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했다”고 진술했다.

대형 로펌
자리 옮겨

공정위의 잘못된 행정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부실조사로 이어졌다. 공정위가 심의했던 가습기살균제 표시광고법 위반 사건에서 입증 책임은 기업에 있다. 기업은 안전성 검증자료를 제출해 허위 혹은 과장·기만 광고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공정위는 ‘표시·광고 실증에 관한 운영(고시)’에 따라 표시광고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 판단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애경은 공정위 조사를 받던 시기에 “SK케미칼에서 인체 무해성이 입증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매했다”고 공정위에 밝혔다. 애경산업은 안전성 검증 문건도 확보하지 않은 채 제품을 판매해왔다. 당시 이마트 또한 공정위에 “안전성을 실증할만한 자료가 없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안전성 관련 자료가 SK케미칼에 있음에도 공정위는 1차 조사 때 SK케미칼을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공정위를 향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실시한 3차 조사에서는 SK케미칼·애경 실지조사, 유통망 실지조사, SK케미칼·애경 관계자 진술조사, 애경산업 포렌식 실시가 이뤄졌다. 3차 조사에서도 공정위는 SK케미칼은 포렌식 조사를 하지 않았다.

SK케미칼은 사참위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참위가 공정위에 SK케미칼의 제출자료를 내달라고 했지만, 공정위는 표시광고법 제12조 비밀엄수의 의무를 들어 사참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SK케미칼이 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공정위는 표시광고법에 따라 비밀엄수를 해야 해 SK케미칼 자료를 사참위에 제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가해기업들은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으나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통상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2심에서 뒤집히기 어렵다. 가습기살균제 제품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였다.

2020년 7월 기준 환경부에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7000여명으로 사망자는 1500명이 넘는다. 이들의 피해 원인을 특정해야 가해자 처벌과 피해 구제가 이뤄질 수 있다.

‘SK케미칼·애경 변호’ 태평양·광장에 둥지
가해기업 관계자 재판 넘긴 수사 담당 이직

문제는 피해자 대부분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 가습기살균제인 옥시싹싹과 CMIT·MIT 성분의 가습기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사용한 ‘복합 사용자’라는 점이다. 이는 가해기업들의 무죄 근거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총 98명의 피해자 중 94명은 옥시싹싹과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쓴 복합 사용자이고, 가습기메이트만 쓴 단독 사용자였다. 이들의 피해가 CMIT·MIT 성분으로 인한 피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동물실험 결과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환경부가 2018년 수행한 ‘가습기살균제 건강피해 규명을 위한 독성시험’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환경부는 PHMG 성분을 쥐의 기도에 점적투여(용액을 떨어뜨림)해 폐섬유화를 유발한 뒤 CMIT·MIT 성분을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과 CMIT·MIT 성분만 단독으로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을 각각 수행했다.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만 사용했다는 피해자의 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의 실험을 모두 한 것이다.

하지만 CMIT·MIT에만 노출된 쥐에서는 폐의 염증이나 폐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위 연구에서는 시험 동물에 대한 노출 시간을 하루 20시간으로 늘리고, 시험 물질의 농도도 가습기메이트 권장사용량의 833배에 달하도록 높였지만 CMIT·MIT를 흡입한 시험동물에게서 폐섬유화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1심 법원이 동물실험에서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점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쥐 실험에서 폐섬유화가 발생해야만 사람에게 폐섬유화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검찰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예로 든다. 1957년 서독의 한 제약회사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입덧 완화 약품을 출시했다. 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었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산모들은 사지가 없거나 짧은 아기를 출산했다.

“로비·정보
공유 우려”

전 세계 48개국에서 1만명 이상의 피해자를 남긴 이 사건은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간과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CMIT·MIT가 동물 호흡기 등에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존재하기에 재판부가 인과관계를 인정했어야 했다는 설명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공론화된 지 11년이 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유족들은 최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정부의 발 빠른 대응을 강조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유품을 전시해 추모하고, 가해 기업인 옥시·애경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하기도 했다.


<hounder@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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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차례가 뭐죠?” MZ가 바꾼 추석 풍경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우리에게 추석은 차례를 지내거나 귀향을 하는 것이 익숙한 명절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명절을 보내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차례를 지내는 비중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긴 연휴를 활용한 여행, 단기 아르바이트, 자기계발 등을 하는 것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추석에 차례를 지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초반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차례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한 것이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차례와 제사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셈이다. 알바 우선 통계청 조사에서도 명절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하지 않는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례를 지내는 대신 긴 연휴를 여행으로 보내려는 수요가 뚜렷하게 증가했다. 한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행 중개 플랫폼 스카이스캐너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약 77%가 이번 추석 연휴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고 응답했다. 특히 해외여행 비중이 크게 늘었다. 10년 전 대비 명절 여행에 긍정적인 인식이 37%에서 70%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추석 연휴 기간 인기 여행지는 일본(43.1%)이 1위였고, 이어 베트남(13.2%), 중국(9.6%), 태국(7.5%), 대만(6.2%) 순이었다. 도시별로는 일본 후쿠오카(20.2%)가 가장 높은 검색 비율을 기록했으며, 오사카(18.3%), 도쿄(15.4%), 방콕(8.9%), 타이베이(8.0%)가 뒤를 이었다. 여행을 가지 않고 명절 연휴를 일터에서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긴 연휴를 활용해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늘면서 단기 아르바이트 수요도 급증했다. 당근마켓과 같은 알바 커뮤니티와 플랫폼에는 “추석 알바 구합니다”라는 글이 다수 올라왔다. 한 20대 청년은 “쉬는 날이 길어 잠깐이라도 일을 하려 한다”고 밝혔고, 한 대학생은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선물세트 포장 알바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특히 명절 기간에는 업무강도가 높아 평균 시급의 1.5배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근무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명절 시즌 알바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맞춰 구인·구직 플랫폼들은 ‘추석 알바 채용관’을 운영하며 수요를 모으고 있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 도·소매점과 전통시장에서 단기 인력을 모집하고, 선물용 고기·과일 세트 포장, 택배 상·하차, 진열·판매 등의 일자리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절반 이상 “안 지내요” 77%가 여행 계획 세워 지난해 추석 구인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 조사에서는 응답자 중 절반 이상(53.9%)이 단기 용돈 벌이를 위해, 22.2%는 고물가로 인한 지출 부담 때문에, 18.2%는 여행 경비나 등록금 등 목돈 마련을 위해 명절 알바를 계획했다고 답했다. 이는 명절을 단순히 휴식 시간으로 보내지 않고, 생계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집에 머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계발하며 추석 나기’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혼자 추석을 보내는 일명 ‘혼추족’ 중에는 독서나 온라인 강의, 어학 공부, 자격증 준비 등에 연휴를 투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스터디 카페와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일부 출판사나 문화 기획사에서는 명절 연휴에 맞춰 북콘서트 같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명절이 휴식 기간만이 아닌 스스로를 계발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양상은 가족 모임에도 영향을 받았다. MZ세대는 가족·친척 모임을 스트레스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한 청년은 “친척들과 모이면 취업·결혼 얘기 등으로 잔소리를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친척 모임에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필요한 경우에만 가족을 만나고 나머지 시간에는 개인활동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연휴를 도심에서 보내는 ‘혼추족’을 겨냥해 유통·외식업계도 다양한 이벤트를 내놓고 있다. 수도권 맛집 가이드, 추석맞이 전시·공연, 집콕형 OTT·게임 프로모션 등이 대표적이다. 편의점과 HMR(가정 간편식) 업체는 명절 한정 도시락·한상 차림 제품을 늘리고, 명절 기간 반값·카드 제휴 할인 등 단기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추석 선물 시장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굴비·한우·고급 과일 세트 등 전통 품목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실속형·소포장 선물세트가 늘었다. 대표적으로 대형마트에서는 고급 커피·차 세트, 수제 디저트처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소포장 구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일과 자기계발이 더 유익해” 명절 스트레스 가족 모임 불참 온라인몰에서는 올리브 오일, 참기름, 견과류, 꿀 등 건강 지향 소품목 세트가 매출 상위에 오르기도 했다. 실속형·소포장 선물을 찾는 배경에는 고물가 부담과 1~2인 가구 증가가 있다. 소비자들은 예전처럼 고가 선물을 준비하기보다, 실용적이고 보관이 편리한 상품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 명절을 함께 보내는 가족 규모가 줄면서 필요한 양만큼만 담긴 선물세트가 ‘부담 없는 선택’으로 자리 잡았다. 가격 대비 효용을 중시하는 MZ세대 소비자층도 이 같은 흐름을 이끌고 있다. 모바일 선물하기 판매는 전년 추석 대비 두 배 이상 늘었고, 온라인몰도 같은 기간 선물세트 매출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편의점 앱을 통한 선물세트 매출은 연중 대비 100% 이상 신장세가 관측됐고, 패션·라이프스타일 플랫폼의 선물하기 거래액도 두 자릿수 증가를 이어가고 있다. 마켓컬리는 추석 기간 한시 선물하기 서비스를 운영하며 홍삼·화장품 등 선물 품목을 확장했다. 명절 식문화 자체도 간편화 된 흐름이 뚜렷하다. 1인 가구 1012만명, 2인 가구 600만명으로 소규모 가구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대형마트의 간편 차례상 매출은 최근 3년 연속 증가했다. 편의점의 냉장·냉동 HMR 매출은 두 자릿수 증가했고, 명절 한정 도시락은 1인 가구 밀집 상권에서 판매 비중이 높았다. 이번 추석에도 이런 흐름에 맞춰 대형 마트는 간편 차례상·냉동 밀키트 대형 할인전을, 편의점 4사는 명절 도시락 출시와 제휴 할인행사를 연달아 내놓고 있다. 밀키트와 같은 간편식의 수요가 증가한 데에는 물가 상승이 영향을 미쳤다. 소비자 설문에선 추석 전체 지출 예산이 평균 71만2000원으로 전년 대비 26%가량 늘었다는 응답이 나왔다. 지출 중에는 부모 용돈·선물 비중이 절반을 웃돌았고, 차례상 비용·내식 비용도 적지 않았다. 품목별로 과일·수산물·햅쌀·송편 등의 차례상 음식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수입 축산물 고려 비율도 늘었다. 이 때문에 “차례상 형식을 간소화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선택의 시대 추석을 준비하는 한 30대 가정주부는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차례를 안 지내거나 설에 한 번만 지내는 집이 많다. 고물가 시대에 음식을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담되는 것 같다. 그런 형식적인 것은 간소화하더라도 차례를 지내는 행위에 의미가 있으니 상관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